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공훈 추서하고 기억해야

등록 2023.03.04 17:11수정 2023.03.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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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직후 나혜석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세대 여성해방론자이다. 그는 시와 소설을 통해서도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맞서서 여성의 주체성, 인간다움을 추구했던 인물로 시대와 불화를 겪었지만 100년을 앞서간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3.1 독립운동 당시 서울지역 여학생 시위를 주도했고 1923년 '제2차 의열단 대암살 파괴 계획' 당시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 하성환

 
세상 사람들은 나혜석을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그리고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시와 소설을 쓴 여성작가로 기억한다. 서양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화가, 여성해방론자, 여성작가 모두 맞는 말이다. 염상섭과 '폐허' 동인인 나혜석은 1921년 발표한 시 <노라>에서 가부장제 봉건 질서에서 신음하는 조선 여성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읊었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중략)... 나는 사람이라네. 구속이 이미 끊꼈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天賦)의 힘은 넘치네. 아! 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1913년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도쿄여자미술학교를 다닐 때 도쿄 조선인 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해 그 시절 여성들에게 강요했던 현모양처론을 비판했다. 여성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후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보다는 한 걸음 전진했지만 당대 현모양처론 역시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주의"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도쿄 유학 시절 나혜석은 아버지로부터 부잣집 명문가 남성과 혼인할 것을 종용받았다. 아버지는 혼인하지 않으면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자 나혜석은 학비를 벌기 위해 1년 동안 경기도 여주에서 교사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다시 도쿄로 떠났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혜석의 당당함과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했던 염상섭과 이광수 등 유학파 출신 남성들이 자신들의 근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신여성을 장식품처럼 이용하면서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 유학파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 문화를 탈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대 신식 문화를 접했든, 여전히 조선 사회 봉건성에 젖어있든 나혜석은 가부장제 남성들의 위선을 작품을 통해 매섭게 고발했다. 파리에서 한때 연인이었던 최린은 남편 김우영이 간통죄로 고소할까봐 나혜석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혼을 당하고 빈털터리로 내쫓겨 궁핍한 처지였을 때 최린은 나혜석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런 최린을 향해 1934년 소송을 제기했고 <삼천리> 잡지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해 가부장제 남성지배 사회의 위선을 통절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이 글에서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의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고 절규했다.


남성들이 기생을 집안에 들이고 여성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은 '풍류'를 즐기는 것이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 '화냥년'으로 매도하는 세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따라서 시대 모순에 정면으로 맞선 나혜석을 1세대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녀는 비록 시대와 불화를 겪었을지언정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나혜석이 여성해방론자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이화, 진명, 정신을 비롯해 서울지역 여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과 함께 만세 시위를 모의하고 개성, 평양까지 시위 확산을 기도한 인물이다. 그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수형생활을 했다.

뿐만 아니라 나혜석은 1921년 남편 김우영이 중국 단둥시 부영사관으로 부임하자 유석현, 김시현, 류자명, 정화암, 박기홍, 홍종우 등 의열단을 자신의 집에 드나들도록 거처를 제공하며 수없이 도왔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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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영시내 의열거리에 세운 <의열기념관> 밀양은 안동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의 2대 메카이다. 의열단 창립멤버 13명 가운데 김원봉, 윤세주, 한봉근, 한봉인을 비롯해 무려 여섯 명이 밀양 출신이다. ⓒ 하성환


권총을 베개에 숨겨두거나 1923년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 당시, 폭탄과 권총, 실탄 수 백발이 가득 담긴 가방에 '일본영사관 직인이 찍힌 표찰'을 부착해 국내로 반입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나혜석이다. 이런 사실은 유석현과 류자명, 정화암의 증언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2016년 개봉돼 750만 관객이 본 영화 <밀정>에는 기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나혜석은 등장하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총격전도 허구이지만 나혜석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 또한 허구이자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에 대한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단둥지국 창설 기념연회장에서 지국장이자 의열단원 홍종우는 신의주경찰서 고등경찰 최두천 경부를 초청했다. 그리고 단둥시 일본영사관 경찰도 초청했다. 그들은 의열단 유석현, 김시현, 그리고 황옥 경부와 거나하게 술을 마신 뒤 2차로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 가서 마시기로 했다. 그러자 인력거 밑 바구니에 조선 총독과 총독부 고위 관료를 폭살시키고 경찰서를 비롯한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할 폭탄을 실었다. 이 또한 무사히 신의주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 모두 나혜석이 뒤에서 의열단을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독립 국가 대한민국은 나혜석을 최초의 여성화가, 여성해방론자로만 기억을 한정시킨다. 역사 사실을 은폐하여 대중의 기억을 망각으로 유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을 일정한 영역으로 한정시켜 감금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와 식민 통치기구 파괴, 그리고 총독을 비롯한 식민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려던 '2차 의열단 대암살 파괴계획'(1923)은 단둥 부영사 부인 나혜석 없이는 불가능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밀정 김재진의 밀고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상하이, 톈진에서 만든 폭탄을 기차를 통해 국내로 반입한 것은 성공했고 그 배경엔 엄연히 나혜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학술잡지 <나혜석 연구>나 나혜석 관련 자료를 통해 이미 논증된 사실들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나 공훈심사과는 하루빨리 나혜석을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릴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 독립된 국가라면 마땅히 보훈처가 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다른 매체에 싣지 않았습니다.
#의열단 #페미니스트 #여성화가 #영화 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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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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