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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째 쉰다" 주현이 말한 현실... K드라마 열풍의 그늘

[TV 리뷰] KBS 2TV <갓파더>

21.11.01 14:52최종업데이트21.11.0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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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갓파더>의 한 장면 ⓒ KBS

 
KBS 2TV 예능 프로그램 <갓파더>가 각기 다른 현실에 직면해있는 대한민국 대표 원로 배우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여운을 남겼다. 지난 30일 방송된 <갓파더>에는 이순재-허재, 주현-문세윤, 김갑수-장민호 등 가상 부자관계를 맺은 이들의 훈훈한 이야기가 그려졌다.
 
문세윤은 주현과 함께 앞마당 캠핑을 즐겼다.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기'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연기 생활하면서 혹시 라이벌이 있으셨냐"라는 질문에 주현은 "연기에 라이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며 우문현답을 남겼다. 문세윤이 외모 라이벌로 비슷한 이미지의 백일섭을 언급하자 "걔는 나보다 이마가 조금 덜 까져서 젊어보이는 것"이라고 답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주현은 즉석에서 문세윤에게 연기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주현은 전라도와 함경도 사투리의 미세한 지역적 차이를 직접 시범을 보여가며 설명했다. 카리스마 눈빛 연기를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문세윤이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과장된 표정을 짓자 "연기하지 마라. 연기는 안 하는 것이 진짜다"라고 지적했다. 주현은 오히려 덤덤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관록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카리스마를 표현해내며 녹슬지 않은 연기 내공을 과시했다.
 
주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서울 뚝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1990년 KBS에서 방송되어 평균 시청률 30%를 넘긴 국민 드라마였던 <서울뚝배기>에서, 주현은 코믹하고 인간미 넘치는 설렁탕집 직원 안동팔 역을 열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까지 주현의 대표적인 유행어로 자리잡은 "~걸랑요"라는 대사도 이 작품에서 탄생했다. 1990년 KBS 연기대상에서 48세의 늦깎이 나이에 우수연기상까지 수상했다. 주현은 "예전에 목에 힘주는 주인공 연기도 많이 했지만 <서울뚝배기> 안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문세윤이 "언제까지 연기하고 싶으시냐"라고 질문하자 주현은 "체력이 닿는 한"이라고 답하며 "내 운명이 다할 때까지 연기할 수 있으면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지"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주현은 최근에는 작품활동을 못한지 오래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주현은 2019년 MBC <두 번은 없다>를 끝으로 최근 2년간은 출연작이 없다.
 
81세의 주현은 "요즘은 드라마도 젊은 세대들 위주로 화제가 되고 우리 정도 나이가 되면 들어오는 배역이 한정적이다. 해봐야 아버지나 할아버지다. 그래서 공백 기간이 길다"며 원로배우들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주현은 아무래도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배우다. 그의 이름을 기억할만한 중장년층이라도 주로 1990년대 이후 <서울뚝배기>와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코믹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주현은 당시 배우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군인으로 간부까지 지낸 인텔리에 가까웠고, 연기 초창기에는 반공 드라마와 사극, 정치극에 출연하는 남성적이고 선 굵은 이미지로 대표되는 배우에 가까웠다.
 

KBS 2TV <갓파더>의 한 장면 ⓒ KBS

 
그는 이순신(임진왜란), 강감찬(강감찬), 김일성(제4공화국), 최충헌(무신), 이성재(디어 마이 프렌즈)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친근한 서민 아버지에 가까운 이미지로는 상상하기 힘든 진지하고 무거운 배역들도 능숙하게 소화했다. 주현은 출연작에서 대부분 훌륭한 명품 조연으로 주목받았던 것에 비하여 주연으로서 대박을 터뜨리거나 상복은 별로 없었어 저평가를 받은 측면이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주현은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눈물과 인생, 만남과 이별, 희노애락이 살아있는 작품에서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좋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다 죽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바람을 밝혔다.
 
한편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여전히 활발한 연기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원로배우들도 존재한다. 바로 <갓파더>에 주현과 함께 출연하고 있는 이순재가 대표적이다. 연기경력 65년의 이순재는 일정표를 공개하며 연극 <리어왕> 연습과 지방공연, 대학교 강의 등 젊은 스타 배우들 못지 않은 빼곡한 스케줄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아들 역할로 출연한 허재가 "언제 쉬시냐"고 걱정하자 이순재는 "밤에 쉬면 된다"고 쿨하게 대답했다.

88세로 현역 최고령 배우인 이순재는 "자꾸 움직여야 건강하다. 목표과 의욕이 생기지 않냐"며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를 밝혔다. "가장 행복한 죽음이란 연기하다 죽는 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이순재의 정의는 공교롭게도 주현의 어록과도 마치 약속한 듯 일치했다.

또한 이순재는 연기 활동을 이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지를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이순재는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은 암기"라고 강조하며 암기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신만의 노하우로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이름과 순서, 역사적 사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줄이 외우는 모습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절제, 솔선수범하는 연기열정은 이순재가 오랜 경력 이상으로 수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롤모델로 평가받는 이유다.

최근 K-드라마는 한류의 인기를 바탕으로 전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오히려 세대-장르적인 편중이 심해지며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안겨주는 작품은 드물어졌다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중장년층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일일극이나 주말드라마도 불륜과 막장 스토리가 대세를 이루며, 예전의 서민적인 휴먼-가족드라마나 정통 사극 등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자연히 이순재와 주현같은 세대의 원로 배우들을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나 공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배우라는 직업의 현실을 보여준 장면이다.
 
화제작 <오징어게임>에 출연하여 주목받았던 오영수의 사례는 숨어있는 원로배우들의 가치를 다시 주목하게 한다. 오영수는 오랜 연기 경력에도 불구하고 주로 연극 위주로 활동했고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로 비중이 크지 않은 역할을 맡아 요즘 세대에게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배우였다. 하지만 <오징어게임>에서 오일남 역할을 맡아 '깐부' 열풍을 일으킨 데 이어 최근에는 인기 예능 <놀면 뭐하니>에도 출연하여 적지않은 나이에 일약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오영수를 향한 뒤늦은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든 좋은 캐릭터와 스토리만 뒷받침되면 빛을 발할 수 있는 노장 배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장면이다.
 
이순재와 주현같이 언제든 기회만 주어지면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실력과 경험을 갖춘 '준비된 배우들'은 대한민국에 지금도 많다. 단지 세월의 흐름과 나이의 편견 속에 좋은 배우들이 더 이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갓파더 주현 이순재 오영수 오징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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