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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20세기를 산 오펜하이머의 다층적인 고뇌에 대하여

[신작 영화 리뷰] <오펜하이머>

23.08.21 17:46최종업데이트23.08.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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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 UPI 코리아

 
21세기 전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감독 중 하나로 '크리스토퍼 놀란'을 뽑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례로 그는 전 세계 영화산업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테넷>의 극장 개봉을 밀어붙였고 배급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대중과 평단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영화를 내놓았다 하면 모든 이가 환호한다.

그런 놀란이지만, 그의 열두 번째 장편 연출작 <오펜하이머>를 향한 사랑은 특별하다. 그레타 거윅의 <바비>와 함께 2023년 7월 21일에 동시개봉하며 '바벤하이머'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초토화하고 있는 바, 사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임에도 엄청난 흥행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오펜하이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필모 사상 가장 완벽한 영화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가 30년 넘게 타협 없이 장인 정신으로 쌓아올린 연출력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일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산업이 되살아날 때 맞춰 생긴 문화 신드롬 '바벤하이머'라는 이유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유의 시너지? 

물론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배우와 실존 인물이 대거 나오기에, 그들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오펜하이머 역의 킬리언 머피를 비롯해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라미 말렉, 조쉬 하트넷, 데인 드한, 케네스 브래너, 제이슨 클라크, 게리 올드먼, 케이시 애플렉 등이 얼굴을 내밀었다. 더불어 주조연급이 아닌 실존 인물로 아인슈타인, 보어, 파인만, 하이젠베르크, 실라르드 등의 물리학 대가들이 엿보인다. 거기에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이 결정적이었을 테다. 그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 영화는 3개의 시간대가 따로 또 같이 다뤄진다.

오펜하이머의 삶과 그의 시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실험물리학을 공부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듯 고생한다. 닐스 보어의 조언으로 독일 괴팅겐 대학교로 가서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을 접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거장으로 이름을 알려 간다. 공산당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긴밀하게 교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이 찾아와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해 나치 독일보다 빠르게 핵무기를 개발할 것을 명령한다.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1954년 원자력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수소폭탄(슈퍼) 개발에 반대했는데 미국의 의심을 산다. 그가 공산당과 교류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수소폭탄 개발 라이벌인 러시아와도 교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증언하는데, 맨해튼 프로젝트를 같이 했지만 수소폭탄 개발에 있어선 대립했던 에드워드 텔러가 배신한다.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의 상무부 장관 인사 청문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익명의 과학자가 증언하러 나온다는 말에 스트로스는 사색이 된다. 그는 데이비드 힐이었는데, 오펜하이머와 핵무기에 대한 입장이 달랐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다. 과거에 스트로스가 개인적 원한으로 오펜하이머를 공격했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대기실에서 분노하는 스트로스,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들 모두를 자신과 떨어뜨리고자 이간질시켰다고 한다. 실망한 보좌관이, 오펜하이머는 그때 스트로스 당신 얘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얘기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펜하이머의 끊이지 않는 고뇌

오펜하이머는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있지 않고 저 높이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대다수 과학자가 그럴 테지만 그는 유독 심해서 햄버거 하나 팔지 못할 위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현실적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겐 하필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는, 더불어 상대적 소수의 희생과 인류 파멸 사이의 딜레마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하여, 영화에는 오펜하이머의 고뇌가 흐른다. 단 하나의 고뇌만으로 인생이 뒤바뀔 수 있을 정도다. 세계 굴지의 대학이지만 자신은 실험에 맞지 않는 것 같고 대신 저 멀리 우주의 별이 죽고 사는 것에 관심이 많다. 공산당에 들어갈 순 없지만 공산당원들이 하는 얘기에는 관심이 간다. 아이들이 생겼지만 돌보기는커녕 한 번 들여다볼 시간도 없고 대신 한시라도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공산당과 러시아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 수소폭탄 개발에 찬성해 핵무기 확산을 두고 볼 순 없다.

3시간 내내 거의 쉬지 않고 흐르는 OST가 오펜하이머의 상황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겉으론 아무 일 없어 보이는 평온한 순간에도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그가 거대한 것을 입 밖으로 냈을 때 오히려 OST는 잔잔해진다. 고로 그는 언제나 거창한 무엇과 함께한 것이리라. 그도 그지만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시종일관 흐르기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영화의 완벽성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와 대척점을 이룬다. 그는 한없이 현실적이고 또 상대적으로 소소한데, 오펜하이머가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의 존망을 결정하는 대사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반면 스트로스는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범인(凡人)의 면모를 풍기며 오펜하이머를 깎아내리는 데 여념이 없다. 오펜하이머 자체로만 보면 '위대'라는 단어에 완벽히 부합하기 힘들지만, 스트로스 같은 이가 있기에 그에게 '위대'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다.

오펜하이머가 살았던 격변의 20세기

오펜하이머가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다. 인류 최악의 전쟁으로 기억될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뽑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며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으며, 과학기술 분야 전반에서 비약적인 혁신을 이뤘고,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서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신세계에 돌입했다.

그런 와중에 오펜하이머에게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전권이 부여된 것이다. 최소 몇 년간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놓은 채 시대의 소명을 받들어야 했다.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건 물론 앞장서서 지휘하며 혁신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해야 했는데,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을 만한 파워의 핵무기를 개발함에 있어 나치 독일보다 빠르게 완성시키는 게 급선무지만 결국 어딘가에 투하해야 한다면 그 후과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지만 인류말살의 선봉장으로 나설 셈인가?

지금 이 시대, 상대적으로 한없이 평화로운 듯하지만 원자폭탄보다 더 근원적이고 끔찍하게 인류의 운명을 뒤바꿔 버릴 수 있는 과학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선하고 강한 의지로 올바르게 쓸 수 있을지, 애초에 규제하는 게 맞을지 전 인류적으로 고민 중이지만 그 누구도 확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뇌하고 고뇌하고 고뇌하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빛을 발하고 있는 이유다. 그 누구도 대신 생각해 주지 못하고 확답을 주지 못하며 책임져 주지 못하는 것을 고뇌했던 오펜하이머.

불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수많은 이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그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가 지금 여기 나의 삶,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그리고 이 영화 덕분에 우리는 보다 더 심층적이고 다층적인 고민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자그마치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과 contents.premium.naver.com/singenv/themovie에도 실립니다.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제2차 세계대전 맨해튼 프로젝트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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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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