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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포기하고 은행 취직한 손기정, 그가 선택한 저항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07.14 16:08최종업데이트23.07.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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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SBS

 
'전설의 마라토너' 손기정(孫基禎, 1919-2002)과 남승룡(南昇龍,1912-2001) 선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인 운동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체육계의 선구자들이다. 또한 서윤복(徐潤福, 1923-2017) 선생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제자로,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광복 이후 첫 세계제패의 영광을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초기의 혼란했던 시대를 거치며, 마라톤으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스포츠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는가. 7월 1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총성과 함성-보스턴 상륙작전' 편을 통하여 대한민국 스포츠를 빛낸 전설의 마라톤 영웅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인 1932년 4월의 일본 도쿄,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선수들은 일본 최대 달리기 대회에 유일한 조선 팀으로 참가해 일약 우승까지 거머쥐는 이변을 일으킨다. 그 중심에는 후반의 사나이로 불리던 '남형'과 육상천재 '신입'이 있었다. 바로 남승룡과 손기정이었다.
 
순천의 부잣집 장남이었던 남승룡과 가난한 잡화집 막내아들이었던 손기정은, 가정 형편 때문에 손기정이 늦게 입학면서 선임과 신예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갑내기라는 이유로 금세 가까워졌다. 손기정은 남승룡을 깍듯하게 선배로 모셨다고 한다.
 
손기정의 성격이 불이라면, 남승룡은 우직했다. 손기정은 조선 학교와 일본 학교가 맞붙는 여자농구 경기를 응원하러갔다가 편파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일본인 관계자와 대판 싸우고 정학조치를 받은 일이 있을 만큼 화끈한 성격이었다. 남승룡은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인 순천까지 훈련삼아 무박 2일 동안 37시간 34분 걸려서 쉬지 않고 걸어 내려갔다는 놀라운 일화가 전한다.
 
두 사람은 사적으로는 절친했지만 육상에 있어서는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각종 육상대회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1등을 주고받았다. 이전까지 남승룡이 조선 육상의 간판기대주였다면 손기정이 새로운 태양으로 등장하며 라이벌로 떠오른 것.
 
4년 뒤, 1936년. 남승룡과 손기정은 일본 대표팀 올림픽 선발전에서 나란히 1, 2등을 차지하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비록 식민지 국민이지만 두 사람은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올림픽 마라톤 출전권을 획득한 것. 그런데 두 사람은 현지에서 황당한 상황에 직면한다. 일본 측은 원래 3명까지 출전가능한 선수단에 선발전 4등까지 데려오며 "이것은 일본의 국책이니, 조선인 두 사람 중 한 명은 빠져라"고 요구했다. 일본인이 메달을 딸 확률을 높이기 위한 꼼수였다.
 
남승룡과 손기정은 고민하다가 결국 서로를 위하여 자신이 빠지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일본 측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선발전 1, 2등을 다 빼고 올림픽을 치른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난감해하던 일본 코치진은 올림픽 개막식을 불과 2주 앞두고 현지에서 다시 선발전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인 2명, 일본인 2명, 총 4명 중에서 3명의 최종 출전 선수를 뽑는 마지막 경쟁이 시작됐다. 손기정과 남승룡이 이번에도 나란히 1, 2등을 차지하며 실력으로 두 사람 모두 올림픽 출전권을 지켜냈다. 일본은 한 선수가 지쳐서 완주도 하기 전에 기권하고, 다른 한 선수는 지름길을 이용하는 반칙을 저지르고도 손기정과 남승룡을 넘지못했다.
 
"1등보다 일장기 가릴 꽃이 부러웠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SBS

 
1936년 8월 9일. 드디어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날이 돌아왔다. 당시 메인 스타디움은 12만 명의 사람들로 꽉 찼다. 당시 많은 관중들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전 대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라는 선수였다. 자바라는 이미 1년 전부터 베를린에 와서 훈련을 해왔고, 아르헨티나 정부 차원에서 최고급 장비와 컨디션 관리까지 세심하게 지원받았다.
 
반면 우리 선수들은 천으로 제작한 일본식 버선에 얇은 고무로 바닥을 덧대서 충격 흡수도, 발 보호도 안되는 열악한 운동화를 신고 올림픽 무대에 나서야 했다. 컨디션 관리 역시 스스로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오후 3시, 마침내 경기가 시작됐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56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강력한 우승후보 자바라는 초반부터 속전속결 작전으로 치고나가며 다른 선수들과 거리를 벌려 일찍 승부를 끝내겠다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손기정은 본인이 선두그룹에서 경기를 이끄는 스타일인데, 자바라가 너무 빠른 것을 보고 당황했다. 손기정은 이를 악물고 자바라에게 맞춰 속도를 높이는데 옆에서 누군가 "슬로우! 슬로우!"라고 외치며 손기정을 만류했다. 그는 영국 선수인 하퍼였다. 그가 왜 손기정한테 천천히 가라고 했는지, 그 의도가 견제였는지 걱정이었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손기정이 무리하게 달리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으며 결과적으로 하퍼의 외침은 손기정에게는 귀중한 조언이 됐다.
 
얼마 후, 충격적인 반전이 발생한다. 무리하게 오버페이스를 올렸던 자바라가 탈진하여 도로에 기절하면서 실격을 당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기정이 재빠르게 페이스를 올리며 선두를 탈환했다. 그리고 그런 손기정의 뒤를 마지막까지 바짝 추격해온 것은 하퍼였다.
 
치열한 경쟁 끝에 손기정은 하퍼를 따돌리고 먼저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려왔던 손기정은 놀랍게도 마지막 100m 구간을 12초에 주파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당시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마의 2시간 30분대'의 벽을 깬 데 이어, 동양인 최초의 우승을 달성한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이다.
 
남승룡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승룡은 56명의 참가 선수 중 49번째로 주경기장을 빠져나갈 정도로 초반 페이스가 뒤쳐졌다. 여기에 대회 직전 먹은 주먹밥이 탈이 나며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원래 후반에 강했던 남승룡은 포기하지 않았고 30km 지점에서 단 1km 만에 무려 17명을 앞지르며 상위권으로 진입했다. 이어 인간이 한계에 다다른다는 마지막 10km '마의 구간'에서 남승룡은 다시 뒷심을 발휘하며 스퍼트를 올렸다.
 
남승룡의 최종순위는 손기정과 하퍼에 이은 3위, 동메달이었다. 2등과의 격차는 불과 19초였다. 손기정과 남승룡, 두 동양인이 올림픽 1등과 3등을 차지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미국의 존 켈리는 손기정에게 찾아와 운동화를 선물해줄 것을 부탁했다. 긴장김이 풀려있던 손기정은 '옛다 가져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벗어줬다. 하지만 이 운동화가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이 열렸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했으니 당연히 축하 받고 기뻐해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한국인임에도 일장기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두 선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이었다.
 
"처음으로 나간 국제 대회에서 나라 없는 설움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뛰기는 내가 뛰어서 이겼는데, 국기와 국가는 다른 게 나오니… 남승룡과 나하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였어. 2등을 한 영국 선수만 고개를 들고 있었지."

손기정의 회상이다. 또한 동메달을 딴 남승룡은 1등을 못한 것보다도, 손기정이 시상대에서 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게 더 부러웠다고 한다.
 
경기 전날까지 일본 대표팀 유니폼 입지 않은 손기정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SBS

 
여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도 존재한다. 손기정은 경기 전날까지도 일본 대표팀의 유니폼을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일본인이라고 오해할까봐서였다. 뿐만 아니라 손기정은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작성하고 국적을 'KOREAN'이라고 소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1936년 당시는 한글이 금지되었던 시기이고 일본 대표팀 선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글을 쓴다는 것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미국 작가인 리처드 만델은 "손기정과 남승룡은 기자들에게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이해시키려 했다"고 설명했고, 미국 선수 존 켈리는 "누구에게나 'Me Korean, not Japanese' 라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스위스로 망명할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두 사람에게는 베를린 올림픽의 모든 순간들이 '투쟁'이었던 것이다.
 
1936년 10월, 손기정과 남승룡이 귀국했지만 일본은 올림픽 메달이라는 영광에도 불구하고 환영인파를 제지하고 두 사람을 황급히 데려갔다. 일본 경찰은 손기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일본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이후 마라톤을 포기하고 은행에 취직했다. 힘없는 백성인 그가 당시로서 세상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1945년,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온다. 새로운 꿈이 생긴 손기정은 은행에 사표를 냈다. 바로 마라톤으로 돌아와 자신의 후계자를 양성해내겠다는 것이었다.
 
손기정이 찾아낸 인물은 당시 24세의 대학생이었던 서윤복이었다. 그는 160cm에 55kg로 마라톤을 하기에 이상적인 체격조건에, 매일 전차를 따라 15km를 달릴 정도로 성실한 성품까지 겸비했다.
 
손기정은 1948년 런던올림픽을 목표로 서윤복을 자신의 집에서 숙식시키며 함께 훈련했다. 손기정의 평생 절친 남승룡도 해방 후에 용산 철도국의 마라톤부 감독을 지내다가 다시 손기정과 의기투합한다. 그렇게 두 올림픽 전설이 뭉친 조선 최고의 마라톤 일타교습소가 탄생했다.
 
그런데 어느날, 손기정에게 베를린에서 만났던 존 켈리의 엽서가 도착한다. 손기정에게 올림픽 금메달 당시 운동화를 받아갔던 켈리가 정말로 그 운동화를 신고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며 감사를 전하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손기정을 놀라게 한 것은, 그전까지 올림픽뿐인 줄 알았던 국제 마라톤 대회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손기정은 곧장 선수단을 이끌고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결심한다. 당시는 1947년으로 해방은 됐지만 아직 대한민국 공식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이었다. 손기정은 미군정청을 찾아가 사정한 끝에 여권 대신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손기정 일행은 하와이에서 증명서를 새로 발급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위기를 맞이했으나, 다행히 하와이에서 거주하던 교민인 민 목사의 도움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보스턴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보스턴에서도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마라톤 대회를 준비했다. 손기정 감독과 교민들은 10km 지점마다 '인간 이정표'를 세워서 선수가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교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동포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세 사람이 함께 만든 '해방된 조국의 첫 승리'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SBS

 
서윤복은 대회를 앞두고 남승룡 코치를 찾아가 뜻밖의 부탁을 한다. 당시 서윤복은 마라톤을 시작한 지 1년 밖에 안 됐고. 풀코스를 뛰어본 경험이 불과 세 번 뿐인 상태였기에, 남승룡 코치에게 조심스럽게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부탁한 것.
 
당시 36세로 은퇴할 나이가 한참 지난 데다가 스승이 제자의 페이스메이커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남 코치는 "자네가 기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함께 뛰어주겠네"라고 기꺼이 약속했다. 여기에는 선수시절 일장기만 붙이고 뛰어야 했던 한을 풀고 한국 태극기를 달고 뛰어보고 싶었던 남 코치의 의지도 작용했다.
 
그렇게 감독 손기정, 페이스 메이커 남승룡, 선수 서윤복이라는 전설의 엔트리가 완성됐다. 당시 우리 대표팀의 목표는 메달이 아닌 10위권 내 진입이었다. 상위권에 들어서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서윤복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쟁쟁한 선수들을 따돌리며 선두권을 달렸다. 28km 지점에 이르러 그의 앞에는 유럽 챔피언인 우승후보 피타넨 선수만 남았다. 해당 지점에 위치해있던 손기정은 "좋은 위치에 섰다. 그대로만 그냥 끌고 가면 돼. 조국을 위해서 달리는 거야. 그러니까 힘껏 달려야 한다"고 제자를 독려했다.

서윤복은 당시를 떠올리며 "손기정 선생이 달릴 때는 조국이 없었구나. 나의 조국 대한민국 코리아. 질 수가 없다. 거기서부터 다른 선수들 떼어놓고서 달아나는데, 그래서 내가 거기서부터 용케 선두를 섰다"고 회고했다.
 
갑자기 서윤복이 달리던 마라톤 코스에 개 한 마리가 난입하는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서윤복은 개를 쫓으려다가 넘어지면서 무릎과 팔꿈치를 다쳐 피가 흘렀다. 그 사이 피타넨과의 격차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서윤복은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다시 안간힘을 다해 뛰었다.
 
대회 최대의 난코스로 불린 2Km가 오르막길 구간인 '상심의 언덕'에 직면하며 서윤복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서윤복은 상심의 언덕에서 체력고갈로 페이스가 떨어진 피타넨과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마침내 선두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며 1등으로 올라섰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대이변이었다. 심지어 결승점을 통과할 당시 서윤복의 기록은 2시간 25분 39초. 본인 최고 기록을 무려 14분이나 단축한 기적과도 같은 결과였다.
 
한편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남승룡은 36세의 나이에 156명 중 12등을 차지하며 선전했다. 그토록 바라던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고된 훈련을 묵묵히 견뎌낸 모범생 서윤복. 제자를 위해 기꺼이 뛰어준 페이스메이커 남승룡. 기발한 작전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감독 손기정까지. 세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해방된 조국의 첫 승리'였다.
 
일장기를 달고 마음껏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던 올림픽 때와 달리, 1947년에는 서울에서 성대한 환영행사와 카퍼레이드까지 벌어졌고, 세 사람은 행복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당시 전 국민이 쏟아져나와 전국이 진동할 정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는 금의환향한 서윤복에게 발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의미에서 '족패천하'라는 글을 써서 선물했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흘러 어느덧 77세의 백발이 된 손기정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봉송주자로 나서게 됐다. 많은 이들이 고령을 우려하여 만류했지만 손기정은 뜻을 굽히지 않고 1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을 했다. 개막식 직전에는 발목을 다치는 부상도 있었다.

하지만 1988년 9월 17일 손기정은 예정대로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해 전혀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멋지게 성화 봉송 임무를 완수했다. 1936년 일본 대표팀으로 뛰었던 손기정에게 마라톤이 투쟁이었다면, 1988년 대한민국 성화 봉송 주자로 뛰는 순간은 환희였다.
 
손기정은 "나로서는 남의 나라 국기로 우승했던 내가 50여 년 후에 우리 서울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그것은 참, 성화 드는 그것이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상의 영광스러운 것이어서. 나는 너무도 기뻐서 그 기쁜 걸 표현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보스턴 마라톤 이후로도 노년까지 우정을 이어갔다. 남승룡은 평생 한국 마라톤을 위해 지도자로서의 삶을 이어왔다. 안타깝게도 남승룡은 생전 손기정과 서윤복에 가려진 '비운의 2인자', '대접받지 못한 3등'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니곤 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의 가치를 모두 평가할 수 없으며 남승룡 선수가 절대 잊혀서는 안 될 대한민국 마라톤의 전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2001년 남승룡 선수가 먼저 타계하고, 그 이듬해 손기정도 세상을 떠나며 나란히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두 사람들의 가족들은 남승룡과 손기정이 서로를 친구처럼, 형제처럼 생각하며 격의 없었던 관계였다고 회상했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한다. 마라톤도 인생도, 길고 긴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마라토너들은 절대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다. 작전을 상의할 감독과 코치가 있고,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힘을 주는 관중들. 때로는 페이스 메이커라는 동행자가 함께 뛰기도 한다. 손기정과 남승룡이 걸어온 길도, 우리 각자의 인생도, '함께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었을까.
꼬꼬무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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