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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1도 차이' 극복해 낸 기상청에 박수를

기온 0도와 1도, 그 미세함에 숨은 비밀

등록 2024.02.22 15:13수정 2024.02.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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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에 대설특보가 발효 중인 21일 강원 고성군 진부령에서 중장비가 바삐 움직이며 눈을 치우고 있다. ⓒ 강원 고성군

 
2월 말, 겨울이 끝나면서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우수'가 지났음에도 중부지방, 특히 영동과 강원도 산지로는 폭설, 그야말로 눈 폭탄이 쏟아졌다.

2월 21일(수)과 22일(목) 사이 강원도에 '공식'적으로도 70cm의 눈이 왔으니, 계곡 사이사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그야말로 '미터급' 자연재해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교통사고와 고립 등 피해가 발생했고, 산중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야생 동물들이 탈진해 민가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도 밤사이 10cm 이상의 매우 많은 눈이 쌓여 지하철 운행에 차질이 생겼고, 인천에도 가로수가 쓰러질 정도의 눈이 내렸다.

특히나 이번 눈은 '습설', 매우 습한 눈이다. 수증기가 많고 기온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경우 마치 떡과 같이 눅눅한 눈이 지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눈은 포슬포슬한 눈처럼 '뻥튀기'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상당량비(강수량 대비 적설 비율)가 매우 낮다.

따라서 적설 예측만 보았을 때는 적은 양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압축되고 눅눅하기 때문에 무게가 꽤 나가고 많은 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 비닐하우스 붕괴가 습설에 의한 대표적 피해다.

21일(수)과 22일(목)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밤사이 왜 급격히 습설이 발달한 것일까? 습설이 폭발적으로 쏟아진 시점 이전에도 이미 영동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동 대설 패턴'의 눈이 오고 있었다. 이는 시베리아에서 확장한 고기압이 동쪽으로 진행하다가 개마고원에 부딪친 후 그 뒤쪽인 동해안으로 돌아 북동풍으로 변해 우리나라로 유입하다 태백산맥에 다시 부딪히며 상승해 만들어내는 패턴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21일 낮부터 불편한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나라 남서쪽에서 저기압이 다가온 것이다. 이 저기압은 태평양에 위치한 이동성 고기압과 대륙에 위치한 시베리아 고기압 사이의 '수렴대'에서 발생한 것이다.


저기압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다가오며 그 전면에서 남동풍을 만들어냈다. '남쪽'에서 올라온 바람이기에 기온이 온화하고 많은 습기를 가지고 있어서, 이미 오고 있는 눈에 엄청난 '실탄'을 공급했고, 기온 하강도 막아 폭발적 습설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지점에 까다로운 임계점이 존재한다. 온화하고 습한 공기가 눈을 녹여버릴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그 임계점에서 조금만 차가운 쪽으로 치우치면 이러한 습설이 올 터이지만, 기온이 미세하게 높아져 눈이 녹아 비 쪽으로 치우치면 말 그대로 그저 비가 올 뿐이다. 1도 이내의 아주 조그마한 기온 차이로 완전히 다른 날씨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구라청? 임계점과 싸우는 공포의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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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국가기상센터에서 예보관 등 직원들이 컴퓨터 화면의 기상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2023.6.23 ⓒ 연합뉴스

 
이 임계점을 최대한 정확히 예측해 판단해야 하며, 그 판단을 근거로 재해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전 부처와 지자체 등에 알려야 하는 무게감을 견뎌야 하는 곳이 바로 '기상청'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고 '구라청'이라며 비아냥대는 곳이 사실은 매일매일 이런 임계점들과 싸우는 공포의 직장인 것이다.

기상법 제1조에는 "기상재해 및 기후변화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생활 서비스로서의 예보가 아닌 방재 목적의 예보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학적 예측 결과에 대해 사회적 반응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연구 업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예보문에는 마치 외교관의 레토릭처럼 숫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가지는 '고뇌의 무게'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 기상청이 주 초반, 이미 영동에 50cm 이상의 눈을 예보하고, 수도권에도 대설특보 기준에 해당하는 적설을 예측하였다. 공식 예보에서 50cm 이상이라는 사실상의 '미터급' 적설은, 아무리 과학적 예측이 뒷받침된다 하더라도 쉽사리 예보문에 포함하기에는 부담감이 크다. 수도 서울에 대설특보 수준의 적설을 예보하는 것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보관들의 많은 분석과 토론, 지혜를 모아 고뇌 끝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 무게에 찬사를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예보관들을 애써 무시하며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자국 재난 예측 기관을 비난하는 여론은 있다. 마치 축구의 골키퍼처럼 전부 선방해야 본전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우리나라는 일종의 놀이처럼 그 비난의 정도가 지나치다. 우리나라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자체 수치예보 모델 보유국이며 예보 수준도 최상위권에 있다. 

금메달을 거머쥐지 못한 선수가 비난의 대상이 아니듯, 우리에겐 또 하나의 '국가대표'인 대한민국 예보관들에게 박수를 보내주면 어떨까.
#폭설 #대설 #눈 #기상청 #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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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총괄예보관실과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를 거쳐, 현재는.. 현재는.. 영업용 화물차를 운전하는 노마드 인생. 그거 아시죠? 운전하는 동안, 샤워할 때 만큼이나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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