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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흑인 지도자 둘의 다른 인생

'워싱턴 대행진'의 날 60주년을 맞아 말콤 엑스의 묘를 찾아가다

등록 2023.09.25 08:31수정 2023.09.2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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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엑스를 찾아왔어? 여기, 내 앞으로 와." 

한적한 동네의 소담한 공원묘지였다. 동쪽 구역은 봉분이나 우뚝 솟은 비석도 하나 없이 모두 평묘인데다, 표지석마저 잔디에 묻힐 듯 땅에 깔려 박혀 있으니 처음에는 묘지라기보다 드넓은 잔디 광장 같았다. 


여기서 어떻게 말콤 엑스(1925~1965, 미국 흑인 해방운동의 급진파 지도자)를 찾아낸담. 난감했다. 잔디 깎는 트랙터 두 대가 내는 굉음 사이로 지도가 알려주는 대략의 위치에서부터 표지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잔디밭 테두리를 따라 두 줄로 나란히 땅에 깔린 동판들. 정오의 태양빛에 반사된 동판의 글자는 읽기도 어려웠다.

쉽게 찾긴 글렀다 싶었는데, 갑자기 트랙터 한 대가 잔디를 깎으며 저만큼 가다 말고 다시 돌아오더니, 운전하시던 기사분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말콤 엑스의 묘 앞에 일부러 트랙터를 세우고 손짓으로 이 앞이라고 일러주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찾았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콤 리틀 엑스 하지 말리크 엘샤바즈. 

그가 사용했던 이름만큼이나 복잡한 인물. 한국에서 미국 주류 역사만 배운 내게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웠던 인물. 말콤 엑스 앞으로 걸어갔다.  

추앙 받는 마틴 루터 킹


흑인이 아닌, 중학생 몇과 고등학생 몇명에게 물어보았다. 학교 수업중에 흑인 인권 운동가에 대해 공부를 하느냐, 누구에 대해 배웠느냐고. 입을 모아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꼽는다. 

혹시 '말콤 엑스'에 대해 배워봤느냐 했더니 열 명이 넘는 학생 중에 딱 한 명이 역사 시간에 이름을 들어봤다고 말한다. 그것도 교재로 배운 것이 아니라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또다른 리더였다고 선생님이 잠깐 언급했다고 한다.

흑인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말콤 엑스'를 알고 있었다. 가까운 뉴욕시의 할렘에서 활동했던 말콤 엑스보다 저멀리 아틀란타와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마틴 루터 킹을 더 잘 안다니. 아마 킹 목사의 이름은 교과서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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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장소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 계단위 킹 목사의 연설 장소를 기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권력에 편승한 종교 지도자들은 역사속에 많이 볼 수 있지만, 마틴루터 킹은 권력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선 시민 운동가이자 지도자였다. ⓒ 장소영

 
올해 8월 28일은 '워싱턴 대행진의 날' 60주년이었다. 60년 전 이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의 연설이 있었다. 워싱턴 D.C.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 계단 위에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링컨 대통령의 저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과 함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도 기억하게 된다.

미국은 매월 하루씩 국가 기념 공휴일(연방 공휴일)이 있는데, 새해 첫 달 1월의 공휴일이 마틴 루터 킹의 날(Martin Luther King Jr. Day)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외에는 미국의 그 어떤 지도자나 대통령도 자신의 이름이 걸린 연방 공휴일을 가진 이가 없는데 말이다.

워싱턴 D.C. 중앙에는 내셔널 몰(National)이라는 큰 공원이 있다. 이 주변으로 국회 의사당, 백악관, 대법원을 비롯한 주요 행정 건물은 물론 국립 박물관과 참전 혹은 승전 기념 공원, 국가 차원의 기념 조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한국 전쟁 참전 기념 공원도 이 일대에 포함된다. 

그런데 링컨, 루즈벨트, 제퍼슨 단 세 명의 대통령 기념 공원 사이로 유일하게 국가 지도자가 아닌 인물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대통령들 만큼이나 거대한 동상, 대통령들 만큼이나 웅장하게 조성된 기념 공원을 가진 인물,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심지어 그가 태어나고, 자랐고, 활동했던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기념 공원은 '국립' 역사 공원으로 세워졌다. 

민권법(Civil Rights-평등한 시민권리를 위한 법, 1962년)이 제정되기 이전, 흑백 차별이 사회에 만연하던 시절에 차별 철폐를 위해 싸우던 두 지도자였는데,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가 미국 사회에서 받는 대우는 왜 이렇게 다른 걸까. 영화로만 만나보았던 말콤 엑스의 마지막 두 장소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추앙 받지 못한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은 아버지의 면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름을 물려받았고(주니어 Jr.), 기독교 목사라는 종교와 직함을 물려받았고, 지역사회의 명망 있는 지도자의 위치를 물려받았고, 넉넉한 중산층의 지위와 학력을 물려받았다. 

마틴 루터 킹이 높이 추앙받는 데는 그의  업적 자체도 대단하지만, 미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주류 백인 사회와 골 없이 소통가능한 품행과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콤 엑스가 하나도 가져보지 못한 배경이었다. 내세울 것 없는 학력과 경력에, 가난에, 전과에,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적대심과 독설로 뉴욕 할렘에서 민중을 이끌었던 말콤 엑스를 미국 사회도 받아내기 버거웠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더 나은 미국을 꿈꿀만 했고, 말콤 엑스는 미국 사회의 악몽같은 현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동상을 올려다보던 것과 달리, 고개를 숙여 차분히 발 앞의 동판을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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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엑스의 묘소 (Fencliff Cemetery) '엘 하지'는 이슬람 성지순례를 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이름이라 한다. 부인 베티 샤바즈도 함께 있다. 잔디밭 테두리를 따라 동판이 두 줄로 묻혀 있는데, 말콤 엑스는 안쪽에 자리한다. 그래서 나란한 두 동판의 글자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말콤 리틀로 태어나 말콤 엑스로 이름을 날리다 말리크 샤바즈로 잠들었다. ⓒ 장소영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
말콤 엑스 


낯설기만 한 그의 최종 본명 말리크 샤바즈라는 이름과, 사람들에게 널리 기억되는 말콤 엑스라는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태어나면서 그가 가졌던 이름은 말콤 리틀이었다. 소년 말콤 리틀의 아버지와 친지들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손에 살해되거나 린치 당하고,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 감금되면서 어린 말콤 리틀은 일찍이 생존 전쟁에 내던져야 했다.

외조부라고 부르기도 힘든 '그 백인'은 흑인 가정부, 말콤 리틀의 외조모를 성폭행했다. 말콤은 평생 '백인인 그'를 증오했다. 그에게 백인 사회란, 어쩌면 '그 백인'과 '그런 백인들' 같지 않았을까. 

결국 말콤 리틀은 태생적으로 그에게 주어졌던 정체성, 백인이 부여한 이름과 종교를 버렸다. 아프리카의 어느 이름을 알 수 없는(X, 엑스) 조상에게로 뿌리를 옮겨갔고, 극단적인 흑인 민족주의 이슬람 단체(Nation of Islam)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말콤 엑스라는 정체성도 오래가지 못했다. 청렴하고 가정에 충실한 데다 외조모의 가슴 아픈 사연을 기억하는 말콤 엑스로서는, 소속 단체의 지도자가 한 여성에게 저지른 일과 부패를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백인 사회를 등졌듯 그는 다시 극단적인 흑인 사회를 등지고 이슬람 성지순례를 떠났다.     

정통 이슬람의 성지에서 마침내, 일평생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환대와,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를 경험하고 그제서야 말콤 엑스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 상대를 적대시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말리크 샤바즈가 되어 돌아왔지만,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에 던져 두고간 그의 적대감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왔다. 열여섯 발의 총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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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에 있는 말콤 엑스가 암살된 장소, 오두본 볼롬(극장) 말콤 엑스가 총탄에 쓰러진 오두본 볼룸. 원래는 이 일대가 재개발되어 허물었어야 하는데, 시민들의 청원으로 거리와 접한 건물 일부를 남기고 위로 병원 건물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Lasker Biomedical? Research Building, 3940 Broadway ⓒ 장소영


말리크 샤바즈를 쓰러뜨린 장소를 찾아 맨해튼 북쪽의 할렘 거리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주소는 맞는데 큼지막한 광고가 걸린 푸른 은행 건물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잠긴 문을 하나 발견했다. 문 너머 또 다른 문 위로 말리크 샤바즈의 이름이 보였다. 하필 휴관 중일 때 찾아오다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미국이 가지는 다양성의 가능성과 가치에 막 눈을 뜬 말리크 샤바즈도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차별을 넘어 미국의 사회 문제에 눈 뜨기 시작한 마틴 루터 킹 역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총탄에 쓰러졌다. 둘 다 마흔을 목전에 둔 이른 나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젠가 백인의 손에 자신이 죽게 될 거라고 했던 말리크 샤바즈는 흑인 형제의 손에 죽었다. 백인의 손에 암살당한 것은 흑백의 평등한 공존을 외쳤던 마틴 루터 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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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엑스가 암살된 장소, 오두본 볼룸. 지금은 The Shabazz Center 이다. 말콤 엑스의 최종 본명이 된 '엘 하지 말라크 샤바즈'와 출생, 암살 연도가 표기된 안쪽 문 ⓒ 장소영


대중은 왜 말리크 샤바즈의 생 전체를 살피기 보다 말콤 엑스로 그를 박제해 놓으려 할까. 시대의 '빌런'으로 마틴 루터 킹과 대조해 기억하고, 말하고, 소비하기 쉬워서일까.

그의 묘소에서처럼, 누군가 도움을 주기위해 나타나 문이라도 열어주려나 서성였지만 더 들여다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누군가의 꿈에는 힘을 보태주고, 누군가의 악몽은 깨워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 할렘 강을 건너 집으로 왔다. 

꿈은 이루어졌지만 악몽도 여전

30대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가졌던 '꿈'은 이루어졌을까. 30대의 말콤 엑스가 보았던 '악몽'같은 현실은 끝났을까. 차별법은 차례로 무너지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과 부통령도 나왔고, 흑인 역사의 달(2월)에 이어 작년부터 '해방의 날' (준틴스, Juneteenth)이 6월의 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고, 평등한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고, 누구나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법적인(민권법-Civil Rights) 보장도 얻었다. 마틴 루터 킹 기념공원도 이 민권법이 제정된 해인 1964년을 주소지로 하고 있다(1964 Independence Avenue).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거리에는 BLM(Black Lives Matter)의 구호가 울려 퍼지고,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는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약탈과 폭력으로 바뀐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다음으로는 상호 혐오를 부추겨 인기몰이를 한 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가짜 뉴스와 음모론은 또다른 사회문제가 되고, 흑백 소득격차는 1970년 이래 다시 심화되는 중이라 한다. 주마다 교육과 인권 문제가 새삼 첨예하게 대립하고 혐오 범죄는 흑-백을 넘어 다양성의 가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꿈은 이루어졌지만 악몽도 여전한 셈이다. 미국 사회의 지향점을 가리키던 마틴 루터 킹도, 미국 사회의 어두운 바닥을 보여주며 독설을 뿜어내던 말콤 엑스도 '30대'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꿈도 제시하지 못하고, 악몽도 처리하지 못하는 작금의 정치계도 그렇고, 정치인들의 고령화도 답답하던 차에 그나마 상원 의원 롬니(76)의 은퇴 선언이 반갑기까지 하다. 이를 시작으로 몸도 생각도 젊은 지도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해 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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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산을 희망으로 뚫고 간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기념 공원에는 마치 커다란 바위 문 처럼, 절망의 바위가 양 옆으로 서있다. 뚫린 바위 사이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동상이 새겨진 희망의 바위 뒷 모습이 보인다. ⓒ 장소영

덧붙이는 글 말콤 엑스의 묘소는 Ferncliff Cemetery 공원 묘지에 있습니다.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올라가는 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 #워싱턴 대행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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