이게 뭐 대단해? 그런 마음 품어본 적 누구나 있었을 테다. 미술관에서, 음악회에서, 온갖 대단하단 전시며 연극, 심지어 소설책과 TV프로그램 앞에서까지 수시로 그런 마음과 마주하고는 한다.
 
형편없었어. 지루했다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야. 뭐 그렇고 그런 혹평이라도 날릴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하련만. 이 시대 겸손한 우리 관객들은 제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도리어 정반대의 태도를 보일 때가 적잖다. 이를테면, 눈치를 보고 남들이 하는 그럴듯한 평을 내 것인 양 반복하며 새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감추고서 열띤 박수를 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가끔은 이를 조롱하는 이들도 있다.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에 얽힌 이야기가 그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미술관 벽면에 바나나를 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것으로, 바나나는 그냥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바나나요 테이프도 그렇다. 2019년 카텔란의 전시에서 데이비드 다투나란 이가 이 바나나를 떼서 먹는 일이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바나나를 먹었다며 제 행위에 '배고픈 아티스트'란 이름을 붙이겠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강렬한 인상이 있었는지 한국에서도 지난해 그의 행위를 베낀 어느 대학생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베끼는 수준이어서 더 언급할 가치는 없다.
 
말하자면 예술엔 어떤 거품이 끼여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잔뜩 점잔 뺀 작품, 현대철학을 어찌어찌 표현했다는 난해한 공연 같은 것에는 실제보다 많은 거품이 끼여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언젠가 명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말한 것처럼, 아무 장면이나 찍어놔도 평론가들이 알아서 의미를 부여하고 대중들은 따라서 박수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연극이 너무 재미 없어서
 
야닉 포스터

▲ 야닉 포스터 ⓒ JIFF

 
그런데 이 같은 세태에 짱돌을 들고 일어서 소리치는 이가 나타났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고 목소리가 낯설던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야닉(라파엘 퀴나르 분), 프랑스 어디서 주차장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란다. 그런 그가 모처럼 연차를 쓰고 공연장에 왔다. 막을 올린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공연이다.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에 집중한 지 십여 분이나 되었을까. 야닉은 참지 못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유감은 없지만 연극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요."
 
공연 한가운데서 극이 재미없다고 주장하는 야닉의 말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이조차 공연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구간이 지나가고, 그의 방해에 당혹해하는 배우진과 야닉 사이의 설전 아닌 설전이 관심을 잡아끈다.
 
환불 받으라 vs. 작가 나와라
 
야닉 스틸컷

▲ 야닉 스틸컷 ⓒ JIFF

 
'불편하면 나가서 환불을 받으라'는 배우들과 '내가 쓴 시간이 얼마인데 작가가 나와 해결하라'는 야닉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관객들은 숨죽여 갈등을 지켜보고, 그중 성질 급한 이가 나서 한소리 퍼붓기도 한다.

그러나 공연 한가운데 일어나 따지는 사내다. 어디 쉽게 굽히겠는가. 물러서지 않는 사내의 항변이 궤변인 듯 아닌 듯 절묘하게 이어진다. 영화가 보여준 짤막한 공연만으로도 야닉이 느낀 지루함을 짐작할 것 같았던 나로선 이 상황이 차라리 흥미롭다. 어디 나 하나뿐이었겠나.
 
<야닉>은 독특한 영화세계로 주목받는 퀭탱 뒤퓌유의 신작이다. DJ '미스터 와조 Mr. Oizo'로 더 유명한 뒤퓌유는 2020년 작 <디어스킨>으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전 재산을 털어 산 사슴가죽재킷을 너무도 사랑하여 '세계에서 유일한 재킷이 되려는 재킷의 꿈'을 위하여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이자 부조리극으로, 가벼운 웃음 이상의 인상을, 나아가 오래 곤 곰탕 같은 찐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관련 기사 : 가죽 재킷에 도취된 남자,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
   
프랑스 부조리극의 진수, 전주를 사로잡다
 
야닉 스틸컷

▲ 야닉 스틸컷 ⓒ JIFF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대안과 독립이란 가치를 추앙해온 영화제의 특성을 살려 세계 각지에서 여덟 편의 영화를 특별히 선별해 '프론트라인'이란 섹션으로 묶어 소개했다. <야닉>이 바로 그 여덟 편 가운데 한 편으로, 전주국제영화제 측은 '신선하고 도발적인 감독의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란 단평을 붙여 내놓았다. 다른 어느 감독과도 차별화되는 시선을 간직한 뒤퓌유의 영화야말로 대안과 독립, 신선과 도발이란 가치에 더없이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영화는 그저 작품에 문제를 제기하는 진상 관객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연극 진행을 방해한 야닉이 권총을 꺼내들며 상황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야닉은 직접 극을 쓰고 그를 배우들에게 연기하도록 한다. 위협 당한 배우와 관객들이 일순간에 인질이 된다.
 
그러나 상황은 또 요상하게 돌아간다. 인질범과 인질의 관계가 통상의 범인과 피해자의 관계처럼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야닉은 총을 쥠으로써 비로소 곁의 관객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대화로부터 어떠한 관계가 일어난다. 감정이 피어나고 소통이 이뤄진다. 그를 범죄자로 대하는 이와 그저 총을 든 사람으로 대하는 이가 나누어진다. 이 부조리극에 적응하는 순간, 관객은 영화 속 총든 이의 세계보다 영화 바깥의 세계가 더 부조리한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예술에 대한 영화, 풍자와 역설에 귀를 기울여라
 
본래 연극이 진행될 땐 침묵을 지키던 관객들이 야닉이 일어선 뒤부터 빵빵 터지기 시작했단 점도 흥미롭다. 본래 상영되는 연극의 장르는 코미디, 그러나 연극이 제대로 진행될 땐 관객이 전혀 웃지 않았단 사실이 우스꽝스런 감상을 안긴다. 야닉의 돌발행동이 어중띤 코미디를 그보다는 나은 상황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적어도 코미디의 측면으로 보자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세 차례 상영기회를 얻은 <야닉>은 꽤나 좋은 평가를 받으며 연일 매진행진을 이어갔다. 전주를 중심으로 예술문화활동을 선도하고 있는 '전주영화문화방'에서 '로고'란 필명으로 활동해온 조영빈도 주변에 적극 <야닉> 감상을 추천한 이다. 전주에서 영화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조영빈은 "전작 <디어스킨>을 좋아했던 입장에서 큰 기대를 안고 봤던 영화"라며 "감독의 강점인 긴장과 유머를 넘나드는 기묘한 연출이 이번 작품에서도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조씨는 이어 "야닉은 예술에 대한 영화"라며 "예술이 일반관객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지점에 대해 풍자하면서도 예술이 가져야 하는 위치가 있음을 분명히 역설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10여 편의 작품 가운데 <야닉>이 단연 제일이었다는 조씨는 "결말부에 나아가선 감독의 예술 철학이 탁월하게 드러난다"며 "스포일러로 인해 밝힐 수 없지만 영화팬이라면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고 강력히 추천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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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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