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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존경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기록 보유"

[인터뷰] 탤런트 김성환에게 듣는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예술 정책

23.11.03 14:30최종업데이트23.11.0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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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024년 1월 6일은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에 관련 서적 출간, 다큐영화, 연극, 서사 음악회 등 전국 규모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을 운영해 오는 필자는 김대중 생애사진전(6월~8월)을 열었다. 탤런트 김성환 인터뷰를 통해 김대중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과 한류를 조명해 보았다. [편집자말]

팬들의 싸인 요구에 응하는 김성환(2008년 5월 KBS홀) ⓒ 조종안


 
정감 넘치는 팔도 사투리와 다채로운 묘기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탤런트 김성환씨는 연기면 연기, 토크면 토크, 노래면 노래, 개인기면 개인기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알려져 있다. 
 
김성환씨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초·중·고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상경하여 대학입시 준비하던 어느 날 친구 따라 방송국에 갔다가 TBC 10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다. 어렵고 힘든 시기 데뷔한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다재다능한 연예인으로 성장한다.

"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1970년대 초)는 전라도가 괄시를 많이 받던 시절이었지. 서울에서 하숙방 구하기도 어려웠으니까. 그때 유일하게 군산상고 야구가 갈증을 해소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지, 군산상고 시합이 있다고 하면 동대문운동장으로 달려가 응원하면서 가슴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그랬거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그렇게 달랬던 것이지."
 
그랬다. 당시는 사투리조차 맘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군산은 산업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불꺼진 항구', '시간이 멈춘 도시' 등의 오명을 들어야 했다. '폐항(閉港) 위기설'이 나돌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응원 구호로 '우리의 소원은 군산 신외항 개발!'을 외쳤을까. 시민들은 총알 같은 안타 하나에 환호했고, 희열을 느꼈으며, 슬퍼하고 분노했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지지선언
 
국민의 열화 같은 개헌 요구에 따라 제13대 대통령 선거(1987년 12월)는 직선제로 치러진다. 당시 대선은 권위주의 정권이 민중항쟁에 굴복해 여야가 합의한 규칙에 따라 시행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정행위가 포착되는 등 집권당의 횡포는 1970년대 유신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시절은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 특히 연예인들은 더 그랬지. 김대중 선생도 마음으로만 응원했지 앞으로 나설 수 없었던 것이지. 그러다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는 꼭 그 양반(김대중 후보)이 당선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열성 팬이었던 선배들과 함께 지지를 선언했지."
 

1997년 제15대 대선 유세장 풍경(김대중 후보 어깨너머로 김성환 모습 보인다) ⓒ 김대중평화센터

 
제15대(1997) 대선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등 13대 대선과 양상이 달라진다. 아래는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 코미디언 등이 문화예술인 지원단을 편성해 김대중 후보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는 1997년 12월 9일 치 <한겨레신문> 기사 내용이다.
 
"탤런트 박근형, 백일섭, 민욱, 김수미, 노영국, 김성환, 김길호, 김정훈 씨, 코미디언 이봉원, 엄용수 씨, 영화배우 독고영재, 오정해 씨 등은 8일 오후 국민회의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들은 문화예술인 지원단을 편성해 김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울 방침이라고 밝혔다."-(제목: <백일섭·오정해 등 '김대중 지지'>)
 

한류는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됐다고 말하는 김성환 ⓒ 조종안

 
"박근형 선배, 백일섭 선배 그리고 MBC 탤런트 실장(1988)을 지낸 박상조 선배 등과 함께 유세 현장으로 뛰어들었지. 선배님 모두 열성 팬이었거든. 지금도 기억하는데 김대중 후보 유세차가 여의도로 온다고 연락이 오면 현장으로 달려가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고, 동대문으로 이동하면 미리 현장으로 달려가 관중을 상대로 '김대중 필승!'을 연호했지.
 
그해(1997)는 내가 연속극에 많이 출연했을 때였지. 단역이나 조연만 하다가 주인공 맡으면서 널리 알려지던 시기였거든. 특히 KBS 1TV 드라마 <정 때문에>(1997년 3월~1998년 3월)는 중장년층이 좋아했는데 거기에서 내가 '김거식'으로 나왔어. '클 거(巨)'에 '심을 식(植)'을 썼는데, 지금도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나를 '거시기'라고 부른다고."

 
김성환씨는 연예인들은 선거운동 하기가 어렵다고 부연한다. 이사람 저사람, 이모임 저모임으로 연이 닿아 결국 친한 사이에 지지하는 후보가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도 서울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고향 동네에서 선거 유세가 시작되면 볼일 있어도 내려오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특정 후보를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오해받기 때문이란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초청받았으나 촬영스케줄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취임하던 해(1988) 청와대에서 열린 연예인 초청 만찬에 초대되어 송대관 등과 함께 자리를 함께한다. 그는 대통령 앞에서 처음으로 '거시기(거시기 면장 주례사)' 유래와 '손장단' 묘기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예술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2003년 제11회 춘사영화제 공로상 받은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김대중정부 시절 방영된 <겨울연가>(2002년 1월 14일~3월 19일)는 '욘사마(배용준) 열풍'을 불러온다. 

"한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 퇴임 후 TV 방송에 출연, '우리나라 예술은 간섭하면 망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화개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김 전 대통령 모습을 뵌 적이 있거든. 한국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흡수되지 않았다는 거야. 주변국들은 중국화 됐지만 한국은 독창적인 문화로 재창조해 낸 저력을 믿었던 것이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예술인들이 존경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재임 시절 문화 정책에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관련예산 비율을 1%로 늘리고, 퇴임 후 춘사영화제 기념사업회로부터 공로상 받은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니까. 그 기록 하나만으로 그분이 문화예술 분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가능하지."

 
김성환씨는 "국민의 정부 때 일본에서 '욘사마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방탄소년단이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는 현실 등이 우연은 아닐 것"이라며 "관계 장관과 비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김대중 대통령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김성환은 누구?
친구 따라 방송국에 갔다가 엉겁결에 연예인이 된 김성환. 그는 신인시절 수입 대부분을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쓴다. 그가 고향동네에서 효자로 알려진 이유다.
성실 근면했던 그는 2002년 우수 납세자로 선정,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탤런트협회 회장을 두 차례(2004~2010) 역임했고, 2007년 연예인 최초로 화관문화훈장을 받는다. 2010년 제19회 대한민국 무궁화대상(대중문화 부문), 2012년 제21회 소총·사선문화상(특별공로부문) 수상한다. 환갑 나이에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주변을 놀라게 했으며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2006~2010)을 맡아 연기자들의 기본권리와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대중 자서전>(2010),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김대중 리더십>(최경환 지음) 옛날신문 및 방송뉴스
김대중대통령 김성환 한류 문화예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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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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