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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아몬드, 검정고무신... "악습 멈추려면 '작가노조' 있어야"

[인터뷰] 작가노조 준비위원회 안명희 작가 "출판사 이윤만으로 책 만들어지지 않도록"

등록 2023.09.27 20:13수정 2023.09.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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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조'를 준비 중인 안명희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복건우

  
"얼마 전 등단에 성공한 한 작가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계약서를 썼는데, 부당조항을 발견했지만 신인 작가인 탓에 거절하지 못하고 사인을 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몇 달 뒤 책을 냈지만 출판사가 알려준 것보다 훨씬 많은 책이 팔렸음에도 그만큼 인세를 받지 못했다. 책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도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출판사는 그게 작가의 권리가 아니라고 했다."

실존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다. 20년차 편집자이자 세 권의 공저를 쓴 작가 안명희(49)씨가 그려낸 인물로, '집필 노동자'의 현주소를 표현한 이야기다. 출판사의 요구대로 작성하는 불공정 계약서, 노동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인세,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지 못하는 원고료와 강연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모두 작가들의 열악한 노동과 생계를 나타내는 지표다.

안씨는 최근 작가를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며 이들을 '집필 노동자'로 호명했다. 그는 지난 3월 작가 세 명과 함께 작가노동조합(작가노조)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필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현재 20여 명의 작가가 준비위원회에 모여 작가노조 창립을 준비하고 있다.

분야와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들이 직접 노조를 만들기로 한 건 출판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안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실을 찾았다. 

"좁은 출판계 바닥, 부당함 요구했다간 소문 파다"

지난 3월, 만화 '검정고무신' 그림을 그린 이우영 작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년 넘게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저작권 분쟁을 벌이던 도중이었다. 그 사건은 안씨가 작가의 권리와 출판산업의 전환을 고민하는 시작점이 됐다.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도 그랬고,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도 그랬어요. 저작권이라는 노동의 결과물이 작가에게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는 거죠. 이우영 작가가 목숨을 잃을 때까지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그때부터 출판사의 힘을 제어하고 출판 생태계를 본질적으로 바꿔나가기 위한 작가노조의 필요성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2002년 출판계에 들어온 안씨는 재직과 외주를 넘나들며 마지막 출판사 '인물과사상사'를 나와 프리랜서 외주 편집자로 일했다. 처음엔 편집자, 디자이너 등 출판노동자의 권리에 관심을 갖고 '출판노동자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책을 만들면서 여러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젠 출판 노동을 이야기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했어요"라고 떠올렸다. 2009년 만들어진 출판노동자협의회는 현재 그가 지부장으로 활동하는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의 전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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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희 작가가 대표로 있던 문화예술노동연대가 지난 2021년 3월 9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동자성 인정'과 '노조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2021년 문화예술노동자 요구안'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글쓰기는 낭만적 선택이라기보단 여느 직업처럼 절박한 노동이다. 작가는 배우처럼 선택을 받는 직업이다. 넓게는 독자, 좁게는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야 글로써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작가들은 출판사로부터 불리한 계약 조건을 더러 강요받지만, 항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계약서에 원고료 지급일이 적혀 있지 않아도 수정을 요구하기가 어려워요. 그 출판사가 다음에 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고, 좁은 바닥이라 소문이 파다하게 나거든요. 작가로서 노동을 이야기한다는 건 감내해야 할 일이 하나 새로 생기는 거예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죠."

집필 노동 시장은 계속해서 작가들을 옥죄고 있다. 10%로 사실상 고정된 인세, 수십 년째 동결된 원고료와 강연료, 그 모든 것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출판사가 보수를 지급하는 기준도, 저작권과 추가 수익을 출판사에 일괄 양도한다는 '매절' 계약도 작가는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을 쓰기 위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취재하고 자료를 찾는 데 들이는 시간은 보수에서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지난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출판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2차 저작물 작성권이 저작권자인 작가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으나, 출판계 민간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출협은 문체부 표준계약서와 별도로 출판사 쪽 의견을 반영한 자체 표준계약서를 만들었다. 출협 표준계약서는 2차 저작물 우선권을 출판사에게 부여하고, 출판권 계약 기간을 기존 통용되던 5년에서 10년으로 되레 늘렸다. 

"문학계 불공정이 지금도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이 관행이라는 건 결국 힘 있는 출판 사업주와 출판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작가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최소한의 시스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 책을 쓰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가려지고 있어요. 내가 선택한 직업이라는 이유로 내 권리가 빼앗겨도 되는 건 아닌데도 말이죠."

"집필 노동에도 사회적 안전망 필요"

부당한 관행이 지속되고 있지만, 작가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원고료 책정이나 인세 지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함께 논의해 줄 사람이나 조직이 충분치 않다. 각종 협회나 작가단체에 가입돼 있더라도 이들이 출판사에 전선을 긋고 작가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진 않는다.

열악한 집필 노동 환경의 주된 원인으로는 출판 권력이 지목된다. 작가가 청탁받은 원고를 쓰면,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책을 제작한다. 인쇄소와 제본소를 거친 책은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서점 가판대에 깔린다. 이 모든 과정에서 출판사의 입김이 업계 전체에 강하게 작용한다.

저작권법이 개정되고 예술인복지법·권리보장법이 만들어져도 이러한 권력관계가 단번에 바뀌긴 어렵다. 작가들의 말과 생각과 요구사항을 출판사에게 보이고 들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안씨의 생각으로는 노조 결성이 유일하다.

"집필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너무 낮아요. 글은 아무나 쓸 수 있으니까,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늘 귀결돼요. 작가들에게 필요한 건 결국 4대 보험으로 대표되는 사회안전망이에요. 이를 위해서는 노조를 통해서 출판사와 교섭하고 정부와 교섭해야 해요. 출판산업 전체를 바라보고 이 산업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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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작가노조 준비위원회가 서울 중구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장르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집필노동자입니다' 집담회를 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작가노조 준비위원회 제공

 
지난 9월 14일 '장르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집필 노동자입니다'라는 주제로 작가 30여 명이 집담회를 갖고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했다. 안씨는 특정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글을 쓰는 모든 작가를 초청하고자 했다.

집담회의 키워드는 '작가노조'였다. 시·소설·SF·르포·인문사회·번역 등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계약서나 인세에 관한 얘기를 할 땐 공통된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나눴다. 작가들은 이날 집담회가 변화의 구심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며 이렇게 입을 모았다.

"우리 작가노조 해봅시다."

노조를 제안한 안씨는 지금도 책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크다. 출판사의 이윤만으로 책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출판산업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다양한 지향과 고민을 글로 표현하는 작가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안씨의 생각이다.

"종이책은 우리 사회 모든 문화의 기초가 되잖아요. 이 기초를 튼튼하게 하려면 작가들이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해요. 책이 좋아서, 책을 통해서 세상에 발언할 수 있는 건 결국 작가들의 몫이에요. 이들이 표현하는 글과 언어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으면 해요."

집담회가 끝나고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에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작가들의 문의가 쏟아졌다. 10월 초 집단 평가가 끝나면 이들은 구체적인 활동 계획을 세워나갈 예정이다. 작가의 노동자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노조 활동을 어떻게 지속해 나갈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문화예술계에서 노조가 만들어지면 노동자성을 둘러싼 논의가 항상 나와요.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상 근로자에 포함되어야지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노동자성을 따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의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조를 만드는 것이지, 기존의 제도 안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방식이 되면 안 되잖아요. 작가노조가 생기고 나서도 이런 지점들을 두고 고민이 많아질 거예요. 우리 모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함께하기로 시작한 그 마음이 앞으로도 꾸준히 연결되면 좋겠습니다."

*작가노조 준비위원회 참여 https://han.gl/ayA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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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조'를 준비 중인 안명희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복건우

#안명희 #작가 #작가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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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복건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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