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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야"... '착한 사장'이라는 기대, 이렇게 부서졌다

[N잡러 노조하다⑨] 민간위탁기관 하청 노동자가 겪은 일

등록 2024.01.18 10:53수정 2024.01.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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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노동자로 여러 일을 경험했습니다. 편집자와 대리운전을 거쳐 현재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결국 노동조합이냐고요? 일 하는 사람들에게 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기자말]
"직장이 민주적으로 운영되길 바랐습니다."

서울시 산하 민간위탁기관인 노동자복합시설에서 근무했던 A의 말입니다. 그는 이제 이 직장에 다니지 않습니다. A가 다닌 직장은 노동인권을 중시하는 기관으로 원청 사용자는 서울시였습니다. 운영은 서울시와 위∙수탁계약을 맺은 하청인 민간단체가 맡았습니다.

통상적인 간접고용 구조에서 하청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 하청은 "권한과 지급 여력이 없다" 면피하고, 원청은 "법적 책임이 없다"며 회피합니다. A가 일한 곳도 일반적인 원∙하청 구조의 모순, 이른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가 동일하게 재연됐습니다.

밖에서는 하후상박 임금인상, 안에서는 임금삭감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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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하후상박 임금인상'을 언급한 사용자가 있는 조직에서 하청직원에게 '임금 삭감 동의서'를 받은 일이 벌여졌습니다. ⓒ 픽사베이

 
지난해 초 이 기관의 원청인 서울시에서 내려오는 운영 예산이 대폭 삭감됐습니다. 하청 사용자인 민간단체는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에 동의하라고 했습니다. A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직이 어려우니 임금 삭감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라'는 사용자의 종용에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 동의서'를 내민 사용자 측은 노동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이었지요.

이 과정을 겪으며 A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은 아니기에 그는 자신의 직장이 최소한 민주적으로 운영되리라 기대했습니다. 운영을 노동단체가 하니 노동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사기업보다야 나으리라 바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직이 위기에 처하자 사용자들은 노동자의 임금부터 깎으려 했습니다. A는 이 과정에서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즈음 A는 그의 사용자 중 한 사람인 B의 발언을 두고 황당해했습니다. 해당 인사가 공개적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핵심'을 언급하며 "노동운동이 앞장서 적정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적게 받는 쪽 임금을 더 올리는 '하후상박 임금인상'을 주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발언했기 때문입니다. 

B의 말은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단된 노동시장에서 하청∙비정규직 등 더 열악한 노동자를 중심으로 임금을 인상하자는 건데요. 딱 A가 원하던 거였습니다. 하지만 B를 포함한 A가 일했던 기관의 사용자들은 정작 해당 기관의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을 요구했지요. 


A가 다닌 이 기관의 저연차 말단 직원은 최저임금 수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적게 받는 쪽 임금을 더 올리는 하후상박 임금인상"은커녕, 기관 예산이 줄자 곧장 임금을 삭감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는 B라는 사용자 한 명이 결정한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하후상박 임금인상'이 내부 조직에서 얼마나 지켜지기 어려운지 보여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청 노동자로 A와 같은 기관에서 일한 C는 이른바 '운동권' 인사들의 '내로남불'을 꼬집었습니다. 

"기가 찼습니다. 밖에선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자신들이 운영권을 가진 기관에선 저임금 하청 노동자에게 '임금 삭감에 동의하라'고 강요하다니요. 이 기관이야말로 민간위탁이라는 간접고용과 원∙하청으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모순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들의 행태는 '내로남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임금 삭감에 동의해야 노사 간 신뢰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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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산하의 민간위탁기관에 일하는 A는 서울시 예산이 줄었다는 이유로 '임금 삭감 동의서'를 받았습니다. ⓒ 픽사베이

 
사실 A와 C가 겪은 일은 민간위탁기관에서 흔히 벌어지는 광경입니다. 돈줄을 쥔 서울시나 의회가 예산을 삭감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하청 노동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이 과정에서 평소 제아무리 진보적이거나, 노동운동 출신이라도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서울의 또 다른 대표적 취약노동자 지원 기관에서 일하는 D는 노동운동가 출신 사용자에게 '임금을 삭감해 고통분담하자'는 얘기를 들은 때를 기억합니다.

"원청인 서울시에서 내려오는 예산이 줄자 사용자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임금 삭감이나 임금동결을 먼저 얘기하더군요. 내부 노동조합이 임금 삭감에 반대하자, 한때 비정규직 운동을 했다는 사용자는 노동자들을 향해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D의 사용자는 기관장으로 평직원들과는 다른 별도의 임금테이블을 적용받습니다. 직원들보다 많게는 월급을 배 이상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직원들에게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동의해야 노사 간 신뢰가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 도대체 누구와 고통을 나누는 것인지 모르겠더군요. 그것도 노동자들보다 월급을 배 이상 받는 기관장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전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지 '노사 간 신뢰가 생긴다'니요? 구태하다 느꼈습니다."
 

'착한 사용자'라는 낭만적 기대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고통분담'은 늘 갑이 을에게,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했습니다. 1990년대 IMF 금융위기 시절 김영삼, 김대중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A의 사용자가 주장하는 '정규직 양보론'까지. 사회적 불평등이나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노동자가 양보하자는 주장이 반복돼 언급됐습니다. 고통분담론은 자본주의사회 모순을 두고 벌어지는 전선을 '노동 대 자본'에서 노동자계급 내부로 이동시킵니다.

그 결과, 노동자 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노동계가 고통분담론을 경계하는 이유고, 반대로 자본과 정부가 위기 때마다 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배경입니다. 다만, 최소한 사용자 단체나 정부도 이 전가의 보도를 하청∙비정규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자면서 대놓고 휘두르진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포함한 제 주위의 동료들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민간위탁기관의 사용자가 된, 한때 누군가의 권리와 이해를 지키려 한 소위 운동권 출신들에게 들은 말입니다. 

"3년마다 원청인 서울시와 하청이 위수탁 재계약을 하고 그때마다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립니다. '정규직'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했지만, 정작 입사 1년도 안 돼 하청이 변경돼 고용계약이 해지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선 '하청∙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자'고 외치며 자신들의 명망을 유지하면서, 안에선 낯을 바꿔 '고통분담'을 외치며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사용자들의 이중적 행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D가 다니는 기관엔 노동조합이 있어, 그나마 사용자들의 임금 삭감 시도에 제동을 걸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꺼내 든 고통분담론으로 인해 노동조합도 내홍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통분담론이 노동자 간 갈등을 유발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 것이지요.

노동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받는 임금으로 먹고삽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임금 삭감은 결과적으로 노동자 개인의 생존을 뒤흔드는 일입니다. 특히 임금도 적고, 고용도 불안정한 하청∙비정규 노동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D도 처음엔 운동권 출신인 본인의 사용자가 통상의 사용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기대를 더는 품지 않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모든 사용자를 적대시하는 건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입니다. 그렇다고 사용자 개인의 과거 이력이나 '착한' 심성이 그의 이해관계나 계급적 정체성을 압도하리라는 기대는 낭만적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민간위탁기관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들은 이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중입니다.
#민간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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