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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은 누구였나, 알고 보니 더 중요한 봉오동 전투

[나의 논문을 말한다] '1920년 북간도에서의 최진동의 항일무장투쟁'

등록 2024.03.01 11:09수정 2024.03.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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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육군사관학교의 갑작스러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건국절 논란,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정교과서 논란에 이은 세 번째 '역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전국 역사학도 서명운동·대통령실 앞 1인 시위·전통활쏘기대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에 저항했다(관련기사: 육군사관학교와 윤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https://omn.kr/26vsz).

독립운동사 전공자로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왜곡과 모욕은 내 공부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선양으로 맞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번에 그 첫 번째 결실을 이루게 됐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북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진동 장군(1883~1941)에 관한 학술논문이 나온 것이다.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이유

먼저 내가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까닭을 소개하고자 한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의 해' 선포 후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로 평가받는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 및 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에 산재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리고 최진동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끈 전투'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는 듯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도 홍범도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면서 전투를 홍범도 홀로 지휘한 것처럼 묘사된 바 있다.

사실 봉오동 전투 당시의 활약뿐만 아니라 최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홍범도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도 봉오동 전투 및 홍범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꾸준히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최진동에 관한 연구는 저조한 편이다.

다행히도 독립운동사·군사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최진동에 관한 연구가 너무 저조했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최진동에 관한 학술연구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나의 논문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이하 내용들은 본 논문의 일부를 요약·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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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 ⓒ 반병률

 

1920년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두만강 일대 국경 부근에서는 최진동의 사병 조직이었던 '대한군무도독부'가 주축이 되어 산발적인 교전이 이뤄졌다.

1920년 3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는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군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로 침입하여 일본 경찰·군대와 교전을 치렀다(온성 작전).

비상이 걸린 일제는 온성 작전 당시 침투한 독립군의 수령이 최진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 일대에 대한 토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진동 부대의 온성 작전이 봉오동 전투를 이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일제의 움직임에 독립군들도 비상이 걸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봉오동 일대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모여있었는데, 일제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단일한 지휘체계에 대한 확립을 꾀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 5월 19일 군무도독부·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연합으로 최진동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됐다.

이어 합류한 홍범도 부대는 북로독군부 산하 북로정일제1군사령부(사령부장 홍범도)라는 조직으로 개편된다. 홍범도 부대는 명목상 북로독군부 아래 편제됐으나 일종의 '외번(外藩)'격으로서 지휘명령권이 북로독군부장이나 국민회장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독립군 연합이 성사된 직후인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 연합은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최진동 역시 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직할 부대를 이끌고 한 고지를 맡아 전투를 수행했다. 그렇게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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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6월 두만강 국경 근처에서 전개된 최진동 부대의 전투도. 일제가 당시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 위에 해당 전투 지역 위치를 표시했다. ⓒ 김경준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관은 누구였나

그런데 최근 학계 일각에서 '봉오동 전투 당시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기존 연구자들은 대체로 홍범도가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 '홍범도 단독지휘설'(박민영), 지휘권은 홍범도와 최진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홍범도·최진동 공동지휘설'(반병률) 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사령관' 최진동이 전투를 지휘했고 홍범도는 휘하의 '연대장'에 불과했다는 1920년 12월 25일 자 <독립신문> 기사를 근거로 전투를 총지휘한 주체는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이라는 직책은 임시정부가 구상했던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편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제 이러한 편제로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홍범도는 편제상 북로독군부 산하에 편입되어 있긴 했으나 외번격으로 그 어디에도 명령권이 속하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신민단 사령관 박승길의 회고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직전 홍범도와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 단체들에 작전태세와 대기명령을 발했다 한다. 그런데 정작 신민단 군사들은 전투 도중 홍범도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 "우리는 다른 데서 온 군인들이다"라며 거부했다.

여러 사료와 증언을 종합해 봤을 때,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권은 최진동과 홍범도만 행사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의 지휘관들 각자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음을 추측게 한다.

이러한 결론이 최진동과 홍범도 두 사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걸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누가 총지휘관이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지휘체계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기습해오자 하나가 되어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봉오동 전투 승리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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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미상의 최진동 장군 사진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에 수록)

 

홍범도·최진동, 그들을 잊지 말아야

본 연구에서는 1920년 당시 북간도 지역 독립군이 얼마나 열악한 현실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룩했는지 다시 한번 조명했다.

다만 '1920년 북간도 지역'이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매우 한정된 범위만을 살펴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봉오동 전투 승리 후 최진동은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1920년 이후 최진동의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을 생각이다. 

여러모로 부실한 논문이기에 세상에 소개하기가 많이 민망하다. 그럼에도 굳이 부족한 논문을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최진동이라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본 논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 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드러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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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 장군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번 묘). 2024년 2월 16일 장군의 묘역에 논문을 헌정하며 술 한 잔 부어올렸다. 이날 올린 술은 최진동의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의 주민들이 빚어마시던 '농태기'라는 술이다. ⓒ 김경준

 

[논문 정보]

- 제목: 1920년 북간도에서의 최진동의 항일무장투쟁
- 저자: 김경준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 등재지: 동북아역사논총 82호
- 발행기관: 동북아역사재단
- 발행년월: 2023.12.
- 논문 열람: https://url.kr/diyw46 (무료 PDF 다운로드)
#최진동 #홍범도 #봉오동전투 #독립운동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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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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