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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도 숭고한 삶, 아버지라는 자리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를 읽고

등록 2023.04.03 09:52수정 2023.04.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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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나는 이제 정말 부르주아구나>> 라는 생각과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나중에 첫 발령을 기다리며 여름을 보내면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이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다. 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 -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1984BOOKS. p18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쓴 책인 <남자의 자리>를 읽었습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고 문장들도 담백하고 수수하기에 금세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달 사이 두 번 읽어보았어요. '금세' 읽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어쩐지 천천히 읽게 되고, 읽다가 자꾸 멈추게 되는 책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을 씁니다. 이 글쓰기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딸의 삶에 미친 아버지의 영향과 흔적을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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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책 '남자의 자리'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 책 '남자의 자리'를 읽었습니다. ⓒ 조은미

 
책은 시간 순으로 쓴 것이 아니고 생각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생각의 전환이 있거나 다른 시간대로 옮겨 갈 때에는 문단 사이 여백을 넉넉히 둡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 천천히 쉬면서, 곱씹어보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글의 초안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이 혼자 뛰어다닌다. 반대로 기억의 장면들이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오게 두면,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보인다.'
-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1984BOOKS. p40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진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했고, 우리를 키워 세상에 나갈 수 있게 해준 분들이 부모이니까요.


아니 에르노도 아버지의 한 평생에 대해 쓰려고 하니 '천천히',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또한 과장하거나 감상에 젖거나 냉소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고 정확하려고 하죠.

아니 에르노가 직접 체험한 일들을 쓰는 작가이면서도 그의 글쓰기가 '사회학적 글쓰기'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최대한 객관하하며 마치 타자처럼 관찰하고 거리를 둔 채로 쓰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도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p19)'라고 결연히 말하죠.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가난한 농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자란 아버지. 학교에 갈 시간에 농사일을 도와야 했던 아버지는 농부에서 소상공인으로의 계급 이동을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카페를 겸한 상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조금씩 쾌적한 삶을 위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죠. 그리고 공부를 아주 잘했던 그의 딸은 좋은 학교를 다니고 부유한 계층의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나중에는 대학 교수까지 됩니다. 아버지는 서민 소상공인이었지만 딸은 부르주아가 된 것이죠.
 
'Y시의 중산층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내게 내 취향, 재즈 아니면 클래식, 타티 아니면 르네 클레르를 물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내가 다른 세계로 건너왔음을 깨닫게 됐다.' -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1984BOOKS. P59
 
부르주아가 된 딸이 아버지와 부딪치는 부분은 문화였습니다.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음식을 먹는 태도 혹은 말하는 방식을 지적했다(p75)'. 딸은 아버지가 틀리거나 어색한 단어를 사용하면 고쳐주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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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남자의 자리>를 읽고 나니 아버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 조은미

 
이 책을 읽고 나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고향마을에서 홀로 살고 있는 아버지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올해 여든네 살입니다. 마을 어귀 정자 같은 곳에 늙은이들이 두어 명 앉아 시간을 보내온 것이 수년째입니다.

그러나 곁에서 별 대화없이 앉아 소일하던 노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아버지는 종종 외로움을 말하십니다. 밥은 늘 급하게 드시고, 자주 술에 취하는 아버지. 그가 언젠가 세상을 떠나면 나는 그에 대해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아니 에르노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공부를 그럭저럭 해서 고향마을을 떠나 서울로 유학 왔습니다. 어린 시절 농번기에 학교를 빠지라고 하면 눈물바람이 되곤 했던 저는 이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세계에서 나왔고 중산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촌에서 태어나 평생 살았고 그 곳에서 돌아가실 겁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특히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낳아 키우기 전의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어쩌면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두어야겠다 싶습니다.

올해는 제주 4·3 사건 75주년입니다. 아홉 살에 제주 4.3으로 아버지를 잃었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려야겠습니다. 막막하고 두려웠을 어린 소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겠습니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은이), 신유진 (옮긴이),
1984Books, 2022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문학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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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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