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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판 '사랑과 전쟁'인가, 시대 앞서간 선구자인가

[리뷰] 늦게 수입된 영화 <해탄적일천>을 보고

22.01.17 16:38최종업데이트22.01.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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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탄적일천> 포스터 ⓒ ㈜에이썸 픽쳐스

 
오래된 대만 영화가 개봉되었다. 1983년 양덕창 (에드워드 양) 감독이 연출한 <해탄적일천>이 그것이다. 만들어진 지 근 40년 만에 한국에서 관객과 만났으니 이상한 일이다.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고, 전두환 일당의 미끈한 문화정책이 빛을 발하던 때 아닌가! 1983년이면 프로야구, 씨름, 바둑 같은 오락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던 시절이다.

천연색텔레비전 보급과 통금 해제 그리고 '3S 정책'으로 유화 국면을 선보이며 학원 자율화를 목전에 둔 시점에 평범해 뵈는 대만 영화가 수입되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다. 아는 게 많은 몇몇 평론가들은 영화에 담긴 '가부장제' 비판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감독의 초점은 가부장제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선택에 무게가 실린다.

반대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1983년 혹은 그 무렵에 <해탄적일천>이 수입되었다면 어땠을까? 흥행도 미미하고,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서둘러 종영되지 않았을까?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경험과 전체주의, 군사문화와 각종 금지조치가 일상화된 나라 대만의 1980년대 선진적인 의식을 담은 영화가 한국 관객의 사랑을 받기 어려웠을 법하다.

정략결혼
 

영화 <해탄적일천> 스틸 ⓒ ㈜에이썸 픽쳐스

 
자썬과 웨이칭은 대만의 명문대학에서 의학과 피아노를 전공하는 청춘남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앞날을 약속한 연인이다. 자썬의 여동생 자리는 고3 시절부터 그들과 함께한다. 지방 도시의 의사를 아버지를 둔 자썬과 자리는 방학이면 타이베이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정거장에서 그들을 전송하는 웨이칭의 표정은 부럽고도 쓸쓸하다.

자썬이 의대를 졸업할 무렵 자썬의 부친은 아들에게 적절한 혼처를 말하고 결혼을 종용한다. 한 마디로 정략결혼이다. 장성한 아들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그걸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자썬과 그 옆에 산산조각이 난 재떨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온 청년 자썬.
 
무너진 관계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파탄을 극복하려는 웨이칭의 노력은 객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를 찾아간 자리가 집 앞에서 번번이 허탕 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략결혼으로 아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 병원을 함께 경영하는 자썬. 그리고 무려 13년 만에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로 귀국한 웨이칭.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도주와 결혼

두 사람의 오랜 동반자이자 관찰자인 자리가 어느 날 자썬에게 묻는다.

"오빠는 지금 행복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자썬. 거기에 함축된 의미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으로 들린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칠흑 같은 밤, 자리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부모가 잠자는 방을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지나 마당에 내려선다.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고 대문 밖으로 나서는 자리. 그녀가 향하는 곳은 타이베이다.

절친인 신신의 애인과 함께 온 숙맥 같은 사내 더웨이가 그녀의 목적지다. 선량하고 용기 없지만 맑고 수더분한 남자 더웨이. 그들이 집단 결혼식에 참석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높은 연단 위에 초로의 사내가 권위적으로 앉아 있다. 그자 앞에 어정쩡하지만 다소곳한 자세로 서는 두 사람. 자리가 더웨이의 손을 꼭 쥔다. '너는 내 사람이야!'

그들의 삶은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해야 하리라. 결혼 3주년 기념일 밤이 깊어가도록 더웨이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 날마다 만취 혹은 외박이 잦아지며 대화마저 단절되는 자리와 더웨이. 자리의 외로움이 깊어가고, 더웨이의 불평과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시선의 거래처 여인. 그들은 어찌 될 것인가.

남자를 자주 바꾸는 신신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의 하소연은 안타깝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행복한 결말만 보여주지, 결혼하고 나서 생겨나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아.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해탄적일천>은 결혼은 어느 것이든 파탄과 파경을 전제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런 난제를 해결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자썬과 자리의 부모
 
자썬이 예닐곱, 자리가 서너 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들을 호출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전축으로 유럽의 고전음악을 틀어놓고 자신 앞에 아들딸을 앉도록 하는 부친. 그는 여유롭고 당당하게 두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한다. 벌을 받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자썬과 그들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일관하는 자리의 투명하고 커다란 눈.
 
어느 고요한 대낮에 간호사의 몸을 더듬는 아버지와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되는 자리. 다시 그녀의 눈에 띈 부모와 간호사. 눈물 바람의 간호사에게 돈 봉투를 건네고 달래는 어머니. 어린 자리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이중성과 어머니의 무력감 혹은 무용한 헌신성이 그녀의 당찬 내면세계와 야반도주의 의지를 형성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를 살아간 대만의 숱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아버지들과 그들을 감싸고 돌아야 했던 허다한 어머니들의 고단한 인생살이가 <해탄적일천>에 가득 담겨 있다. 영화에서 낯설게 다가온 지점은 파경 직전의 자리가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엄마는 아빠한테 보호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죠?"
"네 아버지는 어린애 같아서 내가 보살펴야 했단다."

 
우리에게 영화가 남긴 것은
 

영화 <해탄적일천> 스틸 ⓒ ㈜에이썸 픽쳐스

 
166분짜리 영화를 보는 것은 상당한 고역일 수 있다. 그것도 싸구려 텔레비전 드라마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물간 외국영화를 보는 일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제목도 낯선 <해탄적일천>은 전혀 다른 감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날 해변에서>라는 영어 제목이 훨씬 더 편하게 다가오는 이 영화가 상당히 많은 것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 정략결혼과 자유결혼, 사랑의 유효기간, 행복의 조건,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시대와 환경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여성과 여성의 선택 같은 문제가 실감 나게 다가온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행복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문제를 아주 느긋한 표정과 속도로 차근차근 짚어가는 양덕창 감독의 연출은 놀라운 것이다.
 
<사랑과 전쟁>의 시청자에게 낯설지 않은 영화의 울림은 크고도 깊다. 그래서인지 <해탄적일천>이 제시하는 문제가 언제 해결될 것인지 궁금하다. 인공지능 로봇과 컴퓨터 칩의 내장 시기가 오면 사피엔스는 사랑과 결혼으로 괴로워하지 않게 될까. 늦게 개봉되어 외려 시대 앞선 감각을 갖추게 된 영화 <해탄적일천>의 현대성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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