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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자살여행을 떠나는 남녀의 로드무비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온 세상이 하얗다>

22.02.08 14:26최종업데이트22.02.0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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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자살'이란 행위의 복잡성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생존과 번식 본능을 가진다고 한다. 그 내용 대로라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본능을 역행하는 셈이다. 확인 가능한 자연계의 생명체 중 인간만이 자살을 감행하는 존재로 확인되고 있다. 지능이 상대적으로 높은 돌고래가 유사한 행동을 한다는 보고가 종종 올라오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우발적 행위인지 인간과 동일한 사고에 의한 결단인지는 논란이 여전히 남아 있다.(예전에 집단자살 사례로 인용되던 '레밍'은 경우가 다른 것으로 판명된 상태다.)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논의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뜨거운 화두다. 대부분의 종교에선 생명 존중 사상을 기반에 두기에 자살에 대해선 금기시하고 있지만 철학이나 사회과학 영역에선 여러 학설과 주장이 백가쟁명 차원으로 계속 대두되는 중이다. 현대로 올수록 자살률은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내에서 21세기 들어 1~2위를 다투는 최상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사회문제가 된 실정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면전쟁을 치르느라 PTSD 문제가 심각한 미군보다 자살률이 더 높다면 정말 심각한 수준 아닌가.
 
극단적 선택에 대해 흔히 당사자의 나약함을 질타하는 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경향이다. 반면에 한국사회의 공동체성 붕괴와 인간 소외, 빈부 격차 심화 등의 환경적 요인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대두되는 중이다. 사회 전반이 자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감소를 위해 다양한 정책이 취해지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계 국가들의 공통적 요소+한국사회 특수성이 결합된 높은 자살률은 아직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해당 사회문제를 대중문화 전반에서 소재나 배경으로 차용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현상이 되었다.
 
일본 후지 산 기슭, '주카이'라 불리는 원시림은 '자살명소'라는 흉흉한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 매체에서도 종종 소개되며 괴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유명한 공원 트레킹 코스일 뿐이다. 하지만 접근이 용이하기에 도로를 벗어난 구석에서 자살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점점 더 자살시도가 몰려 곤욕을 치르는 중이라 한다. 경우는 다르지만 자살을 결심한 이들이 앞선 시도가 잦은 곳을 택하는 건 국내에서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강원도 깊은 산중을 향해 자살여행을 떠나는 남녀의 여정을 담은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는 바로 그런 배경에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된 흥미로운 도전이다.
 
2_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온 세상이 하얗다>는 일면부지의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으로 함께 '자살하기 좋은' 장소를 향해 떠나는 로드무비다. 뉴스 사회면 사건사고 소식에 종종 등장할 법한 내용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익숙한 이야기를 서정적인 화면, 종종 아이러니한 유머, 간혹 냉소적 사회풍자로 다채롭게 재현한다. 중반부 이후 로드무비의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반부는 두 주인공이 만나는 도입부와 그들 각자의 상처가 구체적 해설보다는 개개인이 짊어진 마음의 짐을 관객이 직접 느끼도록 배치한다.
 
남자 '김모인'(배우 강길우)은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다. 그는 영화 시작부터 술을 거듭 들이붓는다. 술을 마시고 진상을 부리거나 고성방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묵묵히 술만 마신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살 미련이 없기에 자살을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실행을 위해 밧줄을 사오지만 기억을 곧잘 잃어버리기에 결단에 이르지 못한다. 그의 휑한 집 여기저기에는 밧줄이 감춰져 있다.
 
여자의 실명은 도무지 관객이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는 우울증에 덧붙여 허언증도 갖고 있다. 처음에는 꽃집을 하던 '연주', 다음엔 '민영', 이번에는 은행에 다니던 '민서', 누군가는 그녀를 '가영'이라 부르고, 다음번에는 '술 마시는 게 일'인 '세연'이 된다. 김모인이 하루 단위로 기억을 잃기 때문에 매일 자신을 새롭게 각인시켜도 들킬 일이 없어 보인다.
 
둘은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 술친구가 된다. 그녀는 단둘이 집에서 술 먹어도 딴 생각은 품을 기미가 없는 남자를 신뢰하며 제 집인 양 드나들기 시작한다. 둘 다 맨 정신으로는 세상을 살 자신도 용기도 없다. 의지할 데도 기댈 이도 없는 두 알코올 중독자들은 기묘한 교류를 이어나간다. 그 중간에 각자가 처한 고통과 상처의 원인을 관객이 유추할 단서가 던져지지만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이 영화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저 우리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상상하던 예비자살자들의 상태와 심리구조를 찬찬히 체감하도록 장면에서 장면이 연결될 따름이다.
 
그런 묘사 속에서 처음엔 뚜렷한 설명 없이 전시되던 장면들은 차츰 해석되기 시작하고 큰 줄거리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김모인과 그녀의 이전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상상하고 추측할 몇 개의 단서 제공으로 감독은 충분히 족하다 판단한 걸로 보인다. 그럼에도 확인되는 몇 가지 사실들은 이 둘의 한심스럽게만 보이던 일상 풍경에 다른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다.
 
김모인은 가족과의 이별 이후 술에 의지하다 얻은 알코올 중독 때문에 매일 영화 <메멘토> 속 주인공 마냥 죽을 궁리를 하고 까먹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폭력과 협박으로 그녀를 길들였던 구 남자친구에게 여전히 스토킹을 당하는 중이다. 처음엔 그저 뒤틀린 개그 캐릭터로만 비춰지던 주인공들이 실제 주변 지인처럼 뼈대가 서고 살이 차오르는 과정이 전반부를 통해 형상화되기에 관객은 그들의 사연을 비웃기보단 점차 안쓰러워하며 지켜보게 된다.
 
3_까마귀의 숲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이제 둘은 각자 혼자서는 결행하지 못하던 결단을 함께 진행하려 한다. 김모인이 자신이 죽을 곳으로 오래 전부터 정해둔 '태백'(어원을 풀이하면 '온 세상이 하얗다', 즉 영화제목으로 연결되는)을 향한 장정을 둘은 함께 출발한다. 두 주인공 간의 시니컬하면서도 풋 하고 실소가 나오게 되는 대화의 재미와 함께 그들이 여정에서 만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들과의 에피소드들이 기이한 질감의 영상 화보처럼 오밀조밀 꾸며진다.
 
이 자살 여행은 죽상으로 침묵하는 과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둘은 이것저것 기행을 일삼는다. 음주운전을 하고 죽기 전에 맛있는 걸 먹자며 계산대를 가득 채우는 먹을거리를 쇼핑한다. 그렇게 씀씀이가 크다 보니 불한당을 만나 위험에 처할 뻔, 간신히 벗어나기도 한다. 삶을 긍정하고 지키는 이웃들을 만나기도 한다. 자신들은 자살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길 위의 시간은 흐른다. 그녀는 자기의 이름이 '류화림'이라 말한다. 남자는 그 이름을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깐.
 
마침내 도착한 그곳, 김모인이 죽을 땅으로 정한 태백의 숲 속이다. 여전히 심드렁한 대화 속에서도 각자 마음의 정리를 준비하는 둘의 감정선은 영화 내내 툭 튀어나왔다 들어가듯 연출된 청춘 멜로물에 흡사한 형태 때문인지 관객으로 하여금 '어쩌면 안 죽을지도 몰라'란 일말의 기대를 품게도 만든다. 어느새 그들에게 감정을 싣기 시작했을 관객 일부의 마음은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흔들리기 시작할 테다. 그렇게 영화는 종막으로 향한다.
 
영화의 배경은 근 미래다. 영화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는데 작품 속 배경은 2023년, 남북통일이 실행단계로 접어든 2023년 근 미래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 약간의 SF-판타지적 배경을 활용해 민감한 시사 이야기들이 뜬금포로 나왔다 들어가곤 한다. 어차피 곧 죽으러 가는 이들의 대화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발언들은 때로는 그저 심드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꽤나 수위가 세다.
 
풍자의 정도가 아마 사회적 사실주의 경향 작품이었다면 작더라도 논란이 될 법한 지점들이 종종 엿보이지만 감독은 이미 속세 초탈한 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작가적 자유를 만끽하는 모양새다. 로드무비가 무작정 침잠하며 가라앉지 않게 하면서도 세태에 대해 직설적으로 투척하는 무게감이 있다. 세상의 부당한 질서와 무관심에 상처받은 데 대한 분노가 동병상련의 국제 이슈에 대해 공감하며 분개하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세상이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니냐는 일반적 체념과 냉소에 대해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류화림의 비분강개는 결국 자살률의 증가는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불러온 태백 탄광촌 역사의 기억은 이 영화가 그저 기구한 운명의 개별 주인공들의 이야기로만 해석될 수 없게 만드는 핵심 소재다. 김모인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이 듣게 되는 '까마귀 숲'의 유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 예외 경우가 아니라 누구건 현대 한국사회에서 그 희생양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려는 듯하다. 주인공들은 그렇게 세대를 이어온 슬픔과 혼란이 가득한 세상에서 버텨내기엔 너무 예민하고 지쳐버린 상태임을 보는 이들 또한 안타까워하면서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종착역, 태백의 지명처럼 "온 세상이 하얗다"는 걸 증명하듯 사방에 눈발이 휘날린다. 주인공들의 단편적 대화가 점점 잦아들면서 흰 눈이 모든 걸 덮어간다. 더 이상 관객에게 김모인과 류화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4_사회적 행위로서 '자살'자들에 대한 이채로운 시선
 

▲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세상과 삶에 지친 이들의 마지막을 기획하는 여정을 소재로 삼는 영화는 국내외적으로 아주 드물지는 않은 편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또한 그 범주 안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주인공들은 예정된 종말을 향해 각자의 삶을 곱게 개어 정리해놓고 출발한다. 이제 그만 미련 없이 순백의 상태로 고단한 삶을 마무리하고픈 이들의 복잡한 과거 사연들을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과 이해로 바라봐 주기를 의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갈 길 산적한 남북통일 첫 단계 진입도, 주변 강대국의 소수민족 탄압도, 백주대낮에 강도질에 위협당하는, 너무나 시끄럽고 이해 불가한 세상을 그저 견디고 참아내라고 하기엔 입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무관심 혹은 이기적 폭력으로 타인이 어떻게 그들을 소리 없이 내모는가에 대한 성찰은 쓰라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 작품은 '자살'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천편일률적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던 입장을 초월한다. 당사자의 결심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구하는 시선을 담은 작품으로 희소한 지점을 점유하는 기억될 만한 결과물이다.
 
주로 광고영상 쪽에서 작업해 왔다는 김지석 감독의 첫 장편임에도 <온 세상이 하얗다>는 정교하게 세공된 공예품을 감상하는 듯 전개와 함께 중심소재에 대한 탄탄한 해석과 주인공들의 캐릭터 구축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뽐낸다. 자살이라는 민감한 소재에 적절한 블랙 유머와 애잔한 동감의 정서를 버무려내는 균형감각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도 크게 어긋남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밸런스를 잘 끌어가는 연출이다.
 
기본 설정만 놓고 보면 공감하기 어려운 이해불가 캐릭터인 김모인과 류화림을 제대로 형상화해내 다른 얼굴은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독립영화계에선 검증 다 마친) 강길우, 박가영 배우의 연기력은 조화롭게 서로를 받치며 관객이 두 사람에게 보다 깊숙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나와는 동떨어진 존재로만 치부하던, 자살을 기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 속 현실' 캐릭터들이 바깥세상 내 주변의 실제 인물들처럼 연민과 애통함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두 배우는 혼신의 연기로 길잡이를 해낸다. 그리고 시니컬하지만 위트 넘치는 둘 사이 대화를 듣는 쾌감은 감독과 배우가 합심해 무척이나 공들인 티가 덕지덕지 묻어난다. 우리가 쉬 들춰내지 못하던 세상의 숨은 단면을 눈이 부시도록 끄집어낸 결실을 만나볼 차례다.
 
<작품정보>
온 세상이 하얗다 AND THERE WAS LIGHT
2020|한국|로맨스/멜로
2022.02.10. 개봉|107분|15세 관람가
감독 김지석
주연 강길우, 박가영
제작 ㈜평화사
배급 ㈜트리플픽쳐스
온 세상이 하얗다 김지석 감독 강길우 배우 박가영 배우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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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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