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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주의가 능력주의를 앞서는 시대에 삽니다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대,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읽고

등록 2020.11.05 08:02수정 2020.11.0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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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인 1991년, 대학교 2학년인 나는 한 학기 동안 근로장학생으로 단과대 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도서관이라기보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책상이 여러 개 있는 열람실에 가까웠다. 나는 옛날 다방에 가면 DJ가 들어가 있을 법한 둥근 타원의 유리로 되어 있는 사무실에 앉아 가져간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책장 한 켠에 쌓여있는 학생 입학 서류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개인정보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되겠지만) 나는 궁금해서 우리 학번 기록부를 들춰보았다. 당시 재학생이 60명이었는데 10%인 6명의 현주소가 부촌으로 알려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소재 아파트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의 아버지 직업란에도 의사, 교수, 호텔 경영, 고위 공무원 등 소득 상위층이 많았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이고, 강북 끝에 살던 나는 그 속에서는 중하위 수준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 입학 기회가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당시 개인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대학생 몰래 과외'뿐 아니라 유명한 개인 강사들의 과외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0년 전에도 아니 가난한 청년을 '입주 교사'를 들이던 그 이전 세대에도 부모의 경제 능력에 따른 교육의 불평등은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학교와 교육으로 쌓은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다.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는 저서 <능력주의는 허구다>에서 우리가 가장 평등하다고 여기는 '학교와 교육이 불평등한 삶을 대물림하는 잔인한 매개체'라고 말한다. '교육은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빈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학교와 교육의 양과 질은 계층이 따라 다르며, 기회조차 차별적으로 주어진다. 이 차이는 성인이 된 후의 직업과 소득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며, 다시 다음 세대로 세습된다. 대학 또한 <불평등한 출발점>을 재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이 된 것이다.
 

능력주의는 허구다 -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 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은이) ⓒ 사이

 
능력(merit)은 개인의 특징,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때 '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비례해 보상을 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뜻한다. 진정한 능력주의 구조로 우리 사회가 돌아가려면 모두가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인생 레이스는 '개인 경주'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배턴을 물려받는 '릴레이 경주'가 되어버렸다. '인생 출발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출발점의 차이는 점점 더 누적되어 교육, 직업, 소득, 부의 격차를 만들고, 심각한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배턴'은 주택이나 땅을 비롯한 부동산, 사업체, 현금 등 유형의 자본뿐 아니라 무형의 자본도 포함된다. 부모가 쌓아놓은 인맥이란 사회적 자본,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누려온 풍부한 문화적 자원은 무형의 세습 자본이다. 이런 '차별적 특혜'는 교육과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비능력적 요인이 개인의 '능력'이 되는 것을 간과하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은 위험하다.
 
개인의 영향력 밖에 있는 불가항력적인 요인도 있다. 운이나, 태어난 시기와 같은 타이밍, 사회 구조적 변화, 국내 및 세계 경제 상황 등이다. 현재 청년들이 부모 세대에 갖는 반감이 그럴 것이다.

30년 전, 특히 공대생 경우 미리 대기업 입사를 정해놓고, 회사 장학금을 받는 학생도 많았다. 경제 성장으로 원하면 취직이 되던 시대(그 시대에도 여성은 대기업에 소외되었는데, 50대 그룹 여대생 취업률 8.6%였다 - 매일경제 1995년 7월 20일자 참고)와 경제 성장이 멈춘 현재의 청년에게 '능력'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개인이 타고난 재능, 올바른 태도, 근면 성실함, 높은 도덕성 등 중요한 '개인적 자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발견'되어야 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큰 비용이 들어가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연마'되어야 한다. 극단적인 예가 매년 수입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우리나라 K-POP의 근간 아이돌 산업이 아닐까.

다큐멘타리 영화 <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를 보면 "11살부터 시작할 수 있는 연습생은 몇 달 만에 데뷔하기도 하지만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대다수의 연습생은 데뷔를 못한다"라고 한다. 블랙핑크 4명의 멤버도 15~16살부터 하루에 14시간씩 훈련을 했다면서, 쉬는 날은 2주에 단 하루였다고 말한다.

그보다 힘든 것은 20~30명 되는 같은 또래 간의 '경쟁'이었다고 고백한다. 매달 시험에 탈락한 연습생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개인적 자질'을 갖춘 수많은 연습생도 '사회적 계층 이동'에 실패한다.
 
저자들은 그 외에도 미국은 아직도 '자수성가형 인물' '독립적인 기업가 정신'이 미국 경제의 근간이라는 낭만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의 독점 시장 지배구조 속에서 자영업으로 성공하기 매우 힘들다. 또한 성별, 인종, 성적 취향, 외모 등 고정관념에 의한 차별역시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작년 뜨거운 감자였던 조국 법무부 장관 자녀입시 논란이나 올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군 휴가 논란 모두 '차별적 특혜'에 대한 반응이었다. 개인의 도덕성 논란에 앞서 보다 근본적 원인은 현대 사회 시스템의 '모순'에서 왔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똑같은 성공의 기회를 얻고 자신이 쏟아붓는 만큼 되돌려 받는 능력주의를 찬양한다. 하지만 자신의 사유 재산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상속의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상속주의가 능력주의를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애덤 스위프트의 지적처럼 <국영보육원>을 만들어 모든 아이가 그곳에서 똑같이 생활하도록 하면 과연 해결될까? 저자들의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없는 것이 아쉬우나 결론은 의미있게 새겨볼 만하다.
 
"21세기 능력주의 신화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기에, 경제적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된 능력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부자를 칭송해서도 안 되며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비난해서도 절대 안 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 -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

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옮김,
사이, 2015


#능력주의는 허구다 #능력주의 #조국 장관 논란 #추미애 장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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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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