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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털어놓은 4.3과 닭백숙, 장편 영화가 탄생했다

[인터뷰]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22.10.27 21:41최종업데이트22.10.2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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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에세이 <카메라를 크고 씁니다> 속 7살 소녀 양영희. ⓒ 마음산책

 
1971년 일본 니카타항, 7살 꼬마 양영희는 당황스러웠을 거다. 북송선 만경봉호엔 세 오빠가 타고 있었다. 주변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고, 부모님과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조국"을 연호 중이었다. 7살 꼬마가 꽃가루가 날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그 이상한 축제의 현장에 적응될 리 없었다. "오빠 가지 마, 싫어, 어디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조총련이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치만 줬다.

그 와중에 오빠 중 한 명을 발견했다.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 오빠가 쪽지 하나를 던졌고, 오빠 친구가 그 쪽지를 손으로 받아 내용을 읽어줬더랬다. 영화 같은, "너무나 드라마틱한" 장면이 맞다. 195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9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날 7살 소녀의 부모님도 세 오빠를 바로 그 북송사업으로 떠나보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양영희 감독은 그 장면을 트라우마이자 원체험, 원풍경으로 간직하고 자랐다.

그 소녀 양영희는 자라서 반항도 했다.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다. 이 아나키스트가 김일성을 위한 선물로 오빠들을 북에 보낸 부모와 불화하는 건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물며 북한 정권의 세습 독재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양 감독은 영화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일본으로 돌아와 30대부터 다큐멘터리스트가 됐다. 일본을 넘어 한국과 유럽 등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됐지만 그 원체험과 원풍경을 잊을 수 없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이 조총련 간부이던 아버지와 가족,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다룬 <디어 평양>(2005)이었다. 북에 사는 어린 조카 선화를 중심으로 세 오빠와 북한 이야기를 그린 <굿바이 평양>(2009)에 이어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갔다 잠시 일본에 체류하게 된 오빠와 만나는 재일조선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3)를 완성했다. 세 작품 모두 한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극영화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작이다.
 
"운명처럼 해야 한다거나 과업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죠. 그런데도 나이를 먹으니까 (제주 4.3처럼) '어떤 역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이 나의 역할이라면 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해요."

그 역할이 이번엔 제주 4.3으로 가닿았다. 그렇게 10여 년을 공들여 만든 신작이 지난 20일 개봉한 <수프와 이데올로기>다. 이 '가족 다큐' 3부작의 완결이자 제주 4.3 피해자인 어머니의 이야기는 지난해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이후 일본에서 개봉, 여전히 장기 상영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관련기사: 이 영화가 일본에 불러일으킨 제주 4.3에 대한 관심). 국내 개봉 전이던 지난 13일 재일조선인 2세 양영희 감독을 만났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담감, 그리고 영화 인생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 엣나인필름

 
"하루도 빠짐없이 부담입니다. 하루도, 1시간도 빠짐없이 부담스러운데 제 선택이니까. (가족 이야기를) 안 하면? 그럼 끝이죠. 그래서 제가 부담스럽다고 할 자격은 없는 거고. 저보다 화면에 안 나오는 가족들이 제일 부담일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했고, 특히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영화를 못 보니까."

한때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그처럼 부담스러우면서도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양 감독은 <굿바이, 평양> 공개 이후 북한 입국을 금지당했다. 자살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당시 북한을 다녀온 어머니 강정희 여사는 오빠가 "영화를 좀 보여줘야 왜 입국 금지인지 알 거 아니냐"고 토로했다는 말을 전해줬다고 한다. 우울증이, 걱정이 커질 만했다.

"최악의 경우 정말 수용소라도 가나? 조카들의 입시, 취직, 선화의 결혼까지 걱정됐다. 문제 있는 고모가 있다, 조총련의 배반자가 있다 이런 식이 될까 봐. 언론 인터뷰도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항상 걱정이기도 하고. 영화제 갈 때마다, 특히 베를린 같은 크고 북과 가까운 영화제 갈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다. 내 영화는 감독이 제 멋대로 하는 거라고, 가족은 오히려 피해자라고."

이처럼 줄곧 가족의 미시사와 부모 조국의 현대사라는 거시사를 거짓말처럼 엮어내는 영화를 만들어 온 양 감독이 이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단 한 번도 재촬영을 요구하거나 상황을 꾸미지 않았다고 했다. 가족 이야기를 찍은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원칙이었다. 그런 양 감독에게도 어머니와의 촬영은 도리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10년 세월이 훌쩍 흘렀을 만큼 말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경계심이 더 세요. 아빠가 막내딸한테 아주 약하니까. 아버지는 술 한 잔 드리면 쑥쑥 본심을 말해버리는 여지가 있고 딸이니까 타이밍도 더 잘 알고 하는데. 어머니는 술도 안 드시고 아주 나이가 드시고 생맥주 조금 드시게 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 조직이나 북한에 비판적인 말을 안 하는 건 아버지보다 훨씬 철저했어요.

그런데 이제 나이를 드시니까, 뭐라고 하나 많이 내려놓았다고 하나. 제가 '이거 영화에서 써도 괜찮아'라고 물을 정도로 본심을 많이 얘기하셨어요. 조총련 간부 이름도 나오고(웃음). 당시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는 그런 얘기는 너무 구체적이라 못 썼죠. 이후 카오루상을 데려가도 반겨주셨고. 본인이 입고 있던 일종의 갑옷 같은 걸 많이 벗으셨던 거죠."


2010년대 초반부터 5년이 넘도록 카메라에 담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러나 장편이 아닌 단편 주제로 걸맞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고, 그러면서 기억 속에 묻어뒀던 제주 4.3의 경험을 단편적으로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은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동반자가 된 일본인 아라이 카오루씨를 어머니에게 소개하고 만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직감이 들었다. 장편으로 완성할 수 있을 거란 직감. 그 직감 이후 또 5년을 들여 백숙이란 음식과 이념과 결부된 역사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교차하는, 그와 동시에 이 멀 것만 같은 인물과 소재가 만나 제주 4.3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제주 출신 재일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남자친구와의 만남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과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 ⓒ 엣나인필름

 
"지금은 남편이 된 이상한 일본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영화도 없었을 거예요. 엄마 이야기나 4.3에 대한 증언만으론 장편의 소재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엄마 증언을 10년 동안 계속 찍었는데 전반 5년의 엄마 증언만으론 편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이야기하다가 '그만 두자, 위험해'라거나 '싫어'라고 하시고. 갑자기 딴 이야기를 하시고.

카오루 상과 만난 이후 5년 동안이 중요했어요. 어머니가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인데 갈수록 더 많이 기억이 나고 또 조금씩 억지로라도 기억을 캐보니까 조금씩 얘기도 많이 나오고. 어느 순간 어머니도 4.3도 꼭 전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신 거 같고. 카오루도 어머니와 4.3 이야기를 꼭 만들어야 한다고, 중요하다고 설득해 줬어요."


돌이켜보면, 전작들 모두 일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자이니치나 북의 가족만 주요하게 다뤄진다. '양영희 월드' 속 중요 일본인은 카오루씨가 처음이다. 심지어 <디어 평양>에서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일본인 남편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 사람이 정말 가족이 된다면 이제까지 없었던 "우리 가족" 이야기가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특히 어머니가 카오루씨를 처음 만나는 영화 속 장면은 그 자체로 어색하면서 따뜻하고 정감 어린 명장면이다.

"카오루가 집에 처음 왔을 때 어머니가 백숙, 그니까 닭 수프를 만드는 장면을 찍는데 음식이 맛있게 찍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NS에 음식 사진 올리면 좋아요 많이 달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어머니가 (사위가 오면 장모가 백숙을 내주는) 그런 걸 의식해서 음식을 해주셨죠. 둘이 나란히 식탁에 앉아 마늘을 까는 장면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 장면을 찍으면서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까, 정말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다른 배경, 모든 것이 다른 두 명이 자기들이 먹기 위한 밥을 같이 만들잖아요. 장편이 되겠구나. 설마 카오루가 그 백숙을 나중에 열심히 만들려고 할 줄은 예상 못했어요(웃음). 꼬리곰탕이나, 제가 만든 호박 수프를 엄마가 참 좋아하셨지만 음식이 중심인 영화가 될까 봐 찍었다가 다 뺐죠. 또 카오루가 어머니께 요리를 해드리겠다고 도쿄에서 백숙을 몇 번이나 직접 연습을 했어요. 닭을 몇 마리나 썼는지(웃음)."


영화 안팎으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 카오루씨는 서사의 중심인물이자 양 감독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30여 개의 필명을 자랑할 정도로 활발히, 다방면에서 '프리 라이터'로 카오루씨는 양 감독이 작품에 몰두하는 동안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영화 제작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보탰다. 애정과 웃음기 어린 양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정말 귀한 사람"이었다.

"또 동성인 딸과 엄마 사이, 인터뷰와 인터뷰 사이에서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아주 완화가 됐어요(웃음). 카오루가 들어오면서 저도 엄마한테 좀 상냥해지고 엄마도 많이 웃고. 또 음식을 아주 잘 먹으니까 어머니가 아주 좋아했고요. 그래서 아주 고마웠어요. 5년을 더 찍고, 2년 동안 편집하면서 6, 7년쯤 아주 저한테 착취를 당한 거죠(웃음).

완전 상업적인 연예인 자서전도 쓰지만 지진이나 사회적인 문제도 취재해서 쓰고. 분야가 넓고 집중력 있게 빨리 쓰는 편이라서 글 주문도 항상 있고요. 근데 7년 동안 완전 저한테…(웃음). 그런 면에서 고마웠고, 정말 귀한 사람이죠(웃음)."


5.18의 <택시운전사>, 제주 4.3의 <수프와 이데올로기>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포스터. ⓒ 엣나인필름

 
양 감독이 제주 4.3을 처음 접한 건 뉴욕 유학 시절이었다.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던 서양인 교수를 우연히 알게 됐고, 그가 말하는 큰 비극의 진상을 이후 책으로 접하게 됐다. 제주 출신인 부모님 중 어머니가 두 동생을 데리고 오사카로 도망쳐 온 제주 4.3 피해자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곧바로 영화화할 순 없었다. 여느 4.3 피해자들과 같이, 어머니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디어 평양> 때 재일조선인에 대한 설명을 4분에 걸쳐 텍스트로 전달했던 기억은 지금도 그리 좋지 않게 남아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후반부 제주 4.3을 설명하는 대목을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접적인 계기는 어머니의 10대 때 사진이 없어서였지만 관객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일본 관객들은 정말 모른다. 젊은 층을 포함해 한국 관객들조차 제주 4.3을 한 번 정도 들어봤다거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4.3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입구가 바로 애니메이션이었다. 일본 관객들도 마찬가지지만 <택시운전사>를 보고 광주 5.18을 처음 알았다는 한일 관객들처럼 <수프와 이데올로기>도 4.3에 대한 하나의 관문이 됐으면 무척 기쁠 것 같다.

"일본 관객들에게도 이번 영화를 보고 제주 4.3이란 역사적 사실만 기억해도 된다고 얘기를 많이 했거든요. 걱정을 많이 했어요. 배우 연기가 아닌 천연이라고 할까. 그런 엄마의 모습과 애니메이션이 잘 융합될까 겁이 나기도 했거든요. 완성 후에 애니를 괜히 만들었다고 하면 큰일 나니까.

그래도 결심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하고 싶었고 해야될 거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꼭 그분이었으면 했던 원화 작가님께 작업을 맡겼는데, 대사는 뺀다는 전제가 있었어요. 캐릭터가 말을 하면 예뻐지고 유치해지니까. 음악도 제 전작들보다 가장 많아요. 음악이 아주 중요해서 좋은 음악감독이 작업해주셨으면 했는데, 조영욱 감독님께 너무너무 고맙죠."


눈물을 쏙 뺐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박찬욱 감독과의 인연으로 작업하게 된 조영욱 음악감독의 음악을 접한 관객들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식 그림보다 덜 자연스러운 클레이 애니메이션 느낌을 고집했다. 제주 4.3 당시 널려있는 시체들을 목격하는 등 어머니와 피해자들이 겪었던 상황들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총체적인 시각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가족을 제대로 마주보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가족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과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 ⓒ 엣나인필름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양 감독은 최근 출간된 에세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서 26년에 걸쳐 가족의 이야기를 대면한 연원을 이렇게 밝혔다. 거기에 제주 4.3이 추가됐다. 4.3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그는 "(유학 시절 이후) 제출을 안 한 숙제처럼 머리에 남아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 감독에게 "영화를 더 많이 만들라"던, "죽으면 오빠들이 있는 북에 묻어달라"던 어머니 강정희 여사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직접 보지 못한 채 지난 1월 별세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완성한 가족의 이야기는 제주 4.3으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떠났지만 양 감독에겐 든든한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인터뷰 말미, 양 감독의 동반자이자 응원군인 카오루씨에게 함께 만든 영화가 개봉하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느냐", "행복하느냐"고 물었다. "매일이 재미있습니다"란 답이 돌아왔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작업 이후, 사건 이면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서 일본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할 만큼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 놓는 사람이 됐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문이 열리는 느낌"이라고 한다. 배우 김의성, 양익준, 김윤석, 최동훈 감독 등 한국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의 이름이 줄줄이 불려 나온다. 다소 과작인 양 감독에게 "시나리오 빨리 쓰라"고 옆에서 독촉을 하겠다고 했다. 미소를 짓던 양 감독이 조심스레 차기작 계획을 들려줬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전작들보단 빨리 만들어야겠죠?(웃음) 전체 이야기는 만들어 놨는데, 내용은 비밀입니다(웃음). 우선 극영화이고요. 한국에서 찍어야 할 거 같아요. 일본영화? 한국영화? 양국 중 어떤 회사와 일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바뀔 거 같고요. 언어요? 아, 한국말, 일본말 양쪽 다 들어가긴 하겠네요(웃음)."
양영희 수프와이데올로기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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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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