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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쟁범죄 고발 영화가 던진 묵직한 질문

[리뷰] 영화 <스파이의 아내>

21.04.03 10:57최종업데이트21.04.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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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인터내셔널(주)

 
<스파이의 아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감춰진 진실을 마지막까지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작품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는 일본 고베를 배경으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유사쿠(타카이시 핫세이 분)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 그리고 헌병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시히로 분)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켰다. 이 세 인물이 엮어가는 서사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가장 숭고한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제국주의 일본은 자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를 강요했고, 대다수 국민은 그 뜻에 따른다. 국가는 전쟁이라는 큰 과업을 수행 중이며, 국민은 전선과 본토에서 각자 나름대로 승리에 기여하고자 한다. '일체단결하여 싸우자'와 같은 구호는 공포를 자극해 두려움을 먹고 멀리 퍼진다. 공포에 질린 국민이 거리에서 일사불란하게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마치 화를 막아달라며 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고베를 담당하는 헌병대장 타이지란 인물에 대해선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낸 사토코가 어린시절과 달리 정하고 차갑게 변한 그의 모습에 많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타이지는 '국가의 발전이 곧 나의 미래'라는 투철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세뇌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 타이지는 헌병대의 임무인 조사, 협박, 고문을 스스럼없이 수행한다. 국가에 대한 의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국가가 부여한 자신의 업을 신성시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질문도 의심도 하지 않는다. 보국은 잡초를 속아 내는 것과 같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확실하게 뿌리까지 뽑는 것. 다만, 자신이 연모하는 사토코가 자신의 날카로운 칼을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남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인터내셔널


사토코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다. 남편과 함께 사는 것만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 믿음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시대의 요구에 충실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성향인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지만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것은 남편이 스파이라면 "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어요"라는 헌신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온실 속의 화초에서 딱딱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잡초가 된다. 남편 유사쿠가 만주에서 목격한 생체실험을 기록한 영상과 실험노트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자, 그 계획을 앞장서서 돕는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사토코는 드디어 남편과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뻐한다. 이렇게 사토코는 자신의 행복을 남편에게 집착함으로써 완성하려고 한다.

대의를 쫓는 인간

유사쿠는 어쩐지 독립운동가와 닮았다. 아내가 그에게 스파이냐고, 매국을 하는 것이냐고 묻자 "나는 코즈모폴리탄"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파이냐 매국이냐 따위의 굴레는 맞지 않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를 가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인류를 파괴하며 팽창하는 국가라는 괴물과 싸우는 것이다. 

유사쿠는 생체실험을 목격한 것은 자신의 운명이며 이 참상을 알리는 것은 그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업 수완이 좋아 풍족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그에게 이러한 용기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남편으로서, 사장으로서, 일본인으로서 모든 허울을 벗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지 그 자체는 어쩌면 타이지와도 닮았다. 결국 '어디로 가야 하는가'란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 더욱 중요하게 남았다.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일까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인터내셔널(주)

 
역사는 반복된다. 최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미화한 역사 교과서를 채택했다. 아직도 일본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시절에 일본인 감독 손에서 가장 민감할 수 있는 '마루타' 생체실험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왔다. 어쩌면 부정할 수 없는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는 새로운 일본의 역사 인식의 새로운 출발선을 그은 것일 수도 있다.

감독은 어느 자리에서 이에 대해 "지금 시대에도 아직 그 시대를 결착 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에서만이라도 그 시대에 결착을 지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아닐까.

더불어 영화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국가, 전쟁, 사랑, 부부, 가족 등 우리 사회가 아직도 묻고 답해야 하는 주제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영화 속 각 인물들은 국가, 남편, 정의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내 안이 아닌 밖에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감독의 특유의 절제된 연출로 이 질문들이 오히려 더욱더 강하게 와 닿는 영화였다.
스파이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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