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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는 피했지만 마음으로 매일 익사하고 있어요

기후 변화로 생긴 재난... "머지 않아 우리 모두 기후 트라우마 겪을 것"

등록 2023.12.27 17:02수정 2023.12.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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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기후뉴스 소식을 정리하다 문득 그 곳을 떠올렸다. 리비아. 대홍수가 난 그 곳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그러다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같은 검색어로 곳곳에서 안타까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아래 4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현장의 사람들이고 두번째 공통점은 트라우마, 기후 트라우마였다.

리비아 데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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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0일 태풍 다니엘이 리비아 동부를 휩쓸고 지나간 후 리비아 동부 항구도시 데르나 시의 피해 모습. 태풍이 리비아에 상륙한 후 전례 없는 홍수가 리비아를 강타했다. 특히 데르나 시 남쪽의 두 댐이 붕괴되어 인근 지역 전체가 휩쓸려 갔다. ⓒ EPA/연합뉴스


박사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데르나(Derna), 리비아의 항구도시로 사막의 땅 리비아에서 유일하게 푸른 산지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지중해 푸른 바다가 펼쳐진 보석처럼 아름다운 관광지.

그런 이 곳에 상상도 하지 못한 재난이 몰아닥친 것은 2023년 9월 14일 밤이었다. 지중해를 휩쓴 강력한 태풍 '다니엘'이 강한 비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금방 지나갈 줄 알았다. 당국에서는 홍수주의보조차 제대로 발령하지 않았고, 그 사이 두 개의 댐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내전 상태에 있던 리비아 두 개의 정부는 전쟁 비용 마련에 급급해 지난 20년간 댐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관리 인력도 없었다. 마침내 낡은 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물 폭탄이 터져 내려왔다. 건물 6층 높이의 물이었다고 한다. 이 물이 흙과 나무와 돌덩이와 함께 도시를 삼켰다.

10만 명이 살고 있었다. 단순히 집이 무너지고 차가 떠내려간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도시의 한 부분이 잘린 채 낭떠러지 아래 바다로 쓸려 내려갔다. 불과 90분 만에 최소 1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이 실종됐다. 이것이 리비아 대홍수로 기록되는 데르나 참사였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두 달 뒤 데르나 시를 찾은 <알자지라>의 기자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박사가 참사 한 달 뒤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 이웃사람들은 말했다. 가족과 집을 모두 잃은 박사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고. 그런 사람은 박사만이 아니었다고.
 
그는 자신이 직면한 충격을 견딜 수 없었고 재난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도 정신적 지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웃사람 리파에이의 알자지라 인터뷰)

이웃사람들에 따르면 박사는 폐허로 변한 집 문 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홍수에 휩쓸린 또 다른 친척들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결국 박사는 집 근처에서 발견됐다. 그의 이름은 칼레드 알 샤리(Khaled al-Shaari)였으며 38세였다.

박사만의 일이 아니었다. 참사 이후 다른 데르나 주민 25명이 생을 달리했다. 꿋꿋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상처의 흔적은 커보였다. 홍수를 가까스로 피해 살아남은 31세 미술교사 라일라(Layla Eljerbi)는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홍수는 피했지만 마음 속으로 매일 익사하고 있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인생 전체가 눈앞에서 휩쓸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파트가 물에 잠길 때) 예술 작품, 사진, 추억 등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매일 밤은 잠과의 싸움입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내 삶과 예술 작품을 휩쓸어 버린 대홍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홍수는 피했지만 마음속으로 매일 익사하고 있어요.
(생존자 라일라의 알자지라 인터뷰, 2023년 11월15일)

기후 트라우마(climate trauma), 홍수나 가뭄, 산불 등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기후나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불안감과 우울증 등 정신적 질환을 뜻한다. 그런데 남의 일이 아니다. 지구촌 어디에나 있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

강릉 산불 100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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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연기 뒤덮인 강릉 2023년 4월 11일 대형 산불이 발생한 강원 강릉시 산림 일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


올해 7월 말 강릉의 경포대, 시원한 동해바다가 소나무 숲과 함께 펼쳐진 이 곳에 <연합뉴스> 기자가 찾아갔다. 그 날은 올해 4월 11일 거센 강풍을 타고 마을 전체를 불태운 강릉 산불이 일어난 지 100일 쯤 지난 시점.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정부에서 마련해 준 임시 조립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이재민들을 인터뷰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바로 '탄 냄새만 나면 불안감부터 든다'는 심리 상태였다.
 
뜨거운 열감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 한편이 저릿해 인덕션, 가스레인지 등 조리기계 사용조차 힘겹다. 최양훈(48) 비대위원장은 "이재민 임대주택 입주 전 3층·9층 중 하나를 고르라는 안내를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불이 나면 뛰어내리기 쉬운 3층을 골라야지' 싶었다"며 부지불식간 생긴 상처를 털어놨다.
(연합뉴스, 2023년 7월20일)

트라우마는 아이들에게도 있었다. 평소 아끼던 수영복이나 옷, 인형이나 장난감을 찾던 아이들은 한참 물건을 찾다가 '아, 다 탔지' 하며 혼자 읊조린다고 한다.

수해 피해, 낙과 피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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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6일 오전 5시 43분께 성동면 원봉리 인근 논산천 제방 50m(높이 11.5m)가 무너져 논산천 물이 농지로 흘러들고 있다. ⓒ 논산 소방서 제공

 
기후재해가 일상화 되는 농어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 11월 15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후재난과 여성농민' 토론회. <여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 여성 농업인이 이 날 눈시울을 붉혔다. 극심한 폭우로 수해 피해를 입은 충남 논산의 귀농인 유화영씨였다.
 
비가 들이치기 시작하니 너무 공포스럽고 너무 절박하고. 올해 53세인데 태어나서 그렇게 절박한 심정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울먹임)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그 때 악몽이 저를 괴롭힙니다. 추석 직전 비가 많이 온 적이 있었는데 트라우마처럼 겁이 나더군요. 밤 9시 넘었는데 하우스를 떠나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비가 오면 그런 마음이 생길 것 같습니다.
(여성신문, 2023년 11월15일)

사과 탄저병 피해를 입은 경남 거창의 사과농민 김태경씨도 트라우마가 있었다. 뚝뚝 썩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린다는 거다.
 
그동안 태풍이 와도 '농사는 반은 하늘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크게 동요한 적이 없었죠. 그런데 썩은 사과 던지는 소리가 비오는 소리처럼 들리니 감정이 평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성신문, 2023년 11월15일)

캘리포니아 캠프파이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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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2일(현지시간) 대형산불 '캠프파이어'가 휩쓸고 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 뷰트카운티 파라다이스 마을에서 한 부부가 폐허로 변한 자신들의 집터 위에서 서로 포옹하며 슬픔을 나누고 있다. 이날 미국 방송과 외신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 북부에서 일어난 대형산불인 캠프파이어로 인한 사망자 수가 42명으로 늘었다. ⓒ 연합뉴스


기후트라우마를 정량적인 수치로 나타낸 실험도 있었다. 지난 2018년 미국 캘리포니아를 휩쓴 캠프파이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 연구자들이 실험을 했다.

산불이 발생한 지 6~12개월 후인 2019년과 2020년에 성인 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였는데, 1그룹인 27명은 산불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2그룹인 21명은 산불로 피해를 입은 가족이나 친구를 알고 있는 간접 피해 경험자, 그리고 3그룹의 27명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즉 대조군이었다. 이렇게 세 그룹을 비교했더니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왔다.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기초질문인 '과거 경험으로 괴로움을 느낀 적 있습니까?'에 대해 약간 불편함이나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고 답변한 비율: 직접 피해자의 67%, 간접 피해자의 14%, 대조군의 0%
- 우울증과 불안 측정 점수 : 직접 노출자 불안 평균 10.1점, 우울증 8.9점, 간접 노출자 9.7점과 11.8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 3.2점과 2.6점에 불과. (간접피해자도 우울증과 불안감이 높음을 의미)
- 기억력과 선택적 주의력, 주의 산만을 걸러내는 능력, 감정 처리 능력 등을 측정하도록 설계된 뇌전도어레이(EEG) 측정결과 : 전혀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 1.0, 간접적으로 노출된 그룹 0.8점(저조), 직접 노출된 그룹은 0.6점(매우 저조)

결국 재난에 직접 노출된 사람들은 물론, 간접 노출자까지도 트라우마로 일상 생활에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임이 입증되었다. 이 논문을 보도한 <타임>지의 제프리 클루거 기자는 기사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기후 트라우마를 겪게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 Islam Alatrash, 'Two months after flood in Libya's Derna, mental anguish still takes lives', (Aljazeera, 2023년 11월15일)
- 강태현, '[르포] "아, 다 탔지…" 강릉산불 이재민 "탄내 나면 불안" 트라우마', (연합뉴스, 2023년 7월20일)
- 이수진, '"극심한 폭우·폭염에 여성농민 피해 더 커… 성인지적 대책 마련해야" (여성신문, 2023년 11월15일)
- Jeffrey Kluger, 'It May Not Be Long Before We're All Suffering from Climate Trauma', (Time, 2023년 1월18일)
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지난 2023년 12월27일 OBS 라디오 '기후만민공동회 오늘의 기후' 방송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오늘의 기후'는 지상파 라디오 최초로 기후위기 대응 내용으로만 매일 2시간 편성제작되고 있으며 FM 99.9 MHz OBS 라디오를 통해 경기, 인천 전역에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방송되고 있습니다. 유튜브 라이브(OBS 라디오 채널)와 팟캐스트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트라우마 #오늘의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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