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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우고 가난해서 소외된 사람들이 내 영화의 원동력"

[인터뷰] 영화 <소년들> 정지영 감독

23.10.27 17:52최종업데이트23.10.2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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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년들>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 ⓒ CJ ENM


 
대질신문 자리에서 진범과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이 함께 울었다. 검찰은 이를 묵살하고 잘못된 수사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렇게 여섯 청년의 인생이 공권력 때문에 망가지고 피폐해졌다.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 나아가 사법 정의의 민낯을 고발한 영화 <소년들>은 바로 그 청년들 삶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 인근에서 정지영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관피아와 모피아의 협잡을 다룬 <블랙머니>에 이어 <소년들> 또한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을 직시한 사회고발성 작품으로 우선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영화는 1999년 발생한 전북 구례 나라슈퍼 살인 사건, 2000년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두 사건 모두 초동수사 미흡과 안일한 조사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시민을 양산했고, 결국 재심으로 그 억울함이 증명된 사례다.
 
마음을 움직이다
 
이미 같은 소재를 잡은 영화 <재심>이 2017년 개봉한 바 있다. 사건을 놓고 보면 <재심>은 약촌 오거리 사건을, <소년들>은 나라슈퍼 사건을 중심으로 했지만 정지영 감독은 약촌 오거리 사건에서 활약한 실제 형사를 이번 영화의 중심 인물로 끌어들였다.
 
"본래 약촌 오거리 사건을 영화화하고 싶었는데 이미 <재심>이라는 영화가 준비되던 터였다. 제가 볼 때 나라슈퍼 사건의 이야기가 깊고 넓다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영화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훨씬 복잡해질 것 같았다. 원래 사건은 한 교화위원이 소년들의 억울함을 느끼고, 지인 변호사에게 연락했다가 재심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박준영 변호사에게까지 인연이 닿으며 전개됐는데 관객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호흡으로 따라갈 인물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약촌 오거리 때 활약한 형사를 빌어오게 된 것이다."
 
이야기 흐름상 끈질기게 사건을 파고든 형사가 주축이 됐지만 정지영 감독은 영화 제목을 강조했다. 억울한 옥살이로 청춘의 절반을 흘려버린 세 사람이 애초에 감독이 영화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정지영 감독은 "못 배우고 가난하다고 해서 권력에 희생되고,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며 "실제 대질신문 자리에서 가짜 범인과 진범이 함께 울었다는 대목이 내 마음에 다가왔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무섭고 억울해서, 다른 사람은 미안하면서도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연출할 때 그 소년들 마음에 들어가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선 감정에 몰입한 배우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테니까. 지금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각자도생의 시대다. 이런 사건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못나고 못배워서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 반응이 맞냐 아니냐 이전에 이 문제를 반드시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잘못 수사한 걸 바로잡았어야 한다. 근데 경찰 조직과 검찰 조직을 위한다는 이유로 잘못을 합리화했다. 그게 과연 명분이 될까? 아무 죄 없는 사람이 공권력 조직 때문에 망가져야 하는 건가? 슬픈 건 정말로 그들은 그게 옳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불의지만 말이다. 이것은 영화를 통해서든 힘을 나쁘게 사용하는 공권력이 있다면 끊임없이 비판하고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배우들도 이런 감독의 의중에 화답했다. 황 반장으로 분한 설경구는 17년 전과 현재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단식하며 체중을 급히 줄였다. 감독의 전작 <블랙머니>에서 정의로운 형사였던 조진웅은 뼛속 깊이 조직에 충성하는 검사 역으로 등장해 무게감을 더했다. 기존의 정겹고 다정한 역할로 잘 알려진 유준상도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무엇보다 소년들을 연기한 김동영, 유수빈, 김경호를 비롯해 진범 역의 배유람, 서인국 등도 감정을 쏟아 부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설경구 배우를 염두에 두긴 했다. 한창일 때와 은퇴를 앞둔 형사의 얼굴을 누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설경구 배우가 떠오르더라. 동료 형사 역인 허성태는 설경구의 선택이었다. 사실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쓰고 싶었는데 설 배우가 허성태 배우가 어떨지 말하더라. 일종의 파트너를 뽑는 건데 존중해야지. 지금 이 시대에 공부 잘하고 머리는 좋은데 나쁜 사람인 경우가 꽤 있다. 유준상의 캐릭터는 그걸 대표했으면 싶었다. 일종의 출세주의자인 셈이다. 그러니까 범인을 잡은 뒤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진범이 나타났을 때도 그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 <소년들>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 ⓒ CJ ENM


 
"픽션은 곧 사회를 반영하는 것"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사회현실반영, 역사적 비극 소재의 영화에 천착해 온 그다.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지영 감독은 또래 감독 중 거의 유일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스크린쿼터 운동 등 한국영화산업 주요 문제에도 앞장서 목소리를 내 온 그는 영화계에서 몇 안 되는 행동파 영화인으로 꼽힌다.
 
"관심사 자체가 인간과 사회의 관계성에 있다. 올해 40주년이라고 행사도 해주셔서 돌아보게 됐는데 영화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해봤다. 원래 전 허무주의자다. 근데 영화에서 일종의 비전을 찾은 것 같다. <부러진 화살>에서 안성기씨가 연기한 캐릭터는 재판에선 지지만 그 캐릭터로는 승리한 것이잖나. 이번 영화도 억울하게 당한 얘기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다. <블랙머니>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영화로 허무주의를 극복해왔다.
 
우리가 소설이든 영화든 픽션을 만든다는 건 곧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소설보다 사실 그 자체에서 절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제 영화를 소개할 때 상업영화라는 단어보다 대중영화라는 단어를 쓴다. 상업영화라 하기엔 좀 억울하다. 소위 상업영화는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건데 내 작품은 한 번도 투자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거든. 근데 나름 흥행은 했다. 그럼에도 항상 다음 작품 투자가 안 되더라. 그들이 볼 때 상업적이지 않은 거지. 단순히 돈을 번다기보단 내 영화가 많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게끔 노력한다. 그렇기에 예술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흥행에 실패하지도 않는 작품을 한다는 차원에서 대중영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뼈 있는 이 말엔 최근까지도 침체 일로인 국내 극장 산업,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일침일 수도 있다. 소위 하이 콘셉트, 즉 다수 스타 배우 캐스팅에 스타 감독, 대자본이 결합한 영화들이 속속 실패한 건 결국 다양성이 사라지고 트렌드만 남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관객들이 액션물을 좋아하는 건 맞다. 그렇지만 액션 영화만 만들어내면 싫증이 나지. 몰려갈 게 아니라 감독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걸 찍어야 한다. 투자자들도 다양성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특정 트렌드만 따라가다가는 위기가 온다는 걸 이미 할리우드가 경험하지 않았나. 왜 그걸 알면서도 못 버리나 모르겠다.
 
물론 코로나19 이후 극장 문화가 죽은 것도 있고, 관람료 인상으로 관객들이 버거워진 것도 있다. 그럴수록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관객을 어떻게 설득할까를 생각해야지. 저 역시 시대가 바뀌면서 바뀌는 트렌드나 감성을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걸 의식해서 제 테크닉을 바꿀 순 있는데 제가 잘하는 콘텐츠까진 바꿀 수 없다. 그게 외면받는다면 영화계를 떠날 때가 오는 거지. 요즘 관객은 판타지를 좋아한다고? 근데 어떡해 난 판타지는 못하는데(웃음)."

 
차기작으로 정지영 감독은 제주 4‧3,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을 각각 준비 중이다. 역시나 역사와 근현대사 문제다. 이를 또 어떻게 비틀고 담아낼까. 그의 영화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소년들 정지영 설경구 허성태 유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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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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