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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반유신 투쟁에 앞장선 신현봉 신부 선종

유신독재 맞서 민주화운동...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주축

등록 2022.01.04 13:18수정 2022.01.0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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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지학순 주교 석방'을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원주 시민들 ⓒ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 원로인 신현봉(안토니오) 신부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3일 선종했다.

1930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4년 7월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자 전국의 각 교구를 돌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호소했다. 당시 고인은 원주교구의 봉산동성당 주임을 맡고 있었다.

이후 로마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 신부와 서울교구의 김승훈 신부를 비롯해, 그의 동기생들인 김택암, 양홍 신부 등이 주축이 되어 1974년 9월 23일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했다.
   
결성 당일, 원주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모여 성직자 세미나를 열고 원동성당에서 기도회를 마친 뒤 '지학순 주교 석방', '민주회복'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지학순 주교 구명운동을 계기로 출범한 것이니 원주교구 신부인 고인이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국 확장성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김승훈 신부가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해 9월 26일, 정의구현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60여 명의 신부와 2000여 명의 신자들은 '유신헌법 철폐하라', '민주헌정 회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명동파출소 앞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신현봉 신부가 연행되었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이 9월 27일 자 <뉴욕타임스> 3면에 '서울에서 2천명의 천주교 신자들 시위 재개'라는 제목과 함께 실리기도 했다.

교도소에서도 대쪽 같았던 고 신현봉 신부
 

1977년 감옥에서 석방된 직후의 고 신현봉 신부 ⓒ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고인은 1976년 3월 10일, 이른바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판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고인이 2심 법정 진술 때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자 재판장이 "뭣하는 짓이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고인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죽었기 때문에 조의를 표하는 것이오"라고 당차게 답했다.

고인은 최후진술에서도 "우리의 몸뚱이는 가둘 수 있어도 신앙과 양심은 결코 가둘 수 없다. 긴급조치로 묶인 많은 학생들을 석방하라. 나는 이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감옥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인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은 뒤 1977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 때에도 일화가 있다. 고인의 석방 소식을 들은 지학순 주교가 교도소 정문으로 마중을 나갔으나 저녁이 다 되어도 고인이 나오지 않았다.


지 주교가 교도소장에게 항의하자 교도소장은 "시국사범들은 다시는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내야지만 나갈 수 있는데, 신부님이 각서를 쓰느니 차라리 감옥에 있겠다고 해서 아직도 못 내보내고 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니 주교님이 설득시켜 주시오"라며 지 주교에게 부탁했다. 결국 지 주교가 면회실에서 고인을 만나 계속 설득한 끝에 고인은 마지못해 각서를 쓰고 나왔다고 한다.
     
이후 고인은 단양성당, 정선성당, 용소막성당 등에서 주임을 맡은 뒤 1999년 은퇴 후 원로사제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무효를 확인, 3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장례미사는 5일 오전 11시, 빈소는 충북 제천 배론성지 최양업신부기념성당이다.
#신현봉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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