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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절망을 넘어서 내일에 투표" 이태원 골목에서 쓰여진 공개대자보

[현장] 이태원 유가족 유정씨 "전세사기 피해자, 예비초등교사와 2030 유권자 네트워크 만들것"

등록 2024.03.21 17:09수정 2024.03.2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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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정씨(고 유연주씨 언니)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참사 현장에 조성된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2030세대에게 총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 권우성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유정(26)씨가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 골목에서 쓴 대자보 내용이다. 고 유연주씨의 언니인 유정씨는 21일 오후 2시부터 이태원 골목에서 공개적으로 대자보를 작성했다. 

이날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보라색 리본 모양의 배지를 옷깃에 달고 연보라색 목도리를 두른 유씨는 큰 종이를 아래에 놓은 채로 오른손에 검은색 매직펜을 쥐고 "다녀왔습니다"라고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10도 안팎의 날씨였지만 바람이 강해 대자보 종이가 날아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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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정씨(고 유연주씨 언니)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참사 현장에 조성된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2030세대에게 총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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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정씨(고 유연주씨 언니)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참사 현장에 조성된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2030세대에게 총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 권우성

 
글을 다 쓴 유씨는 대자보를 양 손으로 들고 이태원 골목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기자들에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자보를) 쓰게 됐는데 쓰고 나니 암울한 현실이 더 와닿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유씨의 대자보는 이태원 참사 추모의 벽에 부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추모의 벽이 해밀톤 호텔과 연결되는 탓에 관계자들이 난색을 표했고 결국 작성한 대자보를 들고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앞으로 유씨는 전세사기 피해자 이철빈씨, 해병대 예비역 신승환씨, 예비 초등교사 포포씨와 2030 유권자 네트워크를 구성해 제22대 총선에서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청년들이 용기 갖고 행동한다면 새벽 맞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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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정씨(고 유연주씨 언니)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참사 현장에 조성된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2030세대에게 총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 권우성

 
대자보는 "다녀왔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9명의 희생자들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의 별이 된 제 동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 유씨는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외면당했습니다"라며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은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고립된 개인주의로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청년들의 입은 틀어막혔고 사지는 억압당했습니다. 한치의 부끄럼 없는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만 민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유씨는 2030 유권자 네트워크를 결성하게 된 경위 또한 적었다. 그는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불공정과 비상식에 맞설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행동한다면 짙고 긴 밤을 지나 반드시 기다리던 새벽을 맞이할 것"이라고 썼다

오는 22일 오후 2시에는 각각 경북대학교와 서이초 인근에서 신승환 해병대 예비역 대학생과 포포(익명) 예비 초등교사가 유정씨에 이어 릴레이로 대자보를 쓸 예정이다. 이어 23일 오후 2시 화곡역 인근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이철빈씨가 대자보를 이어받는다. 

윤석열 정부의 피해자인 이들은 이철빈씨의 제안으로 지난 14일 서로 처음으로 연락을 취하고 '2030 유권자 네트워크(가칭)'를 만들어 활동하기로 했다.

2030 유권자 네트워크는 이날 사전투표가 예정된 4월 첫째주까지 공개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2030 유권자 네트워크는 오후 8시경 발표한 제안 취지문에서 "지금의 무능한 정치는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2030 유권자 네트워크는 "현실을 바꿀 수단이 정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싸우"자고 청년들을 독려했다. 이들은 "우리의 무기는 투표와 참여"라며 "지금의 현실에 실망한 청년의 목소리를 모아 총선에 대응"하자고 말했다.

아래는 유정씨의 대자보 전문이다.

"다녀왔습니다"

이태원참사로 세상을 떠난 159명의 희생자들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의 별이 된 제 동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입니다.

유가족과 많은 시민들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외면당했습니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금전 지원을 운운하며 마치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양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오로지 마약 수사에만 혈안이 되어 다중 인파 관리는 소홀했던 것이 참사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태원에 방문한 희생자들이 문제라며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우리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서울 시내 모든 길을 걸었고 온몸으로 기었습니다.
서로 잡은 연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녔습니다.

 수천, 수만 번을 외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단초가 되었고 우리의 작은 날갯짓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은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고립된 개인주의로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청년들의 입은 틀어막혔고 사지는 억압 당했습니다. 국민의 죽음에는 도피와 외면, 변명만 난무했고 민생·경제·외교를 비롯한 국가 살림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부끄럼 없는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만 민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무참히 짓밟혔으며 민주주의는 사라졌습니다.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비록 나의 행동은 작은 날갯짓에 불과할지 모르나 우리의 날갯짓은 큰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불공정과 비상식에 맞설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행동한다면 짙고 긴 밤을 지나 반드시 기다리던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2024년 봄, 대한민국에 비로소 새벽이 오고 해가 뜨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태원참사 희생자 유연주의 언니 유정이 청년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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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정씨(고 유연주씨 언니. 사진 왼쪽)가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참사 현장에 조성된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2030세대에게 총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오른쪽은 2030 유권자 네트워크 간사 이태우씨다. ⓒ 권우성

 
#이태원참사 #2030유권자네트워크 #전세사기 #초등교사 #해병대예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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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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