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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티도 몰랐을 양화대교 이야기

[세상을 잇는 다리] 우리 기술로 한강에 만든 최초의 다리, 급속히 팽창하는 도시의 욕망

등록 2021.01.27 15:58수정 2021.01.2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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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대교 쌍으로 된 양화대교 모습이다. 중간 선유도에서 평면선형이 왼쪽으로 틀어진다. 다리 가운데 쌍으로 된 로제아치교 모습이 보인다 ⓒ 이영천

 
강재 보(plate Girder)를 사용한 형교 양화대교가, 한강에 우리 기술로 1965년에 최초로 만들어진다. 1982년에 그 옆에 새로 쌍둥이 다리를 놓아 길을 넓혔으니, 이 다리는 구교(舊橋)라 하겠다. 1963년에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을 넘어선다. 1970년엔 500만 명을 넘어선다. 4대문 안팎이 도시빈민들의 집단 주거지가 산등성이까지 점령한다.

기만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차수별로 수립되고 실행에 옮겨진다. 영등포·구로 방면으론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된다. 도시가 급속하게 팽창하던 시기다. 교외로는 인천과 부평, 부천 등이 커나가기 시작한다. 1966년엔 행정구역개편을 통해 서울이 대대적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이에 서울 변두리 남서부지역과 수도권 서측을 연결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그래서 만들어진 다리가 '양화대교'다.

전쟁을 대비해 만든 다리의 변신

양화대교는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강재 보의 형교로 설계되고 시공된 최초의 다리이다. 총길이 1,053m에 폭 18m이다. 상판은 강재 판형 보(steel plate girder)와 상자형 콘크리트 보(concrete box girder)를 설치했다. 하부의 기초 작업은 교각과 하상의 지반에 따라, 우물통 파일기초와 직접기초를 혼용하여 사용했다.
  

1967년 양화대교 선유도에서 본 1967년 양화대교 모습이다. 불량식품(?)이 극성을 부렸던지 그 단속반을 촬영한 사진에서 양화대교가 포착되었다. 북쪽 합정동 방향으로 '유엔탑'이라 불린 괴상한(?) 모양의 탑이 보이고, 사진 오른쪽으론 막 조성을 끝낸 절두산 성지의 모습도 같이 보인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한참 뒤에 평가된 인문지표다. 양화대교를 처음 구상하고 만든 이유는, 무엇보다 북한이 남침하였을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쿠데타세력은, 한국전쟁 때 끊긴 한강대교 하나(동쪽 끝에 광진교가 있었으나)로는, 만약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양화대교 기획은 도시 확장을 대비한 측면보다는, 인천에서 문산 방면으로 군용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키려는 군사목적이 더 강했다.

인구집중으로 도시가 확산되고, 수도권 도시들이 특히 인천방향으로 연담도시화(Con-urbanization)되기 시작한다. 양화대교는 자연스럽게 경인고속도로 시작점이 된다. 점차 활발해지는 도시 활동으로 교통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불과 15년 만에 18m 폭의 다리가 폭발직전에 직면한다. 이에 1979년에 구교에 잇대어 신교(新橋)를 만들어 폭주하는 교통량에 대비하고자 한다.
  

양화대교 북측 지금의 합정역 부근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1981년 양화대교 모습이다. 여전히 '유엔 탑'은 높기만 하고, 한강 제방이 뚜렷하다. 아직 도시고속도로도 없었고, 지금에 비하면 도로는 한산하기 까지 하다. 양화대교 좌측으로 새로 다리를 공사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신교는 1982년에 완공된다. 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한강 양안을 따라 동서로 긴 도시고속도로가 생겨났다. 양화대교 남단과 북단에도, 이들 도시고속도로와 연결된 입체교차로가 설치된다. 1996년∼2002년까지 낡은 다리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작업이 진행된다.

2010년엔 중앙 2개 경간(112m)을 해체, 단(單) 경간 로제 아치교(Lohse-Arch : 아치모양 뼈대(arch-rib)를 세워 수직의 쇠막대로 상판을 지지하는 다리. 아치를 지나는 방식에 따라 상로(上路), 중로(中路), 하로교(下路橋)로 나뉨. 양화대교는 하로교)를 설치하는 공사가 2011년까지 이어진다. 다리 밑으로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조치다.
  

양화대교 아치교 선유도에서 합정동 방향으로 놓인 양화대교 로제아치교다. 다리 미관과 한강에서 유람선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하지만 유람선이 한강에서 어떤 의미인지 개인적으론 여전히 의문이다. ⓒ 이영천

 
양화대교 중간엔 설운 역경을 견뎌낸 선유도가 있다. 다리 평면선형은 이 선유도에서 약간 꺾인다. 합정동과 양평동을 잇고 있다. 2019년 현재 일일 통행하는 차량은 15만대에 육박한다. 24시간 차량이 쉬지 않고 다니는 다리가 되었다. 끝없이 팽창을 거듭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욕망이, 양화대교에 오롯이 투영되어 있다. 다리 이름은 합정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나루터이자 조운선의 기착지이며 군사시설이었던, 양화진(楊花津)에서 따왔다.

아름다운 양화진은 어디로?

양화진은 한강에서 도성으로 드는 요충지다. 하상(河上) 교통에서는 마포와 행주나루, 강화 산이포를 연결하는 한강수운의 핵심이다. 육상으로는 양화진에서 나루를 건너, 김포·강화·인천으로 나가는 간선도로의 주요 결절점이다. 또한 삼남(三南)에서 거둬들인 세곡이 이곳 양화진에 모여 저장과 재분배가 이뤄진 장소였으며, 군사적으로 천혜의 자연지형을 활용한 방어진지였다. 도성을 먹여 살리는 곡간이었다.
 

양화진 터 도성으로 드는 물품과 세곡을 수거하고 보관하는 기능은 물론 한강으로 침범하는 적을 막아내는 기능을 하던 양화진 터 모습이다. 기단의 모습으로 보아 상당한 격식을 갖춘 건축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 이영천

   
이곳에 진대(鎭臺)를 두어 한강으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따라서 양화진을 관할하던 관청도, 제 각기 역할과 목적에 따라 주둔했다. 나루터는 어영청(御營廳)이 관리했다. 진선 10여척으로, 강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는 인편과 물자를 통제했다. 진대에 주둔하는 무관을 진장(鎭將)이라 하였다. 호조는 점검청(點檢廳)을 두어 세곡을 관리했다.

18C에 그려진 겸재의 '양화진'은 한 폭의 선경(仙境)이다. 숲이 우거진 잠두봉(蠶頭峯)과 그 옆에 양화진으로 보이는 기와집, 생활거주지였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가 가지런하게 들어앉았다. '누에가 머리를 쳐든 형상'이라 하여, 잠두봉이라 불렀다.

그 뒤로는 멀리 남산의 모습이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강가에는 늘어진 버드나무들이 유려하다. 한강에는 나룻배 몇 척이 정박해 있고, 한척의 배에서는 낚시하는 사람의 모습이 유유자적하다. 그림에 다소 과장이 있다 해도, 분명 평화롭고 멋들어진 풍경이 분명하다. 겸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아니던가?

양화진 주변에는 고관대작들의 별장이 많았다. 풍경이 아름다워 별서(別墅)를 꾸미고 휴양이나, 노후의 말년을 보내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멋들어진 정자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강 주변의 아름다운 몇몇 포구가 이와 같았다.

연산군은 이곳 양화진의 배를 이용해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긴다. 아름다운 강속 산자락 선유도가 가까이 있어 더 멋들어졌을 것이다. 뱃놀이에 동원된 배들로,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간다. 흐름이 끊긴 것이다. 연산군의 패악질로 중종 때는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턱없이 부족해진다. 이에 한강을 건너려는 경쟁이 심해져, 한꺼번에 많은 짐을 싣는 백성들로 인해 배가 가라앉는 침몰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잠두봉이 흘린 피
  

잠두봉(절두산)과 순교성지 양화진 주변 잠두봉으로 누에가 머리를 키켜든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 부터 절두산으로 부르고 있다.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 부터 본격적인 순교성지로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영천

 
양화진 옆에 있는 잠두봉을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른다. 수많은 생령들 목이 잘려나간 곳이다. '병인박해'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톈진조약(1858년 6월 애로호 사건으로 청이 러시아·영국·프랑스와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다. 러시아는 호시탐탐 만주와 조선 땅을 노린다.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시작된 시기다.

러시아의 계속되는 통상요구에, 집권세력 흥선대원군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낀다. 천주교 신자이자 승지(承旨) 벼슬까지 지낸 관리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에게 묘책을 건의한다.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즉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천주교에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던 대원군이 프랑스 신부 베르뇌를 직접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베르뇌는 지방을 순회하며 포교 중이었고, 한양에 올라오자 한 달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1865년 11월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이 불길한 소식을 가져 온 후였다. 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연합군이 청나라 수도 북경을 함락(1860년)시키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하나다. 예수를 신봉하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십 수 년 간 중국이 피로 물들었다는 소식이 둘이다. 그러자 엄청난 반천주교 정서가 도성을 휩쓸기 시작한다. 청나라도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더해진다. 이런 정황을 감지한 국내 정치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반 대원군파가 결집한다. 운현궁에 천주교 신자들이 드나든다는 소문과, 대원군이 사학(邪學 : 주자학에 반대되는 학문. 전기엔 양명학, 중·후기엔 천주교와 동학)인 천주교를 옹호한다는 비난이 드세어진다. 여기에 대원군 아들을 왕으로 옹립시켜준, 신정왕후 조 대비의 비판도 가세한다. 이에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원군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낀다. 권력을 지켜내는 길을 택한다. 천주교에 대한 종래 미온적인 태도를 바꿔, 강력한 쇄국과 척화로 방향을 급격히 전환시킨다. 1866년 정월 탄압령이 내린다.

대대적인 탄압이 이뤄진다. 천주교 신자들에겐, 죽음과 피로 죄를 씻어내야 한다는 엄포다. 신자들은 주로 해안가나 강가에서 처형을 당한다. 이곳 잠두봉에서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 나간다. 이때부터 잠두봉을 '목이 잘려나간 산'이라 해서 切頭山(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서양선교사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신자 8,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1871년까지 이어진다.

이 박해는 프랑스가 군함 7척을 몰고 와 강화도에 상륙, 문화재 등을 약탈해간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가 세워진다.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에 이곳이 천주교 성지(聖地)로 바뀌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주로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육자, 의사, 언론인 등이 안장되어 있다. 1890년 고종이 양화진 바로 북쪽에 내어 준 땅에 조성되었다. 구 한말 조선에서 활약한 한번 쯤 이름을 들어 본 많은 외국인들의 묘비가 있다. ⓒ 이영천

 
아버지가 신자들과 선교사들 목을 자른 곳에, 아들은 외국인 묘역 조정을 허락(1890년)한다. 땅까지 내어준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개신교(기독교)가 주를 이루며 교육자, 의사, 언론인 등등을 구분 짓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서양 문물과 종교를 더 이상 막아낼 엄두도 필요도 못 느낀다. 묘역은 평화롭기만 하다.

아름다운 잠두봉이 휘몰아치는 외세의 입김에 피의 동산으로 변했고, 선교에 힘쓴 이들이 영면한 곳이 되어 있다. 서글픈 우리 아픔을, 잠두봉은 아무 말 없이 끌어안고 있다. 양화대교는 하루에도 십 수 만 대 차량을 받아내느라 버거워 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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