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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폭우에 살아남은 감자가 내게 알려준 한 가지

올해 기부금 장만은 포기... 그래도 감자농사는 내년에 또 시도할겁니다

등록 2023.07.31 13:58수정 2023.07.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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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폭우를 이겨낸 늦여름 감자수확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듯 진흙에서 올라온 감자알 ⓒ 박향숙

 
올봄에 심었던 씨감자는 예년과 다르게 새로운 변신으로 내게 다가왔다. 자칭 텃밭농부 6년차, 매년 주 종목으로 감자를 선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엔 학생동아리를 이끌며 텃밭에서 거두는 각종 작물들을 바자회에서 판매, 연말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는 활동으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코로나 기간에도 작물은 자라는 법, 학생가족들의 변함없는 열정으로 연초에 목표한 동아리 활동을 계속했다.


작년부터 유독 학생들의 봉사활동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었다. 정부의 교육방침 중 학교 밖 봉사활동에 대하여 학생기록부 적용의 범위가 현저히 줄면서, 학생들과 그 가족들의 야외 봉사활동참여도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봉사활동마저도 수능이라는 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이 야속했지만, 봉사단장인 나는 그들에게 활동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텃밭 작물재배는 온전히 나와 남편의 노후를 대비하는 삶의 연습장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감자재배는 해마다 수확 면에서 효자상품이었다. 감자씨도 수미산 감자를 공수받아 하지경에 나오도록 정성을 들였고, 감자는 어김없이 풍성한 수확으로 보답해주었다. 수확금은 전액 겨울철 독거노인들을 위한 쌀이나, 이불, 연탄을 사는 데에 기부했다. 몇 년 동안 지인들과 함께 이 활동에 지속하다 보니 해마다 봄이 되면 그들은 일찌감치 격려를 했다. 나에게 '올해도 감자농사 잘 지어서, 수확하면 팔라', '꼭 전화 달라'고 선주문을 해둘 정도였다.

폭우 쏟아진 군산, 내 감자들 어쩌나 

올봄 나의 씨감자들은 약 2주 정도 늦게 심어졌다. 하지를 넘어 7월 초에 수확하면 되겠다는 계산으로 작년보다 정성을 더 들였다. 사람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하늘의 섭리를 능가하진 못하는 법인 줄 알고 있었지만 올해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다. 6월 말부터 시작된 불청객, 장마는 7월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비가 오면 땅이 개일 시간이 필요한 데 이삼일 걸러 비가 오니 자연히 감자꽃과 잎줄기만 바라보는 날이 늘어났다.

올 장마의 최고 강수량이 군산에서 타전되면서 내 마음은 온통 수확때를 놓친 감자생각 뿐이었다. 수확해 팔고 안 팔고를 떠나서, 내가 심은 생떼같은 감자들이 땅속에서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게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날, 이틀동안 태양빛을 머금은 감자밭으로 혼자 가봤다. 작년엔 감자수확량이 좋아서 올해 두둑 수를 늘렸던 것이 오히려 과욕의 증거가 되었다.


섬 출신인 나는 갯벌에서 바지락이나 조개를 캘 때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를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감자밭에서의 갈퀴질을 하며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지락을 거둘 때 나는 소리와 같았다. 알고보니,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감자밭에 들어온 물이 쉬이 나가지 못하고 감자를 둘러싸고 묵묵히 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감자줄기따라 들어 올려지는 감자알들이 어찌나 튼실하던지 새벽을 여는 나의 갈퀴질은 쉬지 않았고, 두둑 두 개를 다 거두었다. 첫 수확이기도 해, 진흙으로 범벅이 된 감자들을 친정엄마와 동생들이 나누어 가져갔다.

남은 네 개의 두둑 속에 들어있을 감자들을 남겨놓고 다시 올 날을 기약하며 돌아서는데 또 다시 비가 쏟아졌다. 그렇게 군산에 쏟아진 최고 강수량은 내 감자밭뿐만 아니라 전국에 엄청난 인명과 물적피해를 가져왔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났다냐, 이게 무슨 하늘의 조화인지 모르겄다'는 말씀하시는 엄마 역시 전국 곳곳 재난소식을 당신 일처럼 귀를 기울였다.

전 국민 마음에 낀 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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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충북 청주시 미호천교 아래에 임시제방이 쌓여있다. 지난 15일 폭우로 미호강 제방이 무너지며 강물이 궁평2지하차도를 덮쳐 2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인명피해, 자연재해가 아닌 인사사고로 전 국민의 맘이 괴로웠다. 한 발짝 떼면 다 이웃사촌이라고, 해병대 젊은 군인의 안타까운 사고 역시 가까운 지역사람이었다. 더욱더 황당한 것은 어느 해처럼 국가재난에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최근 전국적으로 장마전선이 물러가면서 폭우에 젖어있던 일상에도 서서히 햇빛이 들어와 쾌쾌한 곰팡이 같은 냄새를 거둬갔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물 폭탄을 맞은 감자밭에서 물기가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감자를 사겠다고 기다리던 지인들이 격려의 문자를 보내주어서, 거기서 힘을 얻어 밭으로 향했다. 산발적으로 소나기가 예보되어 있어서 또다시 감자와의 상봉이 늦어질까봐 이른 새벽길을 헤치고 나갔다.

밭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 저기에서 감자 썩는 냄새가 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막상 코앞에 닥치니 한숨도 나오고, 미안하기도 한 이런저런 번잡한 맘이 앞섰다. 잠시 후에 남편, 그리고 함께 텃밭을 일구는 지인이 왔기에 '일단 모두 캐어 땅 위로 올려봅시다' 라며 부지런히 갈퀴질을 했다. 감자수확금으로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지인들. 나의 상한 맘을 따뜻히 어루만지며 함께 수고하는 그들이 고마울뿐이었다. 

땅 위로 올라와 긴 호흡으로 태양을 마주한, 즉 썩지 않은 감자알은 기껏 두 상자도 되지 않았다. 순간 나는 감자알로 감정이입이 되어, 폭우기간 일어났던 어둡고 먹먹한 흙탕물 속 벌어진 수많은 사건사고가 떠올랐다. 그러나 인명피해를 생각해보니 텃밭 감자알 가지고 유별을 떠는 내 모습은 사치구나 싶었다.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썩지 않은 감자들을 가지고 나왔다.

방학이라 집으로 내려온 딸아이는 내 얘길 듣더니,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감자요리를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너무 속상해 하지마. 내년엔 더 많이 좋은 감자를 얻을 수 있을거야. 엄마를 위해서 내가 감자요리를 해주겠어. 기대해보시라."

나는 기껏해야 감자볶음이나 감자 고등어찜, 감자탕 정도를 가지고 감자의 변신을 운운하는데 신세대 딸아이의 요리는 확연히 달랐다. 먼저 각 요리에 필요한 감자의 모양과 상태를 생각하더니, 삶거나 날 것으로 모양을 내서 부분포장을 해두는 기지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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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만들어준 위로의 감자요리1 '매쉬드 포테이토스테이크' 라는 감자요리, 처음 먹어봤습니다 ⓒ 박향숙

 
딸은 감자카레라이스, 감자샌드위치, 감자오믈렛, 감자핫도그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메쉬드 포테이토 스테이크'를 만들었는데, 그걸 보며 내 딸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싶어 자못 신통방통했다. 다음날 지인들에게 이번 여름 감자를 거둔 사연과 함께 딸의 감자요리를 얘기했더니, 위로와 사랑을 담은 감자요리를 한 딸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감자를 팔아 불우이웃에 기부하려던 초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을지라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치 하나를 가르쳐준 올해 여름 감자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진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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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만들어준 위로의 감자요리2 학원휴가 첫 날, 점심식사와 간식으로 준비한 딸의 감자요리 ⓒ 박향숙



 
#감자농사 #폭우 #군산 #말랭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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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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