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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했다고 벌주면 안 돼" 2002 기적 만든 히딩크의 믿음

[TV 리뷰]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3>

24.01.22 11:17최종업데이트24.01.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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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히딩크, 코치 박항서, 선수 안정환-김남일까지 다시 뭉친 2002 한일 월드컵 주역들이 조기축구를 통해 추억의 라인업을 재현했다.
 
21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3> 15회에서는 네덜란드를 찾은 '어쩌다벤져스'와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만남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안정환과 김남일, 박항서 전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은 히딩크 감독과 오랜만에 재회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시 한 자리에 모인 2002 주역들은 한일 월드컵 시절의 다양한 비화를 털어놓으며 추억에 잠겼다.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에 관한 리얼 스토리를 들려주겠다"며 2002년 월드컵 당시 화제가 되었던 '안정환 길들이기' 에피소드를 꺼냈다. 당시 히딩크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동기부여와 경쟁력 강화, 선수단 장악을 위해 몇몇 스타 선수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안정환도 히딩크로부터 채찍질을 피하지 못한 스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의 몇 안 되는 유럽파였던 안정환(당시 이탈리아 페루자)을 향해 "소속팀에서도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를 한국 대표팀 주전으로 쓸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혹평했다.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는 훈련장에 고급 차를 몰고 명품옷을 입고 나타난 안정환에게 일부러 자존심을 긁는 발언을 계속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히딩크는 월드컵에서는 안정환을 누구보다 중용했다. 안정환은 절치부심하여 히딩크의 기대에 부응하는 선수로 거듭났고, 미국전 동점골과 이탈리아전 골든골 등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4강 신화의 주역이 됐다.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은 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재능에 비해 기량은 아직 그만큼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아직 더 성장할 수 있어 보였다. 그래서 훈련 시작 후 몇 달간 안정환을 계속 자극했다"고 말했다.
 
안정환의 역량을 끌어올리려 했던 히딩크의 전략은 적중했다. 히딩크는 "안정환은 결정적인 골을 만들어낼 능력과 열정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월드컵에서 화려하게 증명해냈다"고 극찬했다. 이어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이에 안정환은 "감독님이 저를 길들이고 있다는 것을 저도 느꼈다. 선수는 감독과 싸워서 절대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받아들인 거다. 감독님이 제가 부족한 걸 확실히 짚어주신 거니까. 그에 따르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조건 맞춰갔다"며 스승을 향한 신뢰를 드러냈다.
 
김남일의 발탁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도 나왔다. 김남일은 한일 월드컵에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불과 월드컵 1년 전만 해도 평가전에서 부진한 모습으로 언론의 집중적인 포화를 받던 선수였다.
 
박항서 코치는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5대 0으로 진 경기가 있었다. 그때 김남일이 자책골을 넣으며 크게 부진했다. 히딩크 감독님도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체코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김남일은 뒷목을 잡았다. 한국말을 모르는 히딩크 감독은 양 손가락으로 오대영을 의미하는 익살맞은 제스처를 선보이며 "나도 알고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시 체코전의 부진으로 김남일은 언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했다. 박항서 코치도 히딩크 감독에게 언론의 반응을 전달하며 우려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박항서에게 "우리 팀에 그만한 정신력과 체력을 지닌 선수가 김남일 말고 누가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며 치명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김남일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다. 히딩크 감독은 김남일에 대해 "안정환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스타 플레이어지만 훌륭한 미드필더들의 백업이 없었다면 활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김남일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결승에 가지 못했던 이유도 김남일 때문이라고 밝혔다. 히딩크는 "결승에 꼭 가고 싶었다. 그런데 김남일이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독일과의 4강전에서는 뛰지 못했다. 김남일이 없어서 팀이 약해진 것"이라며 당시 김남일이 대표팀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을 설명했다. 히딩크는 "그때 왜 부상 당했냐"고 장난스럽게 호통을 치며 김남일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선·후배간의 서열이 엄격했던 한국 축구계이기에, 동등하게 이름을 부르며 수평적인 분위기를 추구했던 히딩크의 개혁은 큰 화제가 됐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의 선후배 질서를 존중한다. 그러나 경기장에서는 경직된 분위기를 줄 수 있다"며 호칭 정리를 주문했다. 히딩크 감독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막내였던 이천수에게 최고참이자 주장인 홍명보에게 반말을 하도록 지시했고, 그래서 "명보야, 밥 먹자"라는 희대의 어록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히딩크는 또다른 추억으로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회상했다. 안정환은 전반 PK 찬스에서 키커로 나섰으나 이탈리아 골키퍼 부폰의 선방에 막혀 실축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부진하던 안정환을 교체하지 않았다. 경기에 졌다면 패배의 원흉이 될 뻔했던 안정환은 설기현의 동점골로 1대 1로 맞선 연장전 막판에 헤더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며 영웅으로 거듭났다.
 
히딩크는 "그때 안정환을 왜 교체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그 당시에는 선수가 실수를 하면 처벌하는 관행이 시스템에 녹아있었다. 하지만 실수는 실수일 뿐 큰 문제가 아니었다"며 "결과적으로 안정환은 본인 커리어에서 가장 찬란한 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박항서 코치는 "당시 안정환을 끝까지 바꾸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안정환이 골을 넣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히딩크 감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론(Of course)"이라고 답하며 그 이유로 "젊은 선수들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경기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 한국은 실수를 다소 과하게 처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어리석은(Stupid) 생각이다"라고 일축했다. 이어 히딩크는" 승부욕과 열정이 넘치는 선수들을 함부로 교체했다가는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선수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실수를 한다고 교체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지도 철학을 밝혔다.
 
안정환은 "만일 그때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교체하고 경기에 졌다면, 저는 당시 분위기상 대한민국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죄인이 돼서 외국으로 이민가서 살아야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지금도 히딩크 감독님에게 가장 감사한 일은 그때 저를 끝까지 믿고 뛰게해준 것"이라며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했다. 이에 히딩크 감독은 "문제 없다. 그랬다면 나와 같이 암스테르담에 오면 된다"고 유머러스하게 화답했다.

당시 안정환은 골든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가는 대신, 박항서 코치에게 안겨 뽀뽀 세례를 받았다. 이를 보고 서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히딩크는 "질투났다. 내가 더 뽀뽀를 잘해줄 수 있는데"라고 장난스레 대꾸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말뿐이 아니라 히딩크 감독은 즉석에서 안정환과 박항서, 김남일에게 번갈아 볼에 키스를 해주며 여전한 쇼맨십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었던 황선홍이 히딩크 감독을 지나쳐서 박항서 코치와 포옹한 장면도 큰 화제가 됐다. 박항서 코치는 난감해하며 그 원인도 바로 안정환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주장했다.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득점에 성공한 이후 아내를 위해 선보인 '반지 세리머니'가 한동안 화제가 된 바 있다. 박항서는 "그 세리머니가 꼴보기 싫었다. 그래서 폴란드와 경기 전날 황선홍에게 '골을 넣으면 안정환처럼 이상한 세리머니를 하지 말고 벤치를 향해 세리머니를 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만 잘못 알아듣고 나한테 달려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항서는 "그 사건 이후 히딩크 감독에게 황선홍이 나한테 온 이유를 자세히 다 설명했다. 히딩크 감독도 문제 없다며 이해했다. 그런데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서 황선홍이 선발에서 제외되자(황선홍은 2차전 미국전에도 선발 출장했다) 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가지 않고 나한테 왔기 때문이라고 기사가 났더라"고 털어놓으며 폭소를 자아냈다.
 
공교롭게도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달려와 포옹했던 애제자 박지성은, 이후로도 히딩크와 PSV 아인트호번을 제외하며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이를 두고 히딩크는 "안정환도 골을 넣고 나한테 왔더라면 내가 이탈리아에서 PSV로 뺏어왔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안정환은 "원래 히딩크 감독님에게 가려고 했는데, 박항서 코치님이 뽀뽀하느라 막아서 못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히딩크는 안정환의 발탁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 박항서였다는 훈훈한 뒷이야기도 덧붙였다. 히딩크는 "안정환을 고를지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박 코치가 '안정환은 반드시 뽑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게 박항서가 훌륭한 코치인 이유"라고 말했다.
 
히딩크는 이날 조기축구 스페셜 A매치를 치르는 어쩌다벤져스를 위한 일일 감독직을 수락했다. 수석코치에는 박항서, 안정환과 김남일은 선수로 출전하게 되며 추억의 2002 멤버가 그대로 재현됐다.
 
어쩌다벤져스는 네덜란드 7부 리그 소속의 강호 ASC 뉴랜드와 맞붙게 됐다. 전반 22분 어쩌다벤져스는 뉴랜드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0대 1로 끌려갔다.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코치는 후반들어 김남일과 안정환을 교체 투입하며 승부욕을 드러냈다. 두 전직 국가대표는 그라운드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헉헉거리며 세월에 따른 체력적 한계를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녹슬지 않은 축구감각과 패스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을 바꿔놨다.
 
후반 13분 이준이의 동점골이 터지며 1대1로 승부는 원점이 됐다. 이어 후반 27분에는 김남일의 어시스트를 이어받은 김현우가 가슴 트래핑에 이은 오른발 슈팅으로 짜릿한 역전골을 터뜨렸다. 김현우는 22년 전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와 안겼다. 히딩크 감독은 골이 터질 때마다 선수들과 함께 전매특허인 추억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화끈한 쇼맨십을 발휘했다.

경기는 22년 전 이탈리아전을 연상시키듯 어쩌다벤져스의 짜릿한 2대 1 역전승으로 끝났다. 경기 후 히딩크 감독이 직접 선정한 경기 최우수 선수에는 김남일과 안정환이 공동으로 선정됐다. 히딩크는 재치있게 축구화 한 짝을 둘로 나누어 친필 사인을 새겨서 사이좋게 두 사람에게 선물했다.
 
히딩크 감독은 제자들과 함께했던 뜨거운 하루를 마무리하며 "저도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했다. 여러분이 종사한 모든 스포츠에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모처럼 2002년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드는 히딩크 감독과의 재회와 선수들의 유쾌한 케미는 시청자들에게도 감동을 선사했다.
뭉쳐야찬다3 거스히딩크 박항서 2002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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