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상하이 탐방 ①] 루쉰공원에서 동방명주까지

등록 2024.01.07 16:12수정 2024.01.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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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의 과학기술 생태계 탐방' 이란 주제로 고2 학생 8명과 함께 일주일(2023.12.30.-2024.1.5.) 동안 상하이, 항저우, 베이징을 둘러본 기록입니다. - 기자말

인천공항은 연말연시를 해외에서 보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긴 줄에 매달려 힘겹게 탑승 수속을 마치고 상하이행 비행기를 탔는데 객석이 텅텅 비었다. 현 정부의 가치 동맹을 내건 외교 전략으로 소원해진 한중 관계가 인적교류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모양이다. 인천공항에 내린 눈이 비행기의 출발을 지연하듯 외교관계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1시간 반 정도 짧은 비행을 마치고 상하이 푸둥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밟는데 중국공항의 일처리는 여전히 더디고 경직된 모습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시행하던 건강 상태 체크와 코로나 샘플 검사가 없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루쉰공원에서 만나는 윤봉길 의사의 스물 다섯 해 짧은 생애

학생들과 함께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루쉰(鲁迅)공원이다. 1896년 영국인들이 사격장으로 조성했는데 1922년부터 홍커우(虹口)공원으로 불리다가 1988년 루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루쉰이 이곳을 주로 산책했으며, 1956년 사망 20주년을 맞아 루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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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의 스물다섯 해 짧은 생애가 전시된 기념관이 겨울비를 맞으면서도 당당하게 서 있다. ⓒ 김대오

 
우리에겐 무엇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수통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거주민 대표 가와바타를 암살하고, 많은 일본군 고위 간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장제스는 이를 두고 4천만 중국 대군도 못할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윤봉길의사의 호를 딴 매헌(梅軒)기념관에서 당시 촬영된 영상을 관람하는데 1932년 12월 19일 순국 당시 윤봉길 의사의 나이가 스물다섯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왔다.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도 비장하고 애잔하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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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 당시의 영상 의거 현장에서 당시의 의거 영상을 보는 것은 색다른 감동과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 김대오

 
루쉰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매헌기념관을 나와 공원을 둘러보는데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합창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수십 명이 둥근 원을 이뤄 지휘에 맞춰 문화대혁명 시절 군가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붉은 목도리, 오성홍기를 든 어른들도 많아 문득 동원된 관제 집회를 떠올리게 한다. 태극권, 제기차기, 사교춤 등 개인적인 취미와 유흥이 있던 자리에 사회주의 붉은 합창이 들어선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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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된 관제 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합창 개인의 유흥이 아닌 집단의 붉은 합창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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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기념관 루쉰의 작품이 교과서에서 퇴출되어도 그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 김대오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우상이라며 열을 올려 루쉰에 대해 소개하고, 루쉰기념관과 루쉰의 묘소를 둘러보는데 다들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중국에서도 최근 교과서에서 루쉰의 작품이 대거 퇴출되기도 했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을 잡아먹는 중국의 봉건 전통을 바꿔야한다고 외쳤던 루쉰의 주장이 G2로 성장한 중국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자를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은 망한다(漢字不滅, 中華必亡)"는 루쉰의 말이나 민주와 과학이라는 서구적 가치를 주창한 5.4운동의 정신이 어쩌면 서구의 길이 아닌 중국식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21세기 시진핑 주석의 중국과 불협화음을 낼 소지가 충분히 있어 보이기도 한다. 루쉰은 자신의 작품이 배제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루쉰의 작품 <쿵이지(孔乙己)>를 패러디하여 만든 노래 '밝고 명랑한 쿵이지(阳光开朗孔乙己)'가 최근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청년 실업률이 20%에 달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쿵이지처럼 실업자 신세를 전전해야 하는 현 상황에 대한 자조와 풍자로 읽힌다. 어떤 형태로든 루쉰은 21세기 중국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중국 현대문학의 기수로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상하이의 랜드 마크는 여전히 동방명주여야 하는가?

루쉰공원을 나와 동명명주로 향한다. 약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황푸(黃浦)강 주변으로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았다. 6300km를 달려온 장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상하이(上海)가 있는데 상하이의 한자를 중국어로 풀이하면 '바다로 가자 도시'가 될 것이다. 장강을 한 마리의 용에 비유하면 그 용이 입에 문 여의주가 어쩌면 동방명주가 아닐까.

동방명주 타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 긴 줄과 마주한다. 우리말에서는 길게 늘어선 줄을 '장사진'으로 뱀에 비유하는 반면, 중국은 '장룡'이라고 용에 비유하는데 과연 늘어선 사람이 많다. 높이 267m 회전식 뷔페에서 상하이의 야경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며 저녁식사를 하는 호사를 누린다. 동방명주는 높이가 468m인데 바로 곁으로 굴뚝처럼 솟은 상하이 타워가 632m, 병따개 모양의 상하이 세계 금융센터가 492m, 진마오 타워가 421m로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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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의 근대 건축물 서양열강의 다양한 양식의 건축군이 잔잔한 조명에 자태를 뽐낸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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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강 유람선을 타고 보는 야경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동방명주의 우아함이단연 돋보인다. ⓒ 김대오

 
여산 진면목을 보려면 여산을 벗어나야 하듯 동방명주에서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황푸강을 따라 흘러가니 왼쪽으로는 와이탄의 다양한 양식의 근대 건축물들이, 오른쪽으로는 마천루의 빌딩군들이 화려한 조명 옷을 입고 각각의 멋을 뽐낸다. 조명은 누추한 것을 감추기도 하고, 빼어난 것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내기도 한다.

현지 가이드에게 이곳에서는 왜 홍콩처럼 레이저쇼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2014년 12월 31일 발생한 압사사고로 35명이 사망하면서 레이저쇼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알려준다.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든 '인구가 많다는 기본값'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상하이에 동방명주보다 높은 건물이 생기면서 더 이상 동방명주가 상하이의 랜드 마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줏빛 조명을 두르고 강가에 서서 그 빛깔을 우아하게 강물에 드리우고 있는 동방명주를 보는 순간, 여전히 상하이의 랜드 마크는 동방명주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와이탄에는 20세기 초, 서양 열강이 중국에서 수탈한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52개의 건축 양식을 지닌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한때 "개와 중국인은 들어오지 마시오" 문구가 적힌 굴욕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 맞은편에 보란 듯이 고층 빌딩을 연이어 지은 것은 이제 중국은 이렇게 발전했노라 보여주고 싶은 자기만족과 과시욕의 결과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누가 더 높은 빌딩을 짓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술과 가치 표준을 만드느냐의 싸움일 것이다. 도로를 달리는 절반에 가까운 전기 자동차, 현금이 사라진 QR코드 결제 방식, 빅브라더를 연상시키는 곳곳의 CCTV, 공공장소에서의 담배 냄새 등 희망과 우려를 함께 간직한 채 중국이라는 유람선은 2023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위를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
#상하이 #루쉰공원 #윤봉길 #동방명주 #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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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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