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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으로 치달은 물소 사냥, 마오쩌둥 떠오른 이유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잘리카투>

21.08.02 14:13최종업데이트21.08.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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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인도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내다
 
한국에서 인도영화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여전히 '마살라 영화'다. 흔히 발리우드/볼리우드라 불리는, 봄베이(뭄바이)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힌디어 계열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도식 뮤지컬에 가까운 부류를 우리는 인도영화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인도는 대륙에 가까운 광대한 공간이고 그 내부에는 독자적 언어(인도의 공용어는 22개다!)와 문화권을 기반에 둔 다채로운 영화들의 생태계가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도 아는 이들이 적지 않은 <바후발리> 시리즈는 동남부 텔루구어 문화권의 대표작이고,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인도 권 영화 거장들의 대부분(사티야지트 레이 같은)은 비 힌디어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주로 언어 사용에 따라 여러 계열로 나누어지는 인도영화 중에서도 마살라 영화는 가장 상업영화 범주에 속하며 많은 편수가 제작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마살라 영화가 상대적으로 대중이 영화에 기대하는 부분 - '킬링타임'을 위한 액션과 신파 - 에 특화된 반면, 영화적 전통이 깊고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들에선 보다 다양한 실험과 주제 측면에서 사실주의적 작품들이 만들어지곤 하는데, <잘리카투>는 그런 예시의 최신 사례라 할 만하다.
 
<잘리카투>는 국내에선 생소한 말라얄람어 영화이기도 하다. 말라얄람어는 인도의 서남단 케랄라 지방의 공용어다. 케랄라를 중심으로 사천만 가까운 이들이 주어로 사용하며 남인도에서 가장 많은 화자가 구사하는 타밀어와 근연성이 강한 언어다. 케랄라는 인도 공산당이 오랫동안 집권하며 전국에서 가장 문맹이 적고(문맹률이 5% 이하다) 무슬림(25%)과 기독교(20%) 비율이 높은데다 공산당 장기집권의 영향으로 무신론자도 적지 않은 세속화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소득이 높진 않지만 기초 복지도 인도 내에선 상대적으로 상위권에 속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인도영화에 대한 선입견으로 해당 작품을 넘겨짚는다면 무척 당혹할 요소가 넘쳐난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영화도 불황기엔 현실을 잊기 위한 코미디나 판타지 장르가 강세를 보이고, 경기가 좋아지면 오히려 사실주의 작품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케랄라 지방에서 만들어진 <잘리카투>는 그런 속설을 뒷받침하는 느낌을 진하게 풍긴다.
 
2_그 영화, 상징과 암시가 대단하다!
 

▲ "잘리카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슈아픽처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요한의 묵시록 19장이 장식한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 세상의 종말로 치닫게 파괴와 타락을 일삼던 짐승들의 몰락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짐승'이라는 키워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짐승'은 누구인가? 우선 물리적 실체로서의 짐승, 영화 내내 도망을 다니는 물소가 있다. 물소는 끊임없이 주민들의 포위망을 뚫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 채 오직 생존본능으로 질주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물소를 죽이기 위한 단일 목적에만 합의점을 이루는 주민들의 군집이 위치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머릿수가 불어나는 주민들은 물소를 잡아서 죽이겠다는 것 외에는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며 충돌하는 존재들이다. 마치 현실사회의 계급/계층 갈등을 우화로 표현한 것처럼.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푸주한 바르키는 마을의 부자 쿠리아찬의 딸 약혼식 피로연 용도로 물소를 도축하려 하지만 물소는 도망치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물소를 놓친 바르키를 비웃으면서도 주민들은 마을 전체에 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던 푸주한의 노고에 보답하듯, 또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소를 붙잡기 위해 우후죽순 모여든다. 이들은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지만 온갖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자꾸 피해만 늘어난다.

동네 가게는 박살나고 은행은 엉망진창이 된다. 대도시 같으면 당장 추격을 중지하고 공권력 출동을 요청할 상황이지만 이 동네는 자의반 타의반 자력 구제해야 할 상황. 주민들은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점점 광란의 축제를 벌이기 시작한다. 서로 감춰두고 있던 질투와 험담이 자연스레 발화되고,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왔던 적대와 혐오가 공공연하게 표출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여러 갈등이 교차하지만 그중 대표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물소 사냥의 선두에 선 바르키의 조수 안토니와, 총을 다루는 쿠타찬은 앙숙이다. 둘은 바르키의 여동생 소피를 둘러싼 연적이자 푸줏간 지분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묵은 원한이 있다(쿠타찬은 안토니의 밀고 혹은 누명에 의해 경찰에 체포되고 마을에서 쫓겨난 과거가 있다). 안토니와 쿠타찬은 수많은 영화 속 군상들 중에서도 가장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이다. 안토니는 어떻게든 물소를 놓친 사건을 자신이 수습해서 바르키에게 인정받고 소피를 차지하고 싶다.

쿠타찬은 총을 잘 쏜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을 쫓아낸 마을로 금의환향하고 바르키와 안토니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 소피는 둘 중 강한 '수컷'을 고르려는 또 다른 욕망에 충실한 존재다. 영화 초반, 아직 물소가 탈출하기 전 평화롭던 찰나의 시간에 바르키의 푸줏간에서 펼쳐지는 갓 도축한 고기에 대한 주민들의 욕망이 마치 정육점 CF처럼 연출되는 감각적인 화면은 (물소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고기에 대한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를 암시한다.
 
중반을 지나면 어느새 소를 붙잡기 위한 공동의 목표는 뒷전이고 안토니와 쿠타찬, 두 남자는 수컷 짐승들이 서로 목숨 걸고 구애를 위해 대결하듯 사생결단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 둘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동네 무뢰배와 구경꾼들 각자의 욕망이 뒤엉켜 추격전은 점입가경을 이룬다. 물소는 잡힐 생각을 않는데, 추격자들은 각자 물소가 잡혔을 때 논공행상을 다투며 내분을 벌이기 시작한다. 원시 부족이 공동으로 사냥을 할 때 좋은 부위는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 서열 다툼의 현대적 풍자에 가까워 보이는 장면들이다. 대체 이 소동극이 어떻게 정리될지 관객은 머리를 굴려가며 정신없이 전개되는 추적자들의 질주를 계속 뒤따르게 된다.
 

▲ "잘리카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슈아픽처스

 
3_원작과 배경을 통해 보는 마오쩌둥의 그림자
 
마오쩌둥은 일찍이 그의 실천론에서 혁명가는 자신이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깊게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주류였던 모스크바 유학파들과의 치열한 당내 투쟁에서 대표적 차별 지점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 고향 호남성을 도보 여행하면서 겪었던 농민들의 사정을 체험해 자생적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반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들은 부유층의 자손들로 유학 경험을 통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자장 아래에서 이론적 배경을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라이벌들은 서양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는 깊은 편이었지만 중국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문맹의 가난한 농민들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마오쩌둥은 그 차이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의 노선을 관철시켜냈다. 인도영화 설명하는데 느닷없이 중국의 공산주의 독재자를 왜 거론하느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비록 원작을 읽진 못했어도) <잘리카투> 곳곳에는 마오쩌둥의 색깔이 진하게 배어나고 있다.
 
영화의 원작 제목이 <마오이스트>임을 감안하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사정을 통해 짐작하든 <잘리카투>는 마오쩌둥의 핵심 사상들, 최소한 그 기본 원리 정도는 이해하고 관람할 때 더욱 풍요롭게 해석될 작품이다. 물소 사냥이 거듭 실패하면서 주민들이 점차 광기로 치닫고,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하는데도 경찰은 나 몰라라 뒷짐을 지기만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물리적 폭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며 공공의 인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책무를 띤 공권력, 그를 상징하는 경찰소장은 부부싸움에 정신 팔려 주민들의 급한 호소를 외면할뿐더러, 자력구제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치한다(인도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거를 치르는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임을 감안하면 무척 역설적인 상황 설정이다). 모두가 광기에 물들어갈 때 거의 유일하게 공식 절차에 따라 정부기관에 청원을 올리려는 농민은 문맹이라 서류 작성에 애를 먹어가며 멀리 도회지로 나가지만, 행정관 관저의 공무원은 탄원서를 작성해 방문한 주민을 문전박대한다.
 
결국 공공기관과 공권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게 전무하다(그리고 그런 직무유기는 약간의 응보로 돌아온다). 평화롭던 시골마을에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사태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우고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게 만든다. <잘리카투>의 연출방식은 흔히 예술영화라 자처하는 작품들이 즐겨 구사하듯, 단순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상징화하는 게 아니다. 특히 영화 후반에 군중이 뒷북으로 등장한 경찰들에 대해 취하는 집단행동은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선동하며 인용했던 '조반유리'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인민이 들고 일어날 때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역시 같은 해에 등장했던 레쥬 리의 <레 미제라블>이 선보이는 폭발 직전의 순간들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이 들 법한 묘사다.
 
군중들의 극단적 행동은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에 익숙한 한국의 관객들에겐 낯설고 꺼려지는 풍경일 테다. 하지만 그런 난리의 결과는 긍정과 부정으로 딱딱 구분될 수 없는 성격의 존재로 묘사된다. 대중의 분노는 파국을 낳지만 때로는 그런 파괴를 통해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잘리카투>의 광기가 곧바로 그런 결론을 도출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마오쩌둥의 대표적 이론을 짙게 드리운 영화의 여러 상징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 마오주의자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단 한번 등장하는 '낙살 극단주의자'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케랄라 주는 공산당이 주 집권세력이지만 이들은 마오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 계열이며 유력 야당은 사회민주주의 좌파정당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낙살리스트'라 불리는 마오주의 정당은 인도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현재 불법화된 상황이다). 하지만 서구의 경우와 달리 3세계에서 20세기에 발생한 대부분의 사회주의 혁명과 봉기 시도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오히려 마오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과 연계해서 볼 경우 영화의 해석은 더욱 다채롭게 진행될 수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 "잘리카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슈아픽처스

 
4_종교와 사상이 부딪히며 합해지는 원초적 풍요의 영화
 

영화는 극단과 광란으로 치달은 물소사냥의 결말을 보는 이들이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연출한다. (이 또한 마오쩌둥의 모순론에서 강조되는 지점처럼) 인간 사회가 가진 근본적 모순 표출과 이를 통한 변증법적 충돌의 형상화로 볼 수 있겠다. 또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처럼 이성과 문명에서 일탈하는 원초적 카니발리즘 축제의 재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인 "잘리카투"의 기원은 넓게 보면 케랄라 지방과 동일한 문화권인 타밀나두 지방의 추수 축제 중에 벌어지는 집단 로데오 경기의 명칭이다. 한 명이 재주를 뽐내는 식이 아니라 군중이 몰려들어 소를 붙잡는 형태이기에 대단한 풍경을 형성한다고 한다.
 
제목의 유래처럼 CG로 도배하는 근래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는 막바지 군중 장면은 실로 압권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표현주의 이미지로 연출되는 해당 장면은 어두운 밤에서 어스름한 새벽 시간에 걸쳐 물소를 몰이하던 군중들이 횃불을 치켜들고 여러 갈래에서 집결한 끝에 마치 파도처럼 흐름을 타고 한데 모인 1000명의 엑스트라를 이용해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정작 물소는 그 순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전혀 다른 장소에서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짐승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 관객의 머리를 맴돌며 각자의 답을 찾게 되는 시간이 다가온다.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추가 컷에선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암시적 장면이 짧게 등장해 엔딩 직전 영화의 마무리 군중 장면과 매치된다. 이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유물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역사발전 법칙을 소환하는 대목이다. <잘리카투>는 놀라울 만큼 지적 담론이 핵심을 구성하며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영화다.
 
영화의 모든 요소는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구성에 의해 정교히 계산되고 배치되어 있다. 케랄라 지방의 사회와 문화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오밀조밀한 내용들이 스쳐 지나가는 주민들의 대사 한 마디, 난장판 신 한 장면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농축돼 들어차 있다.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잘 짜인 음악 또한 자체의 기교보다는 영화 전반의 기조에 결합되는 방식이다. 군중들의 함성은 어느 순간 짐승 무리의 울음과 분간할 수 없게 들리기 시작하고, 울창한 남인도의 밀림에서 펼쳐지는 물소와 군중의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들은 밀실 격투처럼 대단한 몰입을 선보인다. 촬영현장 풍경이 궁금할 정도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요한의 묵시록 성경 구절은 작품 속 교회 장면들에서 다채로운 연상 효과를 발생시킨다. 쿠타찬이 안토니의 계략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나던 과거 회상 장면에서 등장하는 교회의 백단 열매만 해도, 그것이 교회의 현세적 물욕 추구인지 인도에서 고대부터 종교적 의식에서 향목으로 귀하게 대접받아온 성물로서의 가치를 표현하는지 관객은 지적 상상을 경주하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식이다(케랄라 지역의 기독교는 대부분 동방 정교회 계열에 속한다는 점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다양한 방식의 욕망 - 죄악들을 상징화한 듯싶다. 누군가는 소유욕, 누군가는 무절제와 물욕, 누군가는 성욕 같은 감정들을 표상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 욕망이 선명한 캐릭터들과 위선적인 주변 인물들의 대립이나 교차는 또 다른 비교대상이기도 하다. 물소는 그저 평화로워 보이던 마을 주민들의 잠재된 탐욕과 죄악의 불씨에 그저 기름 한 방울 부어주는 매개로 작용할 뿐이다.

혹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 어린양으로 소환되었다 해도 무방한 그런 존재다. 잘 꾸며진 액션 스릴러 추격 물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상당한 철학적 개념이 뼈대를 구성하기에 그 이질적 요소들이 융합되어가는 전개로 숨 가쁘게 달린다. 그 롤러코스터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관객이 잘 쫓아갈 수만 있다면, <잘리카투>의 영화적 쾌감은 극장을 나서고 한참 뒤까지도 꿈틀거리며 여운을 남길 것이다.
 
이 영화는 꼭 스크린으로 만나길 추천한다. 인도영화에 관한 스테레오 타입의 편견을 산산조각내고,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안일함을 뭉개버리는 원초적 박력을 목격할 수 있는 드문 기회로 기억될 만한 충격의 질주가 펼쳐지는 영화다.
 
<작품정보>
잘리카투 ஏறுதழுவல் JALLIKATTU
2019|인도|액션, 스릴러, 블랙코미디, 호러
2021.8.5. 개봉|93분|15세 관람가
감독 리조 조세 펠리세리
출연 안토니 바르게즈, 사부몬 압두사마드, 쳄반 비노드 조제, 산티 발라찬드란
배급 (주)슈아픽처스
 
2019 인도국제영화제 감독상
잘리카투 슈아픽처스 인도영화 리조 조세 펠리세리 감독 말라얄람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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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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