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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육참 이성민의 실존인물 이야기

[영화와 책]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등록 2023.12.19 12:07수정 2023.12.1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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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지난 16일 관객수 800만을 돌파하면서, 마침내 1000만 고지를 바라보게 됐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12.12 쿠데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뜨겁다. 그 시절을 다룬 책과 논문을 찾아보고,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들을 참배하기 위해 현충원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장태완, 김오랑, 정선엽 등 반란군에 맞선 '영웅'들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반란군의 목표였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영화에서는 짧게 등장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존재가 있다. 12.12 당시 반란군의 목표였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다. 그는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또한 당시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다.

정승화 대장은 영화에서 정상호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데, 배우 이성민이 연기했다. 10.26 사태 이후 전두광(황정민 분)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태신(정우성 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다 반란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하루 아침에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당한 불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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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모티브로 한 정상호를 연기한 배우 이성민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정승화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다. 그는 대통령 시해 사건의 공범으로 몰려 하루 아침에 육군 최고지휘관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2002년 출간된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는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밤,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합수본부 총무국장 허삼수 대령,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 등이 지휘하는 반란군에 의해 납치당한 정승화 대장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된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에필로그에서 시퍼렇게 피멍이 든 얼굴로 등장하여 그가 반란군 세력에 의해 심한 고문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2005년에 방영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고문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극적인 묘사를 위해 각색이나 과장이 더해진 것이길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과장이 보태지지 않은 실화다. 정승화 대장의 증언이다.
 
"끌려가자마자 10월 26일에 있었던 일을 적으라고 했다. 적었지만 원하는 대로 성립되지 않아 고문까지 가했다. 나를 끌고 간 곳을 언뜻 보니 고문 도구들이 있는 게 고문을 가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날 고문할 모양인데 육군참모총장으로 고문을 당할 수는 없다. 고문을 당하더라도 사표를 낸 뒤에 받겠다'. 그러자 이런 대꾸가 날아들었다. '이놈 새끼가 아직도 참모총장인 줄 아나? 넌 벌써 끝났어!'" - 412쪽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가했고, 정승화는 셀 수 없이 조서를 써야 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반란군 세력은 처음에는 정승화를 김재규와 협의해 대통령을 시해한 공범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정승화가 대통령 시해에 직접 관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김재규에 동조해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도록 김재규를 육군본부 벙커로 데리고 갔으며 또 계엄군을 부른 것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뢰한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벌이는 걸 도대체 어떻게 예상이나 하겠는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허삼수와 우경윤이 나를 데리러 온 게 쿠데타의 수순인 줄 알았다면 순순히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관에는 외부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가 있어 공관 밖에서 놈들의 병력이 아무리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 따돌릴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짓을 꾸미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41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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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군인 정승화는 6.25 전쟁 당시 육군 대위로 참전하여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싸운 참전용사였다. 1950년 10월 국군의 북진 당시 그가 이끄는 부대는 두만강과 멀지 않은 함경북도 부령까지 진출했다.

전투 중 중공군 포로로 붙잡혔지만 기지를 발휘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일도 있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반란세력은 6.25 전쟁영웅 출신인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지휘관을 불법적으로 끌어내리고 온갖 모욕을 가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정승화 대장을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윤용현은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든 정승화 대장의 묘역을 찾아 참배하며 사죄했다고 한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배우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이 사건은 인간 정승화, 군인 정승화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안긴 사건이었다.

이후 정승화 대장은 군사재판에서 내란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이등병으로 불명예 전역했다. 무려 17계급 강등이었다. 1980년 6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고 1981년 사면·복권되었으나 군적은 회복하지 못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 당시 내란방조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그는 비로소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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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을 찬 채 헌병들에 의해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정승화 대장 (1980년 1월 19일자 <경향신문> 보도) ⓒ 경향신문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고초는 혹독했다. 5공화국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감시가 이어졌다. 아버지를 따라 육군 장교가 된 아들은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남동생은 끌려가 고문을 받고 나온 뒤 술로 세월을 보내다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장사를 하던 여동생은 상황이 어려워져 미국으로 이민갔다. 혹 자신들에게도 불이익이 있을까 두려워 가까운 지인 및 그와 알고 지냈던 군 인사들은 그를 보고 아는 체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는 보안사 인원들이 차를 주차시켜놓고 밀착 감시했다. 어떤 무례한 이는 정승화 대장이 탑승한 차량을 따라오다가 추월하여 앞을 가로막는 등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단다. 12.12 쿠데타를 막지 못한 죄로 그는 인간으로서, 군인으로서 온갖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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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 김경준

 
그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1997년 김영삼 정부가 반란수괴였던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사면 조치를 취했을 때 정승화 대장은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냐"라면서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끝내 전두환이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2002년 6월 별세했다. 육군 대장으로 복권된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12.12 쿠데타의 주역들 중 일부가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묘지에 반란군을 안장했다는 사실도 황당한 일이지만, 더 기가 막힌 일은 따로 있다. 쿠데타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가담했던 유학성이 바로 정승화 대장과 같은 묘역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자기를 끌어내리고 명예를 짓밟았던 반란군과 나란히 누워 있는 정승화 대장은 어떤 심정일까.

2021년 10월 반란수괴 중 한 명이었던 노태우가 사망했을 때 문재인 정부는 무려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며 정승화 대장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영화 <서울의 봄>을 계기로 나라를 위해 싸운 참군인들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하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 대신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말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정승화 대장도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참군인'이란 무엇일까

그는 자서전의 말미에서 이렇게 사죄한다.
 
"이 자리를 빌려 불순 군인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점에 대해 엎드려 간절히 빌며 용서를 구한다." - 430쪽

정작 죄를 빌어야 할 이들은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오히려 12.12 쿠데타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가 군사반란을 막지 못한 죄가 크다며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순이라니. 정승화 대장의 사죄에서 우리는 '참군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정승화 대장의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는 종이책은 절판됐으나 다행히도 전자책 서비스가 이뤄지는 것으로 확인된다. 영화를 계기로 군인 정승화, 인간 정승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정승화·이경식 저, 휴먼앤북스, 2002.
#서울의봄 #정승화 #장태완 #전두환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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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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