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우리말의 감칠맛>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 30] 노년의 저술 활동 ⑤

등록 2024.03.29 08:02수정 2024.03.29 08:02
2
원고료로 응원
a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우리말의 감칠맛>은 한글학자로서 평생 우리말을 연구해 온 저자의 지식이 온축되고 있는 글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하며, 호랑이도 자식 난 골에는 두남을 둔다. 이것은 짐승의 세상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항상 당하고 보는 일이다. 아무리 호박굴퉁이같이 못생긴 것이라도, 제 자식은 예뻐서 물고 빨고 하면서, 남의 자식 잘난 것을 볼 때에는, 그저 그럴싸하다 여기는 것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제 것이면 돋우 보고 남의 것은 깔보려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성격인가 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이상도 하다. 이 인간의 저열한 본능을 초탈하여서인지, 남의 것은 이쑤시개 하나라도 그저 좋다고 날뛰면서, 우리 것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덮어 놓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여름 옷감으로는 아마 한산 모시에 뒤 덮을 것이 없으련마는, 그물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벨벳이라야 쓰고, 구두끈 하나라도 미국 병정의 것이 아니면 사족을 못 쓰니, 대체 이것이 무슨 병일까. 심지어 부모의 핏줄을 타고난 까만 머리털까지 노랗게 물들여 가면서, 효빈(效頻)을 일삼는 판이니, 아마 눈동자를 파랗게 물들이는 방법을 발명하여 내는 사람이 있다면, 단박에 우리나라 갑부가 될 것은 장담하고 보증할 수 있을 것이다. 거부될 생각 있는 사람은 한번 연구해 보지 않으려는가.

이 배외사상(排外思想)이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양의 덕에서 나은 일이라면, 우리나라에는 대각통도(大覺通道)한 성자(聖者)가 거재두량(車載斗量)으로, 이루 셀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말에 글에 들어서도 제 나라 것은 다들 훌륭하고 좋다고 떠들어 댄다. 그런데 이 방면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겸양의 덕이 도저하다.

오늘날까지 우리네 형제들의 입에서 일본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이것은 다년 일제 압박 밑에서 굴욕의 생활을 하든 타력(楕力)이라 할까. 그러나 타력이란 것은 자주적 제동력이 없는 물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나 타력에 휘둘리기만 하여야 할 것인가. 자주적으로 움직이어야 할 것인가.

그것도 그러려니와, 요새 와서는 혀도 잘 돌아가지 않는 꼬부랑말이 왜 그리 유행하는지. 우리네 일상 회화에 있어서, 장년·청년·중학생·소학생들의 어느 계급을 물론하고 몇 마디씩 영어 부스러기를 씨부렁거리는 것은 항다반의 일이다. 그뿐이랴. 갓 시집간 새색시까지도 시어머니 말 끝에 '오케이'·'땡큐 베리 머취' 하고 응수를 한다니, 겸양의 덕도 이만하면 과식의 정도를 지나 위궤양의 중태에 빠진 것이 아닐까. 언어도단도 분수가 있지,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 우리 언어에 대한 그것보다 특별히 탁월한 까닭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외국말이라야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우리 말에는 깨가 쏟아질 듯한 표현력과 정서미(情緖味) 곧 언어미(言語美)가 전혀 결여한 탓인가.

외국말을 예찬하기에 사족을 못 쓰는 분네들, 시험 삼아 다음의 우리말을 외국어로 번역 좀 해보시라.

(1) 섭섭하다·안타깝다·시들하다·얄망굿다·달금쌉쌀하다·시금털털하다·대견하다·오붓하다·찐덥지 않다.

(2) 아래 턱은 코를 차고, 무르팍은 귀를 넘고

(3) 떡가루를 치려는지 체머리는 무삼리고

(4) 선 수박씨 같든 이가 목탁(木鐸) 속이 되었으며, 단사(丹砂) 같이 붉든 입술 외발 고랑 되었구나.

(5) 충암절벽상(層岩絶壁上)에 폭포수는 괄괄,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주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져 지방져, 소코라지고 평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평풍석으로 으르렁 괄괄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6) 모시를 이리저리 삼아, 두루 삼아 감삼다가, 한가온데 뚝 끈쳐지옵거든, 호치단순(皓齒丹脣)으로 흠빨고 감빨아, 섬섬옥수로 두 끝 마조 잡아 뱌비쳐 이으리라. 저 모시를. 우리 임 사랑 그쳐 갈 제 저 모시같이 이으리라. 이 얼마나 감칠맛이 있는 말인가. 


주석
1> 앞의 책, 351~35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희승 #이희승평전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