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등록 2021.08.20 16:03수정 2021.08.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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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의 유해가 순국 78주년 만에 봉환되어 지난 8월 18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1992년 수교 이후 우리의 봉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관계를 고려하여 유보해 오다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애국자는 국가와 국민들이 끝까지 보살피고 추모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실현하게 돼, 자랑스럽고 홀가분한 심정이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이 유튜브 방송과 SNS를 통해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홍 장군이 독립군을 학살했다' 또는 홍 장군을 두고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폄하하고 왜곡해 가슴이 아프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극우 반공주의 이념과 역사관, 독립운동 업적을 부풀리려는 일부 인사들은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독립투쟁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폄하하고 진실과 역사를 왜곡해 왔다.

다행히 러시아와 중국과 공산권과 수교하면서 1991년 이후로 학자들과 관계자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객관적인 자료를 통하여 꾸준히 연구하여 지금은 사실관계와 진실이 많이 밝혀졌다.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자유시 참변의 실체도 밝혀졌고, 홍범도 장군의 이념적인 성향도 규명되고 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한인부대인 사하린의용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충돌해 무장독립투쟁사상 최악의 비극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실체는 주도권 다툼을 위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무력 충돌. 이념형 투쟁가가 아닌 무장형 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 장군은 양 세력 간 중재역할을 하며 충돌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홍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하여 독립군 상당수를 감형하고 석방하는데 기여했다. 러시아 군 당국이 신속한 사태 수습을 위하여 명망이 높은 홍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추대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지적도 있었다. 1922년 홍범도 장군이 모스코바 크레믈린궁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은화 100루블을 수령했고, 1927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한 것도 사실이다.

원동혁명단체회의에 우리 동포들이 56명이 참석했는데, 설문조사에서 참석 목적을 유일하게 "고려의 독립"이라고 기재한 사람은 홍범도다. 홍 장군이 순국할 때까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활동은 보이지 않아,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홍범도장군은 빼앗긴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분류해야 한다.


이번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전세기적인 역사 인식의 낡은 틀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뛰어넘어, 장군의 업적을 객관적이고 진정성 있게 조명하고, 우리 조상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전향적인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공산주의자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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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을 정년 퇴직하고 현제는 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에서 해설사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세미나나 학술회의에 자주 참여하면서 소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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