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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km 영국 종단, 시내버스로 도전한 괴짜 노인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라스트 버스>

23.02.12 12:52최종업데이트23.02.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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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 버스> 포스터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예전에 시내버스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나 여부가 잠깐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418km 거리다. KTX로는 이제 2시간 30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이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 단출한 차림으로 떠나기엔 제법 먼 거리일 테다. 일 때문에 출장을 자주 다니거나 여행 차원이라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거리일지라도 제한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겐 심리적으로나 경비상으로나 큰마음 먹지 않고는 꽤 두려운 일탈에 가까운 행위다. 그런데 이 거리의 3배가 넘는 장거리 코스를 몸도 불편한 초로의 노인이 도전한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영화 <라스트 버스>는 그 해답을 실전으로 보여주려는 기획이다.
 
한 노인이 버스 무료 버스패스로 브리튼 섬을 끝에서 끝까지 종단하는 여정에 나선다. 그 기발한 설정이 80분가량의 장편으로는 단출한 분량으로 이어진다. 톰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작은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 꼼꼼하게 미리 짜놓은 코스에 의거해 버스를 갈아타가며 이 엉뚱한 여행에 나선다. 얼핏 보면 고집스러운 표정 가득한 이 노인은 1,348km 거리를 비좁은 버스 좌석에 앉아, 때로는 선 채로 불편한 여정을 이어간다. <라스트 버스>는 딱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 그대로의 로드무비다. 현실에선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기억할 일 없을 것 같은 이 외로운 노인의 기행이 펼쳐지는 영화를 굳이 볼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노인은 왜 생고생을 사서 하게 된 걸까.
 
기발한 로드무비로 만나는 영국 동네투어
 
영화는 두개의 시간대가 교차하는 구성을 취한다. 거동도 편치 않은 초로의 톰 할아버지가 고생 꽤나 해가며 쓸쓸히 남쪽으로 향하는 현재의 여정과 1952년 당시 젊고 기운찬 톰이 이제는 그의 곁에 더 이상 없는 평생의 반려자 메리와 함께 머나먼 스코틀랜드 끝단에 정착해 생을 함께해온 순간들이 플래시백으로 만난다.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톰은 얼마 전 메리와 원치 않는 이별을 겪어야 했다. 홀로 남은 그는 이제 둘이 영국 최남단에서 출발해 최북단으로 향하며 거쳤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순례하려 한다. 그 솔로여행의 종착점은 그들이 독한 마음 품고 떠나온 뒤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던 영국 최남단 콘월의 바닷가다.
 
<라스트 버스>는 전형적인 로드무비 구성을 무난하게 따른다. 로드무비 장르가 먹고 들어가는 이점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상적인 배경이 가득한데다, 길 위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는 낯선 인연들이 풍성하다. 지극히 간단한 설정에 이런 다양한 색채가 응원군 노릇을 톡톡하게 해낸다.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을 영국의 온갖 시내버스들이 각각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정말 마이크로 마을버스들이던 게 어느새 익숙한 시내버스들로, 영국의 명물인 2층 버스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영국 대중교통 탐방기처럼 보일 지경이다. 버스여행에 '철도 덕후'처럼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해당 묘사만으로도 흥미로울 테다.
 
영화는 영국 관광홍보영상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스코틀랜드 북방 하일랜드의 거친 들판에서 잉글랜드 도시들을 경유해 대서양 해변으로 향하는 풍광은 영국 소도시 연계투어 수준이다. 주머니 사정 넉넉하지 않은데다 젊을 적에 여유 없이 치렀던 스코틀랜드로의 행로에서 묵었던 곳들 역시 흔한 관광지가 아니라 배낭여행 코스처럼 소박한지라 이야긴 작정하고 힐링 물로 가려면 아주 무난하게 끌고 가기에 좋다.
 
'버스 히어로'의 탄생과정
 

영화 <라스트 버스>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만든 이들은 그런 안전빵을 적절히 활용은 하되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는다. 1948년생 감독과 1957년생 주연배우는 그런 달달한 이야기에만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감독의 이름과 얼굴은 낯설지만 주인공 톰을 맡은 배우 티모시 스폴의 얼굴은 꽤나 낯익다. 2015년에 영국이 자랑하는 풍경화의 거장, 윌리엄 터너의 일대기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상을 쓸어 담은 <미스터 터너>의 주인공을 맡았고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장수 캐릭터인 피터 페티그루 역할을 맡았던 관록의 명배우다. 화려하게 튀진 않지만 은근한 저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곤 하는 영국영화의 저력을 닮은 연기자가 주역을 맡으니 신뢰도가 대폭 상승한다.
 
그가 연기해낸 캐릭터, 톰의 여정은 결코 황혼의 낭만과 유유자적과는 닮아있지 않다. 그는 종종 각박한 인심에 봉변을 당하고 만다. 초라하지만 그의 인생이 가득 담긴 낡은 옷가방을 소매치기당하기도 하고 무례한 차별주의자에게 폭행을 당해 위기에 처하는 아찔한 상황도 겪는다. 몰인정한 버스기사에 의해 시골구석에 강제로 내려져 길을 잃는 경험은 예사다. 게다가 그가 품었던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 재방문한 곳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회한도 겪는다. 온통 삐걱대는 병든 몸 때문에 병원신세도 자주 져야하고 공들여 짰을 여행계획은 진즉붙터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초로의 여행자를 돕는 변장한 천사들을 만나기도 한다. 텅 빈 시골에서 그대로 머무르거나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해 여생을 보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극적인 순간들이 톰에게 차례로 찾아온다. 그는 용맹한 기사처럼 기품 있는 이방의 여성이 처한 위기에 맞서고 젊은 치기에 충동적 선택을 해버린 청년에게 현장의 조언을 행하며 기댈 곳 필요한 갓 이별한 소녀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준다. 이 괴짜 노인이 여행길에서 얌전히 정해진 일정에만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시민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태도로) 행하는 배려와 '오지라퍼' 행보는 요즘 넘쳐나는 SNS '쇼츠'에서 주목받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이제 톰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며 그의 여정이 무사하길 기원한다. 각 도시의 특파원들은 톰의 여행길을 실시간 중계중이다. (그 절정은 여행이 끝나는 종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엔 '버스 노인'으로 호명되던 톰의 별명은 어느새 '버스 히어로'로 승격해 있다. 그가 선보인 노인의 지혜와 경륜, '시민'의 연대와 참여의식은 그런 당연한 품위가 소멸되어가는 현대 영국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일련의 해시태그를 유행시키며 그를 일약 SNS 스타로 등극하게 만든다. 정작 그 화제의 주인공은 휴대전화도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현대 영국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세밀화의 효용
 

영화 <라스트 버스>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노인의 고생스런 여행 목적은 말미가 되어서야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그 사연은 꽤 뭉클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다소 신파적이고 짐작 가능한 여행 이유에 대한 공감으로 이 영화의 쓸모가 끝나진 않는다. 오히려 시작점에 가깝다. <라스트 버스>가 특별히 돋보이는 지점은 지금부터 출발이다.
 
영화에서 유독 탁월한 면모는 영국사회의 현재를 생생히 묘사하는 솜씨다. 특히나 2차 세계대전 직후 대영제국의 몰락과 함께 IMF 구제금융 신세를 질 만큼 쇠퇴기를 겪었던 시절이긴 해도 과거회상 속에서 젊고 희망에 차 있던 1952년 당시 주인공들의 창창했던 시절 묘사와 여행 도중에 주인공이 겪게 되는 각박해진 인심의 대비는 반세기 동안 영국인들이 체험한 현대사와 고스란히 겹쳐질 테다. 그리고 남녀노소 누구나 길에서 만나면 알아보고 안부를 문답할 정도로 지역공동체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정취가 남쪽 잉글랜드 도회지로 내려오면서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도 시의적이다. 톰의 여정은 곧바로 영국 내 지역 특성과 무너진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한 실상 보고서로 기능하는 셈이다.
 
톰이 여행하면서 체험하는 무너지는 사회 시스템과 각박한 당대 사회상 묘사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특히 주인공을 돕거나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이들 vs 그들 자신이 큰 악당은 아닐지언정 몰인정과 편견을 행사하는 이들의 대비는 무척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가히 노장 감독과 제작진 일동이 작금의 영국사회에 전하려는 무언의 문제의식이자 호소라 할 만하다. 초라한 노인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위기의 순간 도움을 대가 없이 전하는 이들은 오히려 영국사회 내에서 신참자이거나 비주류에 가까운 이들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노인의 처지를 나 몰라라 하고 융통성 없는 매몰참을 드러내거나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흔히 전통적인 영국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건장한 백인 남성들이 맡는다. 그냥 의미 없이 설정했을 리 없다.
 
톰이 졸다가 정거장을 놓치고 황폐한 종점 슬럼가에서 방황할 때 생면부지의 노인을 발견해 따스한 일박을 제공하는 가족은 흑백혼혈 구성, 강제로 버스에서 하차당해 시골길을 헤매던 톰을 태워주고 파티에 초대하는 이들은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 버스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아랍계 여성들은 영국사회가 이제 톰과 메리가 처음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미던 1950년대와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전통과 인정을 사랑하는 영국인들의 향수는 오히려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는 역설을 선보인다. 제법 신랄한 묘사다.
 
추가적으로 시사에 밝은이들이라면 이런 묘사를 통해 브렉시트 문제나 영국 뿐 아니라 유럽 내에 팽배한 반 이민 정서, 톰의 여행계획을 핵심적으로 위협하는 공공서비스 축소와 한국사회도 점점 심화되는 신구세대 간 갈등 같은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을 추출할 수 있을 테다. 톰은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같은 그가 가진 무료승차권으로 해결 가능한 교통수단으로 영국 종단이 가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정작 프리패스로는 스코틀랜드 행정구역 내에서만 통용 가능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거란 암시가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아마 사람들의 관심과 온정이 없었다면 톰은 여행계획의 1/3도 못 채운 채 쓸쓸히 원대 복귀해야 했을 판이다. 근래 지속적으로 논쟁거리인 노인 무료교통 이용 관련 비용과 적용연령 쟁점과도 연결될만한 대목이다.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보단, 톰 같은 가난한 노인들이 바깥나들이를 하는데 공공교통수단 지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례로는 충분히 쓸 만해 보인다. 반면에 톰이 몇 차례 신세지는 말 많고 탈 많은 영국의 공공의료제도, NHS의 이점은 특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노인의 추억을 파괴하는 장면 중 하나인, 과거의 예스러운 소박한 숙소가 밴드 몇 개에도 요금을 청구하는 바가지 상흔으로 물든 풍경과는 극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진정 '영국적'인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화 제작진의 입장은 명확해 보인다.

영국 판 '노턴 1세'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
 

영화 <라스트 버스>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미국은 출발부터 민주 공화국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된 단 한명의 절대군주가 존재한다. '노턴 1세'라는 인물이다. 19세기 중반에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살았던 이 황제는 사업 실패로 망상장애를 앓던 중 자신을 미국의 황제라 자처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물론 누구도 그를 실제 군주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이 황제는 매일 도시의 이곳저곳을 순시하며 거리와 건물 상태를 점검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정무(!?)를 돌봤다. 황제의 통치력은 명목상이긴 했지만 종교 간 갈등을 화합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며 도시의 명물로 떠올랐다. 모두가 황제를 사랑했고 자진해서 공물을 바쳤다. 시의회는 노턴 1세에게 어울리는 예우를 제공하는데 동의했고 경찰들은 경례를 바쳤다. 자발적으로 황제의 품위와 생계유지를 위한 세금을 걷었는데 자유납부임에도 꽤 잘 걷혀서 황제는 말년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난 걸까 싶지만 이 광인은 남북전쟁이 벌어지던 참극 속에서 평화와 진보를 외치며 누구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군주로 남았다. 종종 황제의 권한 행사는 시정부와 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도시의 민심은 이 황제에게 줄곧 우호적이었고 노턴 1세를 알현(?)하기 위한 관광특수까지 발생해 이 낭만적인 이야기는 행복하게 결말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에는 노턴 1세 황제폐하를 기리는 행사가 계속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톰은 알고 보니 대단한 명사였다거나, 육체적 능력은 물론 지위나 권력 어느 하나 갖지 못한 노인에 불과하지만 그가 무모한 도전 과정에서 퍼뜨린 '선한 영향력'은 각박한 현대 영국에 작은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정작 노인은 충실한 여왕폐하의 신민답게 자신을 대영제국의 대항군주로 지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직 그가 노턴 1세의 행보와 '통'하는 지점은 원래라면 당장 내려야 할 잉글랜드 버스에 기꺼이 기사가 태워주는 무임승차 허용에 한정되지만 불현 듯 황제 폐하가 떠오르는 데에는 충분하다. 영화는 그 기록과 증언의 형태를 취하는 셈이다.
 
<라스트 버스>의 극적 전개는 '슴슴'하기 그지없다. 감동적인 순간이 제법 등장하지만 세상을 배배꼬아 보는 이들에겐 심드렁한 반응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박한 세상에서 가끔은 냉소 대신 온기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는 안성맞춤 그 자체다. 세상은 선한 이들의 후의와 인정으로 지탱된다는 작은 교훈극으로 이 정도 사례라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다. 게다가 행간에 감춰진 시사적 면모가 제법 풍성하다. 마치 현대영국사회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같은 사회학 영상교재로도 기능하는 효용을 갖췄다. 거기에다 감성 두 스푼쯤 태운 영국산 티 한잔과 함께 하는 오후의 여유 같은 영화다. 영국사회의 변천과정을 가족의 역사로 풀어내는 매력에 끌린다면 <스노우맨>의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려낸 자전적 원작을 영상화한 <에델과 어니스트>도 함께 보면 더 좋을 법하다.
 

영화 <라스트 버스>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작품정보

라스트 버스 The Last Bus
2021|영국, 아랍에미리트|드라마
2023.02.09. 개봉|83분|12세 관람가
감독 질리스 맥키넌
주연 티모시 스폴(톰 역), 필리스 로간(메리 역)
출연 브라이언 페티퍼(빌리 역), 셀린 존스(마틴 박사 역), 마니 백스터(앨리스 역)
제공 (주)한창인베스트
수입 및 배급 블루필름웍스
공동수입 (주)메타플로스튜디오
 
라스트 버스 질리스 맥키넌 감독 티모시 스폴 로드무비 영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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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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