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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22분마다 들리는 흐느낌, 여자는 증인이 필요했다

[인터뷰] 연극 < 2시 22분 - A GHOST STORY >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박지연

23.09.02 12:44최종업데이트23.09.0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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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샘과 제니 중 어느 쪽? “어렸을 때의 저라면 과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걸 훨씬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현재 시점의 저는 그냥 마음의 눈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뭔가를 재단하고, 단정짓고, 결정짓는 건… 하루에도 12번씩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약간 샘에 가까운 모습이긴 했죠. (웃음) 뭔가를 계속 짚고 넘어가야 되고, ‘이건 틀리고 이건 맞아’. 그러니까 다른 걸 인정 못하고 ‘틀린 거’라고 항상 얘기했었거든요. 지금은 조금 부끄러운 모습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뀌었어요.” ⓒ 곽우신

 

제니가 처음부터 귀신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두 눈으로 똑바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두 귀로 분명히 들었고, 온몸으로 느꼈다. 정확히 새벽 2시 22분마다 어린 딸 피비의 방에서 들리는 발걸음, 흐느낌, 분명히 누군가 '있었던' 느낌. 이게 정말 혼자만의 착각인 걸까? 증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 딸 피비와 단둘이 함께 보내야 했던 지난 며칠은 제니의 신경을 완전히 곤두서게 했다. 책을 쓰기 위해 섬으로 떠나있는 동안 연락이 두절됐던 남편은 기껏 대는 핑계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라는 것이다. 냉철하고 똑똑하며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남편 샘은 제니의 이런 불안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엄습하는 두려움이 제니를 계속 괴롭힌다. 이런 정신 상태와 기분으로 손님을 초대한 파티라니? 미리 약속되었던 것이긴 하지만, 한껏 예민해져 있는 제니는 이 상황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샘한테는 '오늘 파티를 취소하자'라고 얘기했을 거예요. 그런데 샘이 '그럴 수 없다. 이미 친구들도 다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알겠다'라고 어쩔 수 없이 답했겠죠. 샘이 며칠 동안 연락도 안 됐으니까, 미리 파티를 취소할 수 있는 수단도 제니에게는 없었으니까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원주민이 밀려나고 있는 구도심, 부부는 낡고 큰 집을 좋은 가격에 사서 하나씩 새로 고쳐 나가고 있다. 페인트칠도 다시 하고 있고, 주방도 새로 들여놓았고, 그리고 문… 망할 문. 집에 들어와 살면서 조금씩 리모델링하고 있는 공간이지만, 제니의 취향이 반영된 건 많지 않다. 완성되지도 않은 집에 초대된 로렌과 벤은 끝내주는 화장실에 찬사를 보내며 웃지만, 제니는 계속 위화감을 느낀다. 이들의 대화는 미묘한 불협화음을 이어간다.
 
그때, 제니의 머릿속이 번뜩인다. 자기 말은 전혀 믿지 않는 샘이지만, 혹시 샘의 오랜 친구인 로렌과 로렌의 남자친구 벤의 말은 듣지 않을까? 이들이 증인이 되어준다면, 2시 22분마다 자신을 괴롭혔던 공포의 실체를 샘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제니는 이 집에 귀신이 있다고, 그러니 이들에게 2시 22분까지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고 봐요. 제니는 사실 그런 뚜렷한 목적이나 계획을 갖고 움직이지 않거든요. 파티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일단 샘의 친구들이 집에 왔으니, 이들이 최대한 즐겁게 지낼 수 있게끔 도우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 파티가 무사히 빨리 끝나서 샘과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잖아요? 샘에게 창문 좀 닫아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피비 방의 창문은 계속 열려 있고, 아기도 자꾸 울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샘은 친구들 앞에서도 제니에게 아무런 공감을 해주지 않죠. 이런 상황들에 대해서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다 보니까, 처음 의도와 관계없이 2시 22분까지 있어 달라는 부탁까지 나아간 거죠."
 

거실의 시계가 2시 22분에 가까워질수록, 집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난다. AI 기기의 반응은 선택적이고, 인형은 갑자기 옮겨져 있고, 세면대에서 술이 나온다. 사람의 비명처럼 귀를 찢는 여우의 울음소리는 이들의 불안감을 옥죄어 온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샘과 그런 샘에게 서운한 제니, 샘과 로렌의 과거, 로렌과 벤의 문제, 로렌과 제니 사이의 어긋난 대화들까지 무대 위 인물들의 감정도 시간이 갈수록 거세게 부딪힌다.
 
긴장과 소리
 

▲ 무대 위 욕설 “어떠셨나요? 무대 위에서는 욕하는 게 처음이었죠. 제가 원래 욕을 좀 잘하거든요? (웃음) 꽤나 차지게 잘 하는 편인데, 너무 차지게 하니까 제가 평소에도 욕을 잘하는 줄 아시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평소에 좀 줄였어요, 너무 잘해서. (웃음) 원래 대본에는 거기에 ‘F***’를 다 이제 써놓고 실제로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욕은 뉘앙스가 다르기는 한데, 그래도 대본에 나와 있는대로 정확하게 하는 겁니다. (웃음) 그런데 사람이 진짜 4일 동안 극한의 공포에 처해 있었다면 사실 어떤 사람이라도 나올 법한 말이잖아요? 그리고 제니가 엄청 막 순진한 어린애도 아니고요. 얼마나 제니가 답답하고 힘들면 그렇게 했을까 싶기도 해요.” ⓒ 곽우신

 

연극 < 2시 22분 A GHOST STORY >는 2021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연극 작품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꾸준히 국내에 소개하고 있는 신시컴퍼니가 이번에도 발 빠르게 움직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 이 작품을 올렸다. 배우 박지연은 < 2시 22분 >이 준비하면서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연습하면서도 첫 공연을 하는 날을 손꼽아 기대했고, 공연이 올라간 뒤에는 하루하루 공연 일정이 끝나가는 게 아쉬웠다. 그만큼 이 작품은 보는 관객만이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도 자극한다.
 
"제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한 번 있었는데 그게 <빨래>였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도 왜 <빨래>가 좋은지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무대 위에서 자유로운 작품을 처음 만난 거였어요. 제가 해왔던 라이선스 작품, 대극장 작품들은 음향이나 조명 큐 같은 정보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많았거든요. 하지만 <빨래>를 통해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감각적인 움직임을 할 수 있었다는 게 큰 경험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를 겪은 뒤 이 작품을 만나게 됐는데, 그 사이에 제가 달라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정보에 의한 움직임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느껴지는 대로 움직였죠.
 
아마 관객분들이 저희 공연을 처음 보실 때의 느낌이, 저희가 이 대본을 처음 받고, 처음 움직여 볼 때와 되게 비슷할 것 같아요. 그 설렘과 두려움과 떨림들이 공연에 너무나 가득 차 있어서, 그 감각적인 움직임들이 엄청 흥미롭고, 그 안에 있다 보니까 되게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웃음)"

 

▲ 배우 개그? “아니요! 프랑스 혁명(레미제라블)도, 사랑과 영혼(고스트) 이야기도 원래 대본에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 좀 신기하기도 했어요. 저희가 원래 대본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거의 없어요. 저희 공연은 또 진짜 애드리브를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 있어서, 함부로 서로 잘 못하거든요. 왜냐하면 잠깐이라도 틀어지면 무대의 리듬이나 템포도 다 틀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잘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곽우신

 

'반전 스릴러'라는 장르답게 이 작품은 관객에게 숨 쉴 틈을 별로 주지 않는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어느새 1막이 끝나 있고, 잠시 후 시작된 2막도 순식간에 휘몰아친다. 작품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장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반전 요소들 사이의 틈을 장악하고 메워주는 건 여러 소리이다. 예상 못 한 순간에 관객의 고막을 때리는 강렬한 소리가 관객을 방심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이미 숙지하고 있는 배우가 매번 긴장감을 유지하며 연기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긴장감을 잘 유지하기 위한 싸움이 어려워요. 하다 보면 욕심도 생기고, 반대로 권태로움을 느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작품을 하면서 배우가 새로운 자극들을 또 찾으려고 노력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게 하면 저희 공연은 오히려 무너질 수가 있거든요. 깔끔하게 다듬어진 처음 그대로 컨디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그게 또 다른 어려움이더라고요. 하지만 첫 런 스루 시작부터 첫 공연,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긴장이 놓인 적이 없어요. 정말 매회 긴장해요. 대사도 매회 공연 전에 계속 배우들끼리 맞춰보고 올라가거든요. 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서로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고, 연기하다가도 한 명의 텐션이 낮다 보면 나머지 배우들이 다시 또 끌어주는 게 너무 잘 돼서 사실 그런 걸 느낄 새가 없죠.
 
사실 무대에서 놀라는 연기는, 진짜 놀라거든요(웃음). 긴장이 조금 풀릴 만할 때마다 관객이 다시 긴장할 수 있게끔 소리가 나오는 작품이라, 저는 다 아는데도 또 놀라요. 제가 시각보다 청각에 더 예민한 사람이라서, 그런 작품 안의 소리가 계속 제게도 자극을 주고 있어요. 특히 소리의 깊이와 공간감까지 다 디자인한 작품이기 때문에, 아마 객석에서 보시는 분들은 훨씬 입체적으로 들리실 거예요. 저도 객석에서 모니터링했을 때 소름 돋고 그랬거든요.
 
효과음들이 기술적으로 무대에 도움을 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면, 여우의 비명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대사에도 그 이야기를 하죠. '이게 무슨 냄새예요?' 하면 '여우예요, 저쪽 어디에 굴이 있거든요' 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샘이 '저것들도 자기네 집이라고 죽어도 안 나간다'라는 말을 하거든요. 여우들도 자기 집을 '지키려는' 존재이다 보니 그 여우 울음소리가 슬프게 들리기도 하거든요. 2막에서 제니가 자기 딸을 지키려고 할 때, 제니의 말과 여우의 소리가 '오버랩' 돼요. 여우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내는 소리, 저(제니)는 제 딸을 지키기 위한 소리. 그런 소리라고 생각하면 '더 커도 상관없다' 싶었어요."

 
소통과 사랑
 

▲ 닫고 싶지 않은 결론 "결론을 보고 '이거였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최)영준 오빠가 했던 말이 되게 인상 깊었는데 ‘이게 만약에 작가의 어떤 낙서들의 조합이라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 공연이 왜 재밌냐면 너무나 다양한 시각으로 사실 해석이 가능하고 그래서 좀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열어두고 싶기는 해요." ⓒ 곽우신

 
혼령의 존재를 절대로 믿지 않는 샘,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벤, 중립인 척 회피하며 왔다 갔다 하는 로렌, 그리고 이 집에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제니. 네 사람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집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어느 순간에는 샘의 열변이 설득적으로 들리다가도, 어느 장면에서는 귀신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 같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물음표는 관객이 무대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정말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고, 그 귀신이 어렵고 힘든 과정을 간신히 거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거라면, 그들은 왜 이토록 인간을 두렵게 하는가? 그들이 인간에게 접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들끼리도 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저는 어쨌든, 사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영준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사랑이 뭔데?' 굉장히 인상 깊은 말이었죠. '사랑이 뭐지?' 그러니까 사랑이 뭔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잖아요? 사랑하면 쓴소리도 더 할 수 있고 그렇잖아요. 저는 제가 연기하는 제니라는 인물의 베이스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니는 다른 이들의 행동 이유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거예요.
 
이 유령들이 어떻게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까? 방법을 알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제니가 '혼령은 사람의 파편 조각이다. 혼란스럽고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그랬겠지만', 이들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잊을 수 없는데 잊혀야 하는 것들이 있고, 힘들고, 슬프고, 그러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게 결국 그런 것뿐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결국에는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작품에는 아이러니한 재미가 있어요. 예를 들면, 샘이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게 소통'이라고 하지만, 작품에서 제일 소통이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잖아요. 귀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아이러니하고, 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상상이었다면요? 사실 모든 게 다 가능한 거예요. 이 인물들이 진짜 뭔가를 잘못 본 걸 수도 있어요. 여러 가능성과 해석을 열어두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죠."

 
샘과 제니는 각자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상징한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직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샘은 제니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대신 본인의 이론과 과학적 사실들을 나열하는 데 치중한다. 불안한 제니에게 정말 필요로 한 게 무엇인지 샘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니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제니는 자신이 샘의 학생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샘은 뭐가 그리 급한지 제니를 몰아붙인다. 그럴수록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관계도 삐거덕거리게 된다.
 
"아시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 되잖아요? 제니는 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 자체를 너무 사랑했을 거예요. 실제로 저는 공연 중간에도 샘이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막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멋있어요. 그런데 그냥 그 내용이 싫은 것뿐이지(웃음). 객석에서 보는 샘을 보는 분들은 '좀만 제니를 더 이해해 주지' 하며, 샘의 그런 모습들이 너무 싫으실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제니는 샘을 좋아했을 거예요. 나한테 없는 모습이거든요. 그 모습을 사실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게 아닌 거죠. 이거를 정확하게 한 단어로 설명하는 게 좀 어렵지만, 그 마음을 갖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샘이 나(제니)를 좀 더 공감해 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저는 제니가 샘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니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가 제니를 바라볼 때도 그렇고, 제니도 스스로 자기가 샘한테 의존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샘이 마음이 넓고 따뜻한 제니에게 의지하는 게 있었을 걸요? 샘은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걸 두려워해요. 겁쟁이죠.

그런데 제니는 샘이 '이게 맞아'라고 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건 강한 사람이죠. 너무 무섭고 도움이 필요하고, 말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내가 무서웠다는 걸 인정하고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용감한 게 아닐까요? 제니가 극 중에서 가장 나약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헤쳐 나가는 사람,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겹과 틈
 

▲ 관객과의 호흡 “공연하다 보면 관객들께서 재밌게 보고 계시다는 게 느껴져서 저도 진짜 너무 좋아요. 집중해서 봐주시고, 즐거운 부분에서 많이 마음껏 웃어주시고, 놀라는 장면에서는 또 마음껏 놀라주시고, 이렇게 감정 표현을 객석에서 편하게 해도 되는 작품이잖아요? 숨죽여서 볼 필요가 없는, 솔직한 공연이라 더 좋은 공연이고, 그래서 또 좋아해주시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 재밌는데 관객도 재밌어 하실까?’ 걱정했는데, 연습하면서 들었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뀔 때가 참 좋았어요.” ⓒ 곽우신

 

나약하고 의존적인 것처럼 보이는 제니이지만, 그저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모습은 작 중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하게 수렴한다. 제니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시도한다. 그것이 설령 낯설고, 비과학적이고, 믿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말이다. 듣는 위치에서 말하는 자리로 변화하고, 샘에게도 적극적으로 동참을 권하거나 본인의 의견을 피력한다. 동시에 샘을 배척하거나 잘라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두려움에 떨며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지만 그렇다고 이를 흔히 이야기하는 성장으로 규정하기엔 또 적확하지 않다. 인물을 덮은 서로의 겹들을 헤치고, 숨겨진 틈을 찾아내고, 그 틈 사이로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깝다.
 
"제니가 강한 건 물론 피비 때문인 게 가장 커요. 제니는 샘을 떠나기 위해서 '엄마한테 전화했고, 나 이 집에서 둘째는 가질 수 없고, 나 당장 피비랑 같이 나갈 거야'라고 얘기를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가 샘과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대사가 딱 있어요. '당신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우리 희망이 생길지도 몰라'라고 희망을 계속 붙잡고 있어요. 샘을 정말 사랑하고, 함께하기 위해서 희망을 놓지 않는 강한 사람. 그래서 더 안타깝기도 하고요. 작품 속에서 제니는 주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 사람이었거든요. 하지만 마지막 장면쯤 되면 제니가 '나는 옛날의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 모든 겹의 밑에, 그 완전 밑에 있었던 진짜 내 모습이 뭔지 찾고 싶다'라고 하잖아요.
 
그전까지 제니는 나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 자신을 계속 찾아 나가면서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 거죠. 저는 그것을 두드려 준 사람이 샘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제니는 자기 안의 틈이 틈인 줄도 모르고 계속 막으면서 살아왔다가, 샘이 마음의 문을 탁 두드려서 뭔가 만들어 준 거죠. 물론 결국에 그 틈이 계속 벌어지게 만드는 것도 샘이겠지만, 원래 약간의 틈은 오히려 좋은 거잖아요? 숨구멍이잖아요. 틈이 아예 없으면 안 되는데, 제니의 어떤 꽉 막힌 삶 속에서 숨구멍을 이렇게 탁 트여준 사람이 하늘과 별을 이야기하는 샘이었던 거죠.
 
그래서 샘과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샘을 향한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라요. 그때 보여주지 않으면 샘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별로 없더라고요. 로렌과 대화를 나눌 때도 과거를 많이 그리고 상상하고 있죠. 사실 이 모든 게 제니가 정말 샘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에요. 그러니까 제니는 더더욱 샘을 쉽게 놓을 수 없는 거고요. 배우들끼리도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게, 이 작품을 자꾸 우리 삶과 계속 연관 지어서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며 본인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이 배우는, 최근 꾸준하게 연극도 해나가고 있다. 노래가 특기인 배우가, 노래하지 않는 작품을 소화하고 있고, 단순히 해내는 것을 넘어서 그 작품들 안에서 본인만의 고유한 매력을 창조하고 증명하고 있다. 그건 그저 발음이 좋다거나, 연기를 잘한다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말들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와 확신이 있었고, 극장을 나가는 관객도 배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잡아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중간에 반전을 눈치챘음에도, 끝까지 재밌게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굉장히 섹시하고 세련된 극이다'라고 홍보팀에서 말씀 주신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공연이 세련됐고 섹시해요. 치열하게 모든 게 다 들어있는데, 이걸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뿐이죠(웃음). 이 작품은 무언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서사적인 재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같이 경험할 수 있는 장르적 재미가 큰 작품이고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있지만, 또 연극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재미도 있거든요.

그 자리에 같이 앉은 관객분들끼리 재밌어하고, 놀라고, 긴장하잖아요? 관객들이 나가면서 계속 '거기가 어땠고, 여기서는 이런 거였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요. '진짜 1초도 지루한 순간이 없었다'라고 누가 후기를 써주셨는데,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것도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무대 위에 시계가 버젓이 계속 켜져 있고 시간이 흐르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연을 본다는 게요. 최근에 무대에 올라온 모든 공연 중에서 이 작품이 제일 재밌다는 확신이 들어요.
 
(웃음) 그래서 제가 만약에 나중에 아이를 갖게 되면 그때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지만, 시간이 흘러서 진짜 아이를 갖게 됐을 때 다시 하면 어떨까 싶고, 나한테 정말 내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게 뭘까 너무 궁금해졌거든요. 제니도 그런 느낌으로 한번 다시 해보고 싶고, 로렌도 나중에는 꼭 해보고 싶어요. 로렌이라는 인물도 저에게는 정말 매력적이었거든요. 결론은 제니로도, 로렌으로도 또 하고 싶어요! 금방 다시 하면 좋을 텐데. 또 언제 다시 할지 모르지만, 꼭 불러주세요!"

 

▲ 노래하는 작품은 언제쯤? “곧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조만간 결정됩니다. 저 진짜 노래하고 싶어요! 저 무대에서 노래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어요. 1년이 넘었거든요. 그게 있어요, 그냥 노래를 부를 때랑 다르게 이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통한 그 제 노래 울림을 느낄 때 기분이 되게 좋거든요. 그걸 안 느껴본 지 너무 오래돼서…. 곧 들려들겠습니다!” ⓒ 곽우신

 
 
박지연 연극 2시22분 박딜레이 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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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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