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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뒤늦은 사죄... 가해자 전두환의 호화로운 노후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오송회 사건

등록 2020.10.03 11:41수정 2020.10.0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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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대 초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공안 국면을 강화했다. 특히 정권 탄생의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전두환 정권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교육내용과 교육행정 전반을 철저히 통제했다. 마침내 1980년 7월 30일 전두환은 이른바 7․30조치를 단행해 교육 통제장치와 더불어 교사들에 대한 통제 감시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전두환 정권기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는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전담실'을 설치해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해 관련 정보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보안위원회'를 구성해 사립중고교 교사 채용에도 과거 대학 다닐 때의 전력을 조회하는 등 사립학교의 인사 관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에서는 건전한 비판의식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려는 교사들을 심지어 연행·구금·구속하는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전두환은 교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내용까지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당시 일간신문 기사 ⓒ 진실위 자료

 
오송회 사건은 이런 전두환 정권 시기 현직 고등학교 교사들이 연루된 대표적인 공안사건이었다. 교사들이 모여 시국 토론을 하고 4·19 혁명과 광주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제를 한 모임을 전두환은 가혹한 고문을 통해 이적 단체로 조작했다. 경찰은 "다섯(오)명의 교사가 소나무(송) 아래 모여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오송회 사건을 만들었다.

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982년 7월 20일 전북 군산시 시외버스정류소에서 버스회사 직원이 허름한 표지의 복사판 시집 '병든 서울' 한 권을 발견하고 군산경찰서에 신고했다. 군산경찰서 순경은 이 시집의 표지가 군산제일고에서 발행하는 교지의 표지임을 발견하고 그 출처를 찾기 위해 군산제일고를 내사했다. 그 결과 시집이 이 학교의 이광웅 국어교사가 복사해 만든 것을 알아냈다.

결국 1982년 11월 초 군산경찰서 대공분실은 군산제일고 교사 이광웅·박정석·전성원·이옥렬·황윤태·강상기·채규구와 군산제일중 교사 엄택수 그리고 KBS 남원방송국 조성용 방송과장을 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했다. 그리고 이들을 감금한 후 가혹한 고문 조사를 했다.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 받아낸 경찰

경찰은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10일에서 23일 동안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을 차단한 채 불법 감금 상태에서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자백'을 증거로 이들이 "이적단체를 구성하고 북한을 찬양·고무"한 것으로 조작했다.

경찰은 전주지방법원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982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전주북부경찰서 유치장에 각각 수감했고 그다음 달인 12월 13일 이들을 전주지방검찰청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1983년 4월 18일 전주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교사 박정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심하게 구타당하고 지하실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로 비행기 고문, 전기 고문을 당했다. 5일 동안에 4일을 못 자고 피로한 채 계속 잠을 재우지 않아 못 자고 있는데 (동료 교사) 이광웅이 고문을 받으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검찰 조사시 수사형사 6명이 들어와 입회를 한 일도 있다. 또 검찰 조사시 경찰에서 이광웅이 진술했다면서 종이 쪽지에 내용을 기재해 와서 맞추어 쓰라고 해 며칠씩 잠도 못 자고 지친 상태이고, 또 어떤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써주었다.

1982년 12월 중순의 검찰 조사와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교사 황윤태는 "경찰의 추궁에 못 이겨 없는 사실을 지어서 이야기 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윽박지르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고, 검찰 조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협박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1983년 2월 21일 전주지법 3차 공판에서 교사 이광웅은 "전부 경찰에서 모진 고문이 뒷받침 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검찰에까지 연장된 것이다. 전기 고문, 비행기 고문 등이 있었다. 검찰에서 조사받을 당시 경찰관을 불러서 수사 기관으로 되돌아가 고문이 시작될 것 같은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경찰 조사시 정부를 전복할 수 있는 작문을 써보라고 요구해 작문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1983년 4월 18일 6차 공판 등에서 교사 채규구는 "(경찰에서) 항의하다 지하실에 끌려가 맞기도 했다. 불러주는 대로 수도 없이 반복해 같은 내용의 자술서를 썼다. 수사관이 기억에도 없는 사실을 쓰라고 해 기재한 것이다. 대공분실에서 주먹과 발로 폭행을 당한 사실이 있다. 폭행을 말렸던 수사관도 있었다. (처음에) 여인숙에서 조사받을 당시에는 회유와 협박 등이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또 위와 같은 공판에서 교사 전성원은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고, 검찰 조사시는 경찰관 5명을 불러 대질 신문을 시켰다"라고 진술했다.

2007년 1월 16일 진실위에서 교사 이옥렬은 당시 "경찰에서 비행기 고문을 한 번 당하고 여러 날 시달렸다. 대공분실 지하실에서는 통닭구이, 물고문을 당했다"라고 회고했다.

지난 2007년 1월 11일 진실위에서 교사 강상기는 당시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통닭구이, 물고문을 당했고 검찰조사 시 수사 경찰이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진실화화해위는 오송회 사건이 독재정권의 불법연행과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1978년 여름 조성용(뒷줄 가운데)씨가 군산제일고 교사로 재직할 당시 이광웅(뒷줄 오른쪽) 박정석(앉은 사람) 교사 등과 함께 고창 선운사를 방문했다. ⓒ 오마이뉴스

 
이 사건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람에는 당사자인 교사들뿐 아니라 참고인인 제자 학생들도 있었다.

2007년 2월 26일 진실위에서 참고인 강웅순은 당시 "수사관으로부터 구둣발과 경찰봉으로 무수히 구타당했으며 무릎이나 손 등이 모두 퍼렇게 멍이 들었다. 여인숙에서 조사받을 당시 잠을 하루에 2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하게 해 몽롱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라고 진술했다.

2007년 3월 7일 진실위에서 참고인 박두술은 당시 "수사관이 뺨을 수차례 때리며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라고 진술했다. 같은 날 진실위에서 참고인 하영춘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수시로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으며, 심지어 의자로 서너 차례 때렸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또 다른 참고인 고환규는 "검찰 조사시 검찰수사관으로부터 북한 노래를 세 차례 들었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당했다"라고 진술했다.

경찰이 경찰의 고문 증언

1982년 당시 군산경찰서에서 근무하던 김아무개 경장도 지난 2007년 3월 진실위에서 이들이 받은 가혹한 고문 사실을 이렇게 교차 검증해 주었다.
고문을 직접 목격한 사실은 없으나, (교사) 전성원이 전북도경 대공분실 지하에 다녀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진 맥진하는 걸로 봐서 고문을 받고 온 것으로 생각했다. 여인숙에서 조사할 때 한번 정도 대공분실 직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온 적이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나 돌아온 (교사) 황윤태의 모습이 축 처진 모습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으며 맥이 탁 풀린 모습을 하고 있어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것으로 생각했으며... (중략)

당시 (경찰) 신아무개는 피의자들이 오면 각목이나 몽둥이, 진압용 경찰봉 등으로 사정없이 때린다, 피의자들을 조사하는 방에 한 번씩 들어가서 제대로 진술을 안 한다고 생각되는 피의자에게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가끔 신아무개의 지시로 (교사) 이광웅이나 다른 피의자들을 지하조사실까지 데려다주곤 했는데 그때 신아무개가 경찰봉이나 손, 발 등으로 구타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이들이) 처음 자술서를 작성할 때는 며칠씩 잠을 안 재우면서 조사를 한다. 자술 내용도 원하는 내용이 완성될 때까지 수십 번 작성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광웅이 지하조사실에 갔다 온 뒤 지하에서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부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고, 어떤 피의자가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을 때 신아무개가 주전자를 들고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피의자들이 지하실로 내려가면 피의자들의 비명소리와 신아무개, 박아무개의 고함소리가 섞여 들렸다. 고문이 끝난 뒤 신아무개가 피의자들에게 '너 똑바로 진술해, 안 그러면 다시 데리고 와서 당할 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다.
 
이런 고문 조사에도 당시 사건을 송치 받은 전주지검은 전북도경 대공분실에서 심각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게다가 검사들은 오히려 피해자들을 장기간 구금해 고문한 경찰 수사관들이 입회해 배석한 상태에서 피의자 신문 조서를 작성한 뒤 전주지법에 기소했다.

그 결과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 이광웅 등 9명은 1978년부터 1982년에 걸쳐 북한 찬양, 국외공산계열 찬양, 반미 발언, 반정부 발언, 이적단체 '오송회' 결성 등을 했다는 이유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이광웅이 재직하던 군산제일고의 교장과 교감은 둘 다 파면당했다. 그뿐이랴! 전북교육감과 전북교육위원회 간부들까지 모조리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징계를 당했다.

전두환의 질책 후 뒤집힌 판결

1983년 5월 24일 전주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이광웅(징역 4년), 박정석(징역 3년), 전성원(징역 1년) 3명이 중형의 실형을 선고받고 6명은 선고 유예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런 중형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두환은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어 "사회 불안, 정치 불안 요소에는 과감히 대처하라"라면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질책했다.

그 결과 1983년 7월 28일 광주고법의 이재화 판사(1935-2020)는 이광웅에게 징역 7년 등 3명의 형량을 대폭 늘렸다. 그리고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던 6명도 징역 2년 6개월에서 1년씩 선고해 모두 법정 구속했다. 그러면서 이재화 판사는 이렇게 판결문을 읽었다.
 
이광웅 등 피고인 9명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직책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북을 찬양하는 불온 서클인 오송회를 조직하고 동료 교사들과 제자 등에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대학 교육을 마치고 교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공산주의 사회를 동경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없이 변명만 한다.

이어서 전두환의 질책대로 대법원 또한 피해자들의 상소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을, 전두환의 '명을 따라' 1심보다 중형을 내린 2심의 이재화 판사는 그 후 서울가정법원장, 대구고법원장을 거쳐 헌법재판소 재판관(1993-1999)을 지냈다.
 

오송회 사건으로 강제해직됐다 24년 만에 복직한 조성용씨. ⓒ 박주현

한편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피해자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7년 형을 살고 출소한 교사 이광웅은 고문 후유증과 암에 시달리다가 지난 1992년 불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출소 후 교사 전성원은 가족들을 데리고 저주의 땅인 전두환 공화국을 떠나 아예 미국으로 이민 갔다.

교사 채규구는 출소 후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해고와 생활고, 억울한 옥살이보다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고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피해자들의 자녀들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이웃과 사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생계비와 학비 마련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지난 2006년 5월 12일 박정석 등 9명은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며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07년 6월 12일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국가는 위법한 확정 판결에 대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찰, 검찰, 법원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 감금 및 가혹행위, 자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및 증거재판주의에 위반한 유죄 판결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련기사] 목숨 걸고 시대와 대결했던 이광웅 선생(http://bit.ly/8oCzn)

사죄 없는 가해자 전두환의 호화로운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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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자택 나서는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27일 오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2020.4.27 ⓒ 연합뉴스

 
위와 같은 진실위 결정을 근거로 피해자와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11월 25일 사건 발생 26년 만에 광주고법은 오송회 사건 관련자 9명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 3인의 법관은 한 치의 이견 없이 무죄를 선고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경찰과 검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 등이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 피고인들이 정부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교환하고 4·19 행사를 치렀더라도 그 내용만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판결에 이어 이한주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에게 법원의 이름으로 이렇게 사죄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다. 어떤 정치권력이나 이익단체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책무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마침내 26년 만에 법정에서 피해자들 전원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정에서 이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나간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한편 이 사건의 총체적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전두환. 그는 지금까지 피해자들에게 한 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로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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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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