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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상] 꽹과리는 운다

제6회 <오마이뉴스> 평화통일염원 글짓기 수상작, 홍성준(수원 화홍고 3, 산문)

등록 2023.12.04 09:51수정 2023.12.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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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는 운다

지난밤 단양팔경 석회암 지대에서 쑥쑥 자라던 측백나무가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바람을 뒤로하고 아버지가 캐낸 측백 나무는 푸른 비늘로 포개진 입속에서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어나고 있었다. 측백나무는 예로부터 신선이 되는 나무로 귀하게 대접받아 왔다고 한다. 시골 마을에 가면 야트막한 담 대신 울타리를 치고 있던 바로 그 나무였다.


"좋은 묘자리는 벌레가 생기지만 나쁜 자리는 염라충이 생겨 할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 나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좋은 묘자리에 생긴다는 벌레는 무엇이고 또 나쁜 묘자리에 생기는 염라충은 과연 무엇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결국 모두 똑같은 벌레인데 왜 아버지께서는 차별을 두시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요즘 부쩍 흉몽을 꾸신다고 했다. 꿈속에서 할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신다고 하셨다. 수심에 잠긴 얼굴로 아버지의 꿈속에 나타나 무엇인가 할말을 잃은 듯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그늘이 베여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어쩌면 할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아버지의 고향은 석회암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함경북도 회령이었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도 전인 1940년에 태어난 할아버지는 6.25 가 터지자 아버지가 메던 지게를 타고 피난길에 오르셔야 했다. 하지만 피난길에 할아버지는 폭격으로 인하여 어머니를 잃게 되었다. 아직 철도 들지못한 꼬맹이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은 너무나 참혹했다. 할아버지는 가끔씩 전쟁영화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면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나시는지 말수도 적어지시고 무척이나 상심해 술을 드시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중학생 시절 아버지로부터 피난길에 폭격으로 엄마를 여윈 할아버지의 어린시절을 듣고부터였다. 어떻게 그후로 할아버지는 사셨을까 그 고통의 깊이가 나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또 다른 아픔은 세 살 터울이 나던 형과의 이별이었다. 어린아이였던 할아버지는 그래도 지게라도 탔지만 형은 발가락이 갈라지고 터지도록 길을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지만 자신보다 나이라고 해봐야 고작 두 세 살 터울이었던 형도 어린아이였을 텐데 그 먼 피난길을 혼자서 아버지의 지게를 독차지하고 내려온 것이 지금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되는 일이라고 항상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형제의 비극은 아직 시작도 되지 못했다. 형은 고아원에 맡겨진 채 가족들로부터 이별아닌 이별을 해야 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입 한번 덜어보고자 했던 증조 할아버지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고 하기에는 세월의 질곡이 너무나 가파랐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잡아다주시는 개구리, 메뚜기, 심지어는 곤충의 번데기까지 먹고 구워 먹었다고 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기라 그 마저도 일찍 눈에 띄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조금 커서는 연탄공장에서 일하게 됐지만 그만 사고로 왼쪽 손가락 2개를 잃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당신의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품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꽹과리였다. 어린 시절 신기한 고철 덩어리인줄 알고 장롱 깊숙이 놓여진 꽹과리를 실컷 두들기다가 아버지로부터 크게 볼기짝을 맞고 혼이 난적이 있었다. 훌쩍훌쩍 서러워 눈물을 들이키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그것이 할아버지의 아버지였던 증조부께서 남긴 유품이라고 하셨다. 유품이라는 말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냥 아주 귀한 물건인지만 알았다. 할아버지로부터 꽹과리에 대한 사연을 듣고부터 나는 꽹과리를 두들겨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달랬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동네는 정초면 밤마다 사자놀음을 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의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하여 사자 몸의 오색실을 아이에게 달아주기도 했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도청 마당에서 크게 마당 놀음을 벌였다고 한다. 이 꽹과리가 바로 할아버지가 추임새를 넣고 동네 사람들과 한바탕 사자 놀음을 할 때 울렸던 꽹과리였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고 잡귀를 쫓아내고 마을의 평안를 비는 행사로 동네마다 사자를 꾸리고 놀았다고 한다. 증조부께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장농 깊숙이 꽹과리를 숨겨 놓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금 꽹가리를 고향땅에 가서 신명나게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형을 찾고자 1983년도에 전국적인 이산가족 상봉 열풍이 불었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신청하고 TV에도 나왔던 할아버지의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무려 10만 건이 넘는 이산가족들이 가족찾기를 원했지만 그중에 약 1만 건 정도만 가족을 찾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찾지 못한 9만여 명의 인파들 속에서 흐느끼셔야 했다. 방송이 끝나고도 항상 방송국의 계단에 앉아 형을 기다리던 한 중년 남자는 당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만 눈을 감고 만 것이다. 전쟁으로 행방불명이 된 가족들을 애타게 찾는 그 목소리들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오히려 과거에 비해 통일에 대한 열망이나 동포들을 만나서 얼싸안는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요즘 들어 부쩍 줄어든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해본다.

평생을 형을 기다리며 형의 안부와 소식만이라도 헤매고 애타게 찾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면 이대로 통일을 생각하는 마음을 잊은 채 시간이 마냥 흐르게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무슨 죄를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통일은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이루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수천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꽹가리를 울리고 징을 치고 북과 장구를 치며 신명나는 사자놀이를 함께 즐기고 춤을 추던 한민족이었으니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잠시 집 마당에 둥지를 튼 측백나무의 잎들이 보름달을 깊이 빨아들이며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르르 한 번씩 측백나무가 울먹이며 몸을 떨 때마다 달은 한 웅큼씩 줄어들고만 있었다. 점점 야위어만 가는 보름달이 이제 초승달로 남았을 때 저 달마저 없어지면 어떡하지 파도처럼 부스럭거리며 밀려오는 소갈증에 나는 점점 목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삽자루에 실려 온 측백나무는 이제 내일부터는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뿌리를 내리며 자랄 것이다. 비록 고향 땅의 흙은 아니지만 고향 땅의 흙을 닮은 이 나무의 뿌리줄기가 어서 빨리 할아버지의 무덤에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오래전 꼬맹이였던 내가 고사리 손으로 두들기던 꽹과리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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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오마이뉴스> 통일염원 글짓기 공모에서 대상인 통일상을 수상한 홍성준 학생. ⓒ 홍성준

 
수상소감

작년에 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분을 한두 달 사이로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습니다. 피난길의 폭격으로 생모를 잃게 된 어린 소년이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전쟁의 비극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분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청소년 세대는 전쟁의 비극을 이제 역사책으로 소설책으로 영화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청소년 세대는 그 시절의 아픔을 제대로 인식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인간 각자에게는 자신이 경험한 가치와 선택으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 세대는 전쟁의 참상을 격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세대보다 자유롭게 생각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분단을 좀 더 객관화시켜 바라보고 전쟁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전쟁의 고통과 상처로 평생을 사신 할아버지의 삶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청소년 세대는 아름다운 통일을 이루기 위한 세대의 역할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저도 묵묵히 이제 제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연필로 꾹꾹 시를 처음 쓰던 중학교 시절 이 대회를 통해 시를 쓰게 되었고 그때도 수상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시가 아닌 산문으로 또 한번 저에게 큰 격려를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 역시 오마이뉴스 통일 공모전을 통하여 통일에 대한 가치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통일 #통일상 #홍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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