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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그날, 잊혀진 한국인 피해자들의 이야기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3.12.08 17:50최종업데이트23.12.0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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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저항을 계속하던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 본토의 주요도시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대량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이다. 이는 지금까지 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핵무기의 실전 투입 사례로 남아있다.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무모한 전쟁으로 일으켜 전 세계에 불행을 초래한 전범국가 일본에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고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는 것과 핵무기의 가공할 위험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역사적 논쟁 거리를 초래했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그날의 히로시마에는, 안타깝게 전쟁의 비극에 휩쓸려야 했던 죄없는 많은 한국인들도 있었다.
 
1970년생으로 부산에서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김형률씨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남들보다 왜소한 체구에, 건강이 좋지 못해 가족들의 아픈 손가락으로 자라났다. 형률씨는 기관지와 폐가 좋지않아 수없이 폐렴에 걸렸고,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하거나 호흡곤란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간 것만 수십 번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형률씨의 정확한 병명조차 파악하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형률씨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지만 두 살도 채 안 돼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인 김봉대씨와 이곡지씨는 형률씨의 증상이 사망한 동생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껴야했다.
 
형률씨가 25살의 성인이 된 1995년에야 정확한 병명이 밝혀졌다. '면역글로불린 결핍증'. 면역력이 약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관지, 폐 쪽이 가장 먼저 탈이 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 치료법이 딱히 없었고 합병증도 많이 생겨서 생존율이 낮다는 판정을 받았다. 담당 의사는 형률씨가 30세를 넘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답답했던 형률씨는 자신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하여 도서관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던 어느날, 형률씨는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가 발표한 논문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형률씨는 논문에서 찾아낸 내용을 어머니에게 보여줬고, 그때부터 이곡지씨는 "나 때문에 우리 애가 이렇게 아팠다"며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모자의 가혹한 운명을 둘러싼 진실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세였던 이곡지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본래 경남 합천에서 살던 곡지씨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게 됐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곡지씨 가족처럼 생계 등의 이유로 인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국을 떠나야했던 한국인들이 약 8만 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다. 훗날 일본 프로야구계의 전설이 되는 장훈의 가족,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이우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전쟁 기간에 동원된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 군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히로시마에 강제로 건너와야했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2등 국민이자 하층민 대우를 받았다.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며 '조센징 쿠사이나(조선인은 더럽다)'고 놀리는 모멸적인 대우와 차별을 받아가면서도 하루하루를 견뎌내야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천재과학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단체로 편지를 보내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먼저 신무기 개발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이름하여 '맨해튼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 책임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었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바로 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미국은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두 개의 실전용 핵폭탄을 완성하게 됐다. 그런데 독일을 염두에 두고 개발했던 이 폭탄이 사용된 것은 엉뚱하게도 일본이었다.
 
폭탄이 완성될 때쯤 독일과 이탈리아가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여 항복했고 히틀러는 자살했다. 독일은 핵무기가 없었고, 애초에 만들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와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들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원자폭탄을 써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 상황에 놓이자,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유일하게 아직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던 일본이었다.
 
미국은 오랜 전쟁으로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데다 일본의 거센 저항으로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이 최후통첩으로 전한 항복제안을 일본이 끝내 거부하자, 미국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고 전쟁을 확실하게 끝내기 위하여, 결국 비밀리에 연구해온 핵무기를 처음 실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그해 8월 6일, 미국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일본 본토에 투하할 것을 결정했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 최대의 대도시인 도쿄나 교토가 아닌 히로시마를 선택했다.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진정한 성능을 알아보려면 멀쩡한 도시에 투하해야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진지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히로시마는 일본 주요 도시 중에서는 비교적 공습을 덜 받았고 인구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다가 군수산업의 중심지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맡은 인물은 미군 조종사 폴 티비츠 대령와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등 세 곳으로 압축되었는데 최종선택은 당일날에 조종사들의 판단에 의하여 즉흥적으로 결정됐다.
 
운명을 가른 변수는 당일의 '날씨'였다. 조종사들은 당초 기상이 좋았던 나카사키 쪽으로 향하는 듯 하다가 마침 히로시마의 구름이 걷히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덜리 소령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자고 제안했고 티비츠 대령은 이를 수락했다. 목적지가 히로시마로 최종결정이 내려진 것은 원폭이 투하되기 불과 1시간 전이었다.
 
8시 15분 15초. 인류 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가 마침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지구가 쪼개지는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눈이 멀 정도의 밝은 섬광이 온 세상을 덮었다.
 
이곡지씨 가족은 당시 집에서 원폭투하의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원폭을 시청에 던진 것 같은데, 우리 집과 거리가 좀 있었지만, 폭풍 바람에 이층이 가라앉았다. 엄마 옆에 나도 3살 동생도 있었다. 9살 먹은 언니가 폭풍잔해에 휩쓸려서 구해달라고 호소하는데 엄마가 끝내 못꺼내줬다"고 회상했다. 이곡지 씨는 이 당시 아버지와 언니를 잃었다.
 
당시 13세였던 또다른 히로시마 생존자 강춘자씨는 "빛이 반짝해서 놀랐다. 연기가 나면 구름만 위로 확 치솟아 올라서 옆도 못 봤다"고 충격적인 순간을 떠올렸다. 6살이던 장훈씨는 "그렇게 예쁘던 우리 누나 얼굴이 다 불에 타고, 하루 정도 밖에 못살았다. 약도 없고 의사도 없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울면서 자기 딸이 죽는 걸 마음 아프게 바라봐야했다"고 회상하며 착잡해했다.
 
히로시마는 원폭 투하후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 폭심지 반경 4.4km 안의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버렸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섬광과 폭풍, 그리고 불과 파멸'로 요약된다. 증언에 따르면 폭발 직후 엄청난 섬광이 일어났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니까 마치 엑스레이를 찍는 것처럼 손 뼈마디가 훤하게 보였다고 한다.
 
또한 섬광 다음에는 초강력 열 폭풍이 일어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엄청난 압력의 태풍이 쾅하고 퍼지기 시작했다. 그 압력은, 1제곱미터당 7톤의 힘이 가해지는 위력으로, 1.2km 밖에 서있던 사람도 공중으로 15m 거리까지 날아갔을 정도였다.
 
폭심지 중심부 반경 5백미터에 있던 사람들은 태양의 표면 온도와 같은 섭씨 6천도의 고온에 휩쓸리며 모두 소멸했다. 폭심지에서 최소 2~3km 떨어진 곳에 있었거나, 콘크리트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만 그나마 살아 남았다. 1945년도 당시는 콘크리트 건물이 별로 없었고 일본은 목조 건물이 많은 곳이라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다.
 
또한 피해는 원폭 투하 순간의 충격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잔해와 재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차가운 공기층과 만나 비가 돼서 내리기시작했다. 이 '검은 비' 안에는 무서운 방사능 물질들이 응축되어 있었다 방사능에 잘못 노출된 사람들은 세포가 파괴되고 염색체에 이상이 생겼다.
 
원폭 직후에 살아남은 다수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방사능에 피폭된 상태였다. 그들은 원인모를 설사와 구토를 하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을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고, 임시진료소가 마련됐지만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차별받던 조선인들은 진료소에 갔다가도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결국 폭발 이후 3일에서 일주일 만에 또다시 엄청난 사망자들이 나왔다.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한국인 사망자만 3만5천여 명에 달했다.
 
폭격 이후 미국은 폭격의 결과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기록하기 위한 영상을 비밀리에 촬영했다. 참혹한 모습이 그대로 담긴 영상들은 수십 년 동안 감춰져 있다가 1980년대에 가서야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방사능 피해자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방사능 노출에 따른 피해에 대해 은밀히 연구를 진행하며 피폭 피해자들을 단지 실험체 정도로 생각한 것이 드러났다.
 
미국은 히로시마 폭격 3일 후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고, 그제야 일본은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나서서 패망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마지막 순간까지 '항복'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에 저질러 온 만행에 대해서도 어떤 사과나 반성도 없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이곡지씨를 비롯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생존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 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곡지씨의 모친은 방사능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홀몸으로 곡지 자매를 보살피다가 귀국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곡지씨도 젊은 시절 원인 모를 피부병과 종양에 시달리며 고초를 겪었지만, 본인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란 사실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곡지씨의 아들 김형률씨가 발견한 논문은 '모친이 6세 때 일본에서 원폭에 노출되었고, 일란성 쌍생아인 동생이 생후 6개월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의사는 김형률씨의 병을 보고하며 어머니의 피폭 사실을 언급했던 것.

면역글로불린 결핍증과 피폭의 인과관계는 의학적으로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형률씨의 병이 모친의 피폭으로 인한 유전적가능성을 언급했던 것. 엄마 곡지씨는 아들이 아픈 게 자기 때문인 거 같아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2002년 3월, 34살이된 김형률씨는 용기를 내어 언론을 통하여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라는 사실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김형률씨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전국을 돌며 자신과 같은 원폭 피해자 2-3세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원폭 피해자들 중에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낳은 사례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원폭 피해자들이 멸시를 받아야할 대상이 아닌, 무고하고 억울한 희생자들이며 특히 소외받던 한국인들이 적지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형률씨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많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현실이 재조명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형률씨는 2005년 5월 29일,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끝내 35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김봉대씨와 이곡지씨는 쌍둥이 아들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했다. 이곡지씨는 현재 치매에 걸려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지만, 제작진은 차라리 아픈 기억을 지워서 자녀들에 대한 그녀의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기를 기원했다.
 
일본 정부에서는 1957년부터 원자폭탄 피폭자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의료보험증인 '건강수첩'을 발간했다. 하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외면받아오다가 60년이 지난 2008년부터야 발급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노력이 아닌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개인적으로 소송을 걸어 따낸 것이고, 그나마자 김형률씨 같은 2, 3세대는 제외된 1세대들에게만 적용됐다.
 
역사를 잊은 사회에 미래는 없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역사는 알아도, 그 이후 원폭 피해자들에 겪어야 했던 끝없는 고통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 전 세계는 1만2천여 정 이상의 핵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핵 위협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핵무기의 사용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경각심을 느끼고, 그만큼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겨야할 이유다.
꼬꼬무 히로시마원폭투하 한국인원폭피해자 맨해튼프로젝트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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