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 단군로 2.9km 맨발 등정기

발바닥아 고맙다

등록 2023.05.30 14:54수정 2023.05.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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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오신날, 강화도 마니산 단군로 2.9km 맨발 등정에 도전하다 ⓒ 최진섭


얼마 전 출판인 동호회 모임에 나갔다. 10여 년 전 열심히 활동할 때는 주 2~3회씩 함께 훈련했지만 근래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1년에 한 번 송년모임이나 하는 마라톤 클럽이었다. 그런데 10년의 휴지기를 거쳐 다시 신발 끈 동여매고 풀코스마라톤대회에 나가 완주한 회원들이 있어서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3시간 10분대의 대기록을 달성한 J, 60을 넘은 나이에 4시간에 근접하는 우수한 기록을 세운 L, 이들의 무용담을 듣느라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날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사람은 마라토너가 아닌 맨발걷기가 취미인 여성 회원 K였다. 이 회원은 최근 맨발걷기에 푹 빠졌고, 어싱 전도사가 됐다고 한다. 어싱이 얼마나 좋은지 소개하는 여러 유튜브 동영상도 소개했다.

나이가 들어 무릎이나 허리가 시원치 않아 달리기가 쉽지 않았던 마라톤클럽 회원들은 어싱 예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부터 무릎에 통증을 느끼던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군대에서 배운 어싱
 
사실 나는 어싱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인 1980년대 초반에 강제로 어싱을 당했다. 강원도 원통의 3군단 직할대에서 군대 생활할 때의 일이었다. 새로 부임한 연대장은 '잘 먹고, 잘 뛰고, 잘 쏘자'라는 간판을 연병장에 세웠는데, 사병의 전투력을 높이겠다는 의욕이 높아서인지 전 부대원에게 맨발 구보를 명했다.

아침마다 하던 10킬로미터 구보 시간에 군화를 벗고 맨발로 달리게 된 것이다. 강원도의 산길엔 돌멩이 투성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구보하는 중간중간 뾰족한 돌멩이에 절뚝거리며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한두 달 지나자 발바닥이 적응을 해서 돌밭을 지날 때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뛰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맨발걷기, 어싱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문제는 집 가까운 곳에 맨발걷기를 할 흙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산책길도 시멘트로 포장된 탓에 맨받걷기에 부적절했다. 어싱 예찬론자인 K는 시멘트 포장길은 걷지 말고, 상암동 하늘공원이나 한강 샛길 등의 흙길을 걸으라고 권했다.
 
내가 생활하는 강화도 평화책방 주변에는 산책하기 좋은 농로가 많지만 모두 농기계가 다닐 수 있게 시멘트로 포장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등산로를 걷자는 것이었다. 책방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하점면의 봉천산을 걷기로 했다. 이번 5월 초부터 시작해 주 1회씩 걸었다. 건강을 떠나서 맨살에 흙과 돌에서 느껴지는 자연주의적 감촉이 좋았다.

뭔가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맨발로 등정한 사진을 페북에 올렸더니 한 친구가 파상풍 예방주사 맞고 걸으라는 조언도 했다. 파상풍?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질환이었다. 산길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함께 어딘가에 숨어 있을 못을 조심할 일이었다.
 
봉천산을 몇 차례 맨발로 걷고 난 뒤 강화도 남단에 있는 마니산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봉천산(291m)과 마니산(469m)은 다른 점이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시간도 마니산이 두 배 가까이 되지만 마니산은 관광객이 많은 산이라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봉천산에 오르면 마주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나 많아야 두세 팀인데, 마니산은 그렇지 않을 것이 뻔했다.
 
단군로 끝에는 맨발등정 장애물이
 
5월 27일 부처님오신날 아침, '날씨'를 검색해보니 강화 지역엔 12시 이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떴다. 작은 우산을 배낭에 챙겨 넣고 마니산으로 향했다. 8시 전인데도 마니산 주차장엔 대형버스와 승용차가 수십 대 보였다. 나야 강화도 안에서 왔지만 대부분 다리 건너 외지에서 왔을 텐데 참 부지런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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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등산로 입구의 이정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단군로 능선길로는 정상까지 2.9km의 거리이다. ⓒ 최진섭

 
매표소를 지나 양 갈래로 나뉘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해서 이정표를 봤다. 좌측은 1004개의 계단이 있는 1코스(2.4 km)이고, 왼쪽은 바다를 바라보며 오르는 단군로 능선길 2코스(2.9km)이다. 단군로로 올랐다.
 
단군로 초입에서 겉으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밟은 채 인증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왼발, 오른발, 그리고 양발의 인증샷을 등산로 입구, 중턱, 정상에서 찍으리라 마음먹었다. 중턱쯤 오르니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가 틀린 건가? 아니면 이것도 고지대라고 날씨가 변화무쌍한 것인가?

발바닥에 흙이 묻어나고, 돌에도 물기가 스며드는 탓에 흙길과 돌의 기운을 육감(肉感)적으로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 날씨 맑은 날에 다시 한번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래도 비 맞으며 맨발 등산하니 자연인 기분은 더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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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정상을 앞두고 설치된 3백여 개의 인공계단. 고무판을 고정하기 위해 박은 수천 개의 못이 맨받걷기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 최진섭

 
그런데 비보다 더한 난관에 봉착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니산 정상을 앞두고 막판엔 300여 개의 인공계단이 설치됐는데, 계단 한 칸 한 칸에 붙여놓은 고무판에 숱하게 못질을 해놓았다.

저 계단에 박아놓은 수천 개의 못 중에 대가리가 떨어져 나간 못이 몇 개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파상풍'이 떠올랐다. 등산화를 다시 신을까 생각도 했지만 오늘의 목표는 맨발로 등정하는 것이기에 그냥 오르기로 했다.
 
3년 넘게 참성단 출입통제
 
내딛는 맨발 아래쪽을 조심조심 살펴가며 계단을 올랐다. 맨발걷기 전에도 등산을 다니면서 인공계단에 불만이 많았다. 매우 위험한 곳이나 산림 훼손을 예방할 필요가 큰 곳도 아닌데 인공계단을 설치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인공계단은 미관도 해치고, 자연을 느끼며 걷는 맛도 떨어지게 하는데 말이다. 안전불감증도 문제지만 과도한 안전염려증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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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참성단 바로 아래 붙어 있는 출입통제 플래카드. 안전사고 예방 명목으로 참성단은 수년 째 출입금지 상태다. ⓒ 최진섭


계단을 다 올라와 참성단 쪽으로 향했는데, '출입통제' 안내문이 보였다.

'출입 통제 –문화재 보호 및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이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 플래카드는 3~4년 동안 저 자리에 붙어 있었다. 처음엔 무슨 공사를 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근래 3년 동안 열 차례 가까이 마니산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보수 공사 하는 걸 못 봤다. 그럼 코로나 때문인가? 그것도 이유가 되기 어려웠다. 전에 무슨 안전사고가 있었나?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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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등산로 입구 개천마당에 설치된 참성단 모형물. ⓒ 최진섭


하여간 출입통제 조치로 오늘의 맨발등정은 참성단 바로 밑에서 멈춰야 했다. 참성단을 바라보며 단군할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의 나무 꼭대기에서 까마귀가 씩씩한 울음소리를 냈다. 혹시 삼족오인가? 까아악~. 마니산 꼭대기 바위에앉아 맨발 등정 기념으로 양 발을 촬영했다. 발바닥아 고맙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맨발걷기 #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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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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