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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엄마의 죽음... 열아홉 소녀가 숨기려 한 이유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열아홉>

21.06.30 10:59최종업데이트21.06.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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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아홉"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1_주목할 만한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우경희 감독의 전작인 단편영화 <증언>을 퍽 인상 깊게 봤었다. 해당 작품은 직장 내 성추행에 맞서는 정규직 여성노동자와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여성노동자 간의 이중의 관계성을 교차시키며 이해와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세계관과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런 감독의 첫 장편영화는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2008년 금융위기 하에서 싸이월드 미니 홈피와 mp3 플레이어, 폴더 폰이라는 소재로 빚어내, Lo-fi 사운드로 장식한 열아홉 소녀와 소년의 "절대" 평범하지 않은 성장 이야기다.
 
(근래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창작 경향이기도 한)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며 자전적 경험과 세대적 체험을 녹여내는 영화로서 <열아홉>은 감독 본인의 해당 시기를 배경으로 맞춰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려 한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자칫하면 일종의 노스텔지어에 빠져들 위험이 다분하다. 누구나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거나, 정반대로 그것을 극단화시켜 흥미를 끌어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 속 현실에서 상당히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면서도 아직 세상과 맞서 감당하기에 버거웠던 열아홉의 기억을 또래 세대에 갇히는 체험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공감대로 풀어내는 데 일정부분 성공한 작업으로 선보인다.
 
2_<열아홉>의 기본설정과 전개  

▲ "열아홉" 포스터 영화 키워드 포스터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열아홉 소정은 임대 아파트에서 엄마와 산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빠와는 격리되어 있지만 언제 난입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다. 그리고 엄마는 몸이 편치 않다. 이 2인가구는 기초수급과 의료지원으로 겨우 연명하는 중이다. 소정에게 병든 엄마와 임대 아파트의 좁은 공간은 그녀를 옥죄는 질곡이다. 어른이 되면 이 집을 떠나 음악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픈 게 그녀의 소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2008년 9월 10일,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는 피를 토한 채 죽어 있다. 소정은 엄마의 죽음이 알려지면 임대 아파트에서 쫓겨나 아빠에게 보내진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소녀는 어디 의지할 데도 마땅히 도움 받을 곳도 없다. 일단 소정은 시신을 욕조에 옮기고 아무 일 없는 척 해보려 하지만 세상일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영화는 그로부터 한 달여 동안 소정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미니 홈피 일기장 써내려가듯 풀어나간다.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해보려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낯설고 부족한 열아홉에겐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그녀가 꿈꾸던 집의 상상도는 어느새 현실의 집과 기묘한 혼합의 풍경으로 변해 있다. 실제와 머릿속 풍경이 교차하며 소정의 의식 흐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이야기를 보완해낸다. (미술 팀 꽤나 공들이느라 고생했을) 적당한 환상성이 저예산 영화임에도 그럴싸하게 구현된다. 소정은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시간을 끌어보지만 한국의 사회복지 체계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는 구조다. 소녀는 점점 벼랑 끝에 몰린다.
 
여기에서 소녀는 소년을 만난다. 붕괴 위기의 가정에서 탈출을 꿈꾸지만 그 소년, 성현 또한 독립할 준비는 안 된 상태다. 성현은 미디 프로그램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정신적 자유를 찾는다. 소녀와 소년은 그 정서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현으로 인해 찰나의 위안을 얻었던 소정에게 이제 더 이상 현재 상황 그대로 지탱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도래한다. 그 위기의 결정적 순간에 소녀가 소년과 함께 동정 없는 세상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게 영화의 주제의식으로 형상화된다.
 
3_심심한 척 하지만 정교하게 세공된 영화
 

▲ "열아홉"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열아홉>의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줄거리만 봤을 때는 좀 긴 단편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법한 이야기란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장편의 호흡이라는 느낌을 확인할 수 있다(장편의 내용을 꽉 채운 거의 중편 분량 단편이 적잖은 현실에서 장편다운 장편이란 표현은 결코 나쁜 평가가 아니다). 소정과 성현, 두 열아홉 소녀와 소년에게 극단적으로 집중되는 이야기 전개이지만 두 배우의 연기가 영화 속 캐릭터에 잘 맞는 옷처럼 입혀져 있어서 지루하거나 식상할 틈 없이 소녀와 소년의 행보를 따라가면 된다.
 
그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감독의 청소년기 체험이기도 할 문화 코드들이 꼼꼼하게 재현되는데 이게 은근히 그저 복고적 감성만으로 그치지 않고 극중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와 시대 배경 환기에 잘 녹아들고 있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소소한 배경으로 활용되는, 성현의 가족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중산층의 붕괴나, 소정이 겪게 되는 대학진학 대신 취업으로 나갈 때 청소년 노동착취, 임대 아파트 생활에 대한 묘사 등도 군더더기 없는 쓰임새를 선보인다.
 
그런 장치들에 힘입어 영화는 주인공들이 그 나이 대에 응당 겪게 마련인,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에는 너무나 절박했던) 극한의 감정들을 배우들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충분히 되새김질하듯 구현한다. 의도적으로 계산된 속도감은 느린 것 같지만 그 연기를 음미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연출된다.
 
특히 영화 속 암울한 상황에서 정말 절실히 작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는 주인공 소정 역 손영주 배우의 얼굴과 눈빛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두려움에 떨 때와 원하는 것을 찾을 때에 극단적으로 다른 표정 톤을 선보인다. 차기작에서 또 다른 면모를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다.
 
우울한 십대말의 초상을 그리지만 영화는 그저 잔혹한 청춘의 재현과 그 광경의 소비로만 자기 용건 다 한 것처럼 끝내지 않는다. 감독은 주인공들의 미래를 염려하고 후일담을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썼을 게다. 소녀와 소년은 막막하고 두려운 거친 파도 앞에 내던져지겠지만, 혼자와 둘은 분명히 다르다. '답정너' 해피엔딩이 아니라 숨 쉴 찰나만은 남겨두는 결말의 여지 또한 중용의 미덕으로 볼 만하다.
 
<열아홉>의 결말은 요즘 독립영화 일부에서 느껴지는 경향인,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극중 인물들의 (그리고 감독 본인의) 도피성 결말과는 엄연히 다르다. 오히려 전통적인 창작윤리에 가까운, (감독 스스로) 영화적으로 창조한 극중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의 태도에 충실해 보인다. 해당 작품은 결코 드물지 않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청소년 잔혹성장담 소재 저예산 장편 영화들 중에서 소재를 소모하지 않고, 실제의 삶을 공감할 수 있게 형상화해낸 예시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한 작업이다.
 
<작품정보>
 
열아홉 Nineteen
한국|드라마|2021
2021.06.30. 개봉|86분|15세 관람가
감독 우경희
주연 손영주(소정), 정태성(성현)
출연 박희은, 최원용, 원미원, 변중희, 임호준, 이천희, 김가영, 정서인
우정출연 박강섭
제작 K'arts
배급 리틀빅픽처스
 
2021 제22회 전주 국제영화제 한국장편경쟁 상영작
열아홉 리틀빅픽처스 우경희 감독 손영주 배우 정태성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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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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