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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가루와 흰눈 섞어먹었다" 하루 120km 행군한 독립군들

[새로 쓰는 독립군사 18] 독립군의 행군과 식량

등록 2020.08.24 10:26수정 2020.08.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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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높고 낮음과 때의 밝고 어두움을 몰랐으며, 달려도 숨찬 줄을 몰랐다."

신흥무관학교·고려혁명군관학교 교관이던 김승빈의 회고다.(주1) 밤낮을 막론하고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며 달릴 정도로 빠르게 행군해도 힘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곳에 독립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발'은 독립군의 또 하나의 무기였다.

3.1혁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남북만주 모든 독립군단은 강행군 훈련을 실시했다. 등에 돌이나 흙을 지고,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빨리 행군하는 훈련이다. 산악지대를 이용한 국내 진입 작전, 전술적 장거리 행군 등에 빠른 행군은 필수였다.

식량까지 짊어지고 국내 진입한 독립군 

근대 야전(野戰) 행군에서 1인의 짐은 31Kg(70파운드)을 넘어선 안 되고, 하루 정상적으로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 거리는 32Km라는 군사적 주장이 있다. 짐(군장)에는 무기, 군복, 장비와 함께 10일 정도 식량이 포함돼야 한다고 전쟁사 연구가 존 키건(<세계전쟁사>)은 말했다. 작전 때 보급부대가 없으면 식량을 지니고 행군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내에 진입해서 오래 작전하는 독립군 부대는 식량을 가지고 진입해야 했다.

1921년 6월 10여 명 독립군이 벽동군에 진입해 일경 파출소를 공격했다. 1명이 전사했는데 전형적인 독립군 군수품을 갖추었다. 복장은 중국 군경 복식에 계급장(襟章과 肩章)을 붙이고 '광복군단(光復軍團)'이라 새긴 군모를 착용했다. 허리에 배낭이 있었는데 그 속에 수통과 빵, 밀가루가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21.7.10.). 배낭 속에 식량을 넣어 행군했던 것이다.

많은 대원들과 함께 국내에서 작전하는 부대는 '천막, 수통, 반합, 침낭, 나팔, 쌍안경'을 지니고 탄환도 200~300발씩 보유했다. 그들은 정규 의용군으로 국내에 진입해 주재소 등 일제 기관을 공격했다. 침낭 등 장기 행군을 위한 군수품을 갖췄고 식량도 가지고 다니며 반합을 이용해 식사했다.


1927년 초산 약수령에서 참의부 군인 6명이 일경과 교전하다 퇴각했다. 그곳에 천막 3개, 배낭 1개, 도끼 1자루, 솥 1개, 좁쌀과 백미 등이 있었다(<동아일보> 1927.9.4.). 그곳은 독립군 숙영 근거지였다. 숙영 물자 가운데 솥, 좁쌀, 백미가 있으므로 이들을 가지고 다니거나 숙영지에 둔 상태로 작전을 하고, 작전 뒤 이곳에서 숙영했던 것이다. 총, 탄환, 천막, 식량 등까지 합하면 가볍게 행군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산림지대를 신속하게 움직이며 적과 교전하고 또 적의 추격을 따돌린 것은 행군 훈련이 몸에 익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례가 많진 않지만, 국내 진입 부대가 밀가루와 백미, 좁쌀, 빵 등을 지녔는데, 만주에 주둔하는 독립군의 식사보다 낫다. 이곳 독립군 주식은 조밥이었다. 광복군총영 군인은 한 달 10원 안팎 식권으로 동포 집에서 식사를 했다. 조밥 10전, 쌀밥 20전(한철수, <나의 길>)이니 사실 조밥만 먹게 된다. 통의부와 정의부 시기에도, 조밥과 쌀밥을 혼용하고 아주 가끔 소를 잡아 부족한 영향을 보충하기도 했지만, 주식은 조밥이고 그나마 풍족하지 않았다. 북만주 독립군 식사도 같았다.

백미와 밀가루 보급은 국내 작전 부대를 우선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항일'부대'의 상징인 군복도 넉넉하지는 않았고 군수과에서 보급하면 국내에 진입하는 부대에 우선 지급했다.

적은 인원이 국내로 진입할 때, 또는 군자금을 모집하는 모연대(募捐隊)는 동포 집에 부탁해 식사하기도 했다.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거나, 없을 때 그렇게 했다. 1924년 7월 의주군에 2명의 통의부 독립군이 진입했는데 일경과 교전하다 1명이 전사했다. 적은 인원이므로 작전목표가 주재소 공격이 아니고 적정(敵情) 정찰과 군자군 모집이었다. 전사한 상병(上兵) 수첩에 조밥 한 끼에 얼마를 지불했다는 내용이 있었다(1924.7.13.). 동포 집에서 식사하고 식대를 지불했던 것이다. 당시 기사에는 독립군이 국경 지대 동포 집에서 식사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식량을 휴대하지 않고 활동하던 독립군 상황을 전한다. 독립군은 동포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식대를 지불했다.
  
길도 없는 산악지대 통과해 행군한 독립군들 

만주, 노령의 전투 때 행군은 근대 전쟁사에서 '1일 한계거리'라고 한 30여 킬로미터를 훨씬 넘기도 했다. 그것도 일반 도로가 아니라, 적과의 조우를 피하기 위해, 또는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길도 없는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눈보라치는 산악을 뚫고 가는 고난의 행군이다. 청산리전투와 그 후 행군인 북정(北征)은 앞선 기사에서(17회) 보았다(관련기사 보기). 1920년대 초 노령에서 작전한 김경천의 기록(<동아일보> 1923.7.29.)은 이렇다. 주요 길목을 점령한 일본군 대부대를 피해 다음처럼 산속으로 행군했다.
 
"발을 벗고 눈이 길같이 쌓인 산속에서 지내니 그 고생이 어떠하였겠소. 미국이 독립전쟁을 할 때에 겨울에 맨발을 벗고 어름 위를 지나가서 어름에 발이 베여 발자국마다 피가 흘렀다더니 우리 군사도 이때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소. 그러나 사람 없는 산천에 보이는 것은 망망한 백설과 하늘뿐인데 깎아지른 듯한 산을 지날 때에 우리는 불국(프랑스) 명장 나폴레옹의 알프스 산 넘든 행군을 연상하였소."
 
 
미국 독립전쟁과 나폴레옹의 알프스 원정 행군과 비견했는데 눈 덮인 산속 행군은 발자국마다 고난이 서려 있었다. 김경천 부대는 겨울에 강냉이죽을 먹으며 200리 행군을 하기도 했다.

청산리전투 후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의 이동은 일본군이나 일경 수색대와의 전투를 전제로 한 경우가 없었다. 따라서 대부대 단위의 급박한 행군 상황은 없었다.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중국군과 연합해서 일만군(日滿軍)과 전면전을 전개하면서 독립군의 행군은 전술적으로 더욱 중요했다.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소식을 전한 <신한민보>(1934.1.4.) 한국독립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쌍성을 공격했다. 만주국군은 항복하고 일본군은 저항하다 22명이 사망했다. 한중연합군은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군은 공격을 위해, 또는 전술적 퇴각과 방어를 위해 끊임없이 행군했다. 만주사변 후 편제돼 북만주에서 동만주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군은 전술적으로 행군을 많이 했다. 훈련 받지 않고 한국독립군 참모가 된 조경한은 하루 100리 이상 걷지 못했는데 만주 망명 후 160리까지 걸었다고 한다. 독립군에 참여한 뒤엔 200리, 많은 때는 300리까지 강행군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의 회고(<백강회고록>)는 이렇다. 
 
"발바닥이 붓고 밤톨처럼 부르터 오르고 두 다리며 전체의 고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항상 낙오가 되어 숙영지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 … 더욱이 추운 겨울에 방한복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히지도 않는 썩은 조밥 두어 젓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편히 쉬지도 못한 몸으로 경우에는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행군하게 되면 등이 춥고 배가 고프고 다리, 발바닥의 지독한 자극을 받아 … 결국 또 다시 낙오[한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던 조경한은 300리, 곧 120킬로미터(약 118km) 행군이 힘들어 낙오되었고 특히 주린 상태에서 강추위 속의 야간 행군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정치 활동으로 전환할까 고민까지 했다는 것이다.

동만주로 근거지를 옮기는 행군은 길도 없이 눈 덮인 긴 산악지대를 4일에 걸쳐 돌파하는 강행군이었다.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의 연합항일실기>(<신한민보> 1934.1.18.)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상으로부터 액목 장산 사이에서 종횡하야 전혀 선로가 없었다. 하물며 적설이 무릎 위에 올라오매 실로 행군하기 어려웠다. … 음식에 대하여는 매 1인이 쌀가루 두 되와 소금 닷 냥 중을 휴대하여 배가 고픈 쌀가루를 눈에 섞어 먹고 지났다. 이와 같이 4일 만에 비로소 목적지인 장산의 험한 길을 지났었다."
 
 
조경한은 '썩은 조밥'이라 했는데 뒤 기록은 '쌀가루(건량)와 소금'이 식량이라 했다. 행군 상황에 따라 식량은 달랐지만 한겨울 눈 속의 산악 강행군은 한국독립군의 일반적 전술 행군이었다.

"쌀가루를 하얀 눈에 섞어 먹으며 행군"  

한국독립군은 군수 물자를 일만군에게서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북만주는 동포 마을이 남만주보다 상대적으로 집중해 있지 않아서 동포 사회의 행정조직을 통한 장기적 지원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일만군이 북만주를 거의 장악하면서 동포 사회의 지원도 더욱 어렵게 됐다. 따라서 적을 공격해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독립군 군수품을 강화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중국군과 동포 사회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후 무기와 식량을 전투를 통해 확보했다. 쌍성전투, 동경성전투, 동녕현전투 등 공성 전투에서 이기면서 한중연합군이 일만군에게서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장거리 행군으로 고지에 매복해 일본군 간도파견대를 공격한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 중 가장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두 차례 쌍성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식량 등 겨울을 지낼 많은 군수물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2차 쌍성전투 때 일본군 비행기 여러 대의 공습을 앞세운 반공으로 연합군은 오상현 충하진까지 퇴각했다. 조경한(<백강회고록>)은 4일간 300여 리를 적이 추격해 왔다고 했다.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군수품과 마필의 손실이 컸다. 곧 퇴각 과정에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이동 중 군수물자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300리면 120킬로미터인데 지도상으로 쌍성에서 충하진까지 직선으로 150킬로미터 정도다. 퇴각 때 우회 은폐로 등을 고려하면 실제 행군 거리는 그 이상이다. 하루 50킬러미터 정도를 행군하며 나흘 뒤에 퇴각에 성공했다. 처음에 많은 군수품을 지니고 이동했지만 뒤에는 포기하고 신속한 행군을 택했다.

동만주로 옮긴 뒤에도 한국독립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적을 공격해서 식량 등 군수품을 확보했다. 식량이 풍족하지는 않았다. 조경한은 '줄곧 썩은 조밥, 강냉이죽, 건량, 소금, 산채'를 먹어 영양부족이었고 했다. 

한국독립군은 항일반만군 '토벌'로 악명 높던 일본군 간도파견대의 이동 정보를 확보했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한 사람이 사흘분 건량을 준비하고 270리 산림지대를 사흘간 돌파해서 매복했다. 대전자령전투의 준비였다. 하지만 비가 와서 일본군 출발이 늦어졌다. 한국독립군과 구국군은 삼림 속 식용버섯으로 허기를 달래며 사흘 동안 매복진을 풀지 않았다.

날이 개고 출발한 일본군은 결국 한중연합군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다. 공세적 행군과 배고픔 속에서도 매복진을 유지한 것이 승전의 전술적 요인이었다. 이 때 많은 군수품을 확보하고 한중연합군은 나자구로 들어갔다. 이후 구국군 사령부와 항일산림대 등이 나자구 일대로 집결하면서 나자구는 항일반만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많은 군수품 확보가 그 기반이 되었다 하겠다.

한국독립군은 근거지를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장거리 행군을 기본전술로 삼았다. 활동 근거지를 북만에서 동만으로 옮기기도 했고, 적의 이동 정보를 확보한 뒤 공격 장소를 선점하는 공세적 행군도 있었다. 병력 충원을 위해 동포 사회의 근거지 확보를 담보하면서도 식량 등 군수물자를 적과 싸워 획득하는 전술을 썼다. 이는 공격적 행군을 바탕으로 했다. '빠른 발'은 한국독립군 승전의 기본 조건이었다.

산악지대 기반으로, 장거리 행군 중심으로 한 한국 군인들 

조선혁명군도 전술적으로 행군을 중시했다. 특히 북만주보다 빨리 일만군의 포위망이 구축된 남만주에서 조선혁명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하며 공격과 방어를 배합해서 치열하게 항일전을 전개했다. 전투 초기에는 빈현 영릉가 등지에서 승전하며 공방전을 전개했는데, 연합한 항일중국군의 방어전선이 무너지며 조선혁명군은 통화현에서 퇴각해 산림지대로 들어갔다.

행군대열에 참가했던 계기화의 회고(<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로 보면 이렇다. 퇴각 초기에는 행군이 빠르지 못했다. 9대 우마차에 군수품을 싣고 사령부와 직할부대가 먼저 이동했고, 강전자에서 주둔하며 각 중대 병력이 집결했다. 이후 단일부대로 행군했는데 노일령으로 이동하다 적과 교전하여 전사자가 여럿 나왔다. 사령관 양세봉은 쉬지 않고 바로 입산했으면 전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중대 지휘관들에게 이후 신속한 행군을 전술적으로 강조했다.
  

조선혁명군이 항일전을 치른 영릉가 현재 모습 조선혁명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하여 영릉가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물리치고 전과를 올렸다. 현재 신시가지로 변해 있다.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일만군은 남만주를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여러 차례 대부대를 동원해 항일반만군을 압박했다. 조선혁명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해서, 또는 단독으로 일만군을 격퇴하고 장기전을 전개했다. 고산준령을 이동하는 것이 조선혁명군의 기본 전술이었다. 멀리 떨어진 '무송, 몽강, 안도, 장백 등 수림지대'로 장정하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계기화는 '나라와 동포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고 술회(<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했다. 군사적으로 보면 위 수림지대는 적에 대처하기에 좋은 지역이었고 실제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항일연군도 뒤에 위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따라서 계기화 회고는, 조선혁명군이 동포 사회 기반이 강한 지역을 떠날 수 없던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조선혁명군 전술을 제한했다. 일만군의 포위가 점차 강고해지면서 공격보다 방어에 중심을 두게 되었다. 적으로부터 군수품을 빼앗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다. 조선혁명군이 식량 등 군수품을 국민부 행정조직의 기반인 동포 사회에서 마련하는 조건도 이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국민부 행정조직이 식량을 지원했지만 일만군에게 조직이 파괴되면서 식량을 구하기 어려웠다. 입산 후 첫 겨울인 1932년 말-1933년 초를 계기화는 이렇게 회고했다.(주2)
 
"수백 명분 먹을 식량 보급이 큰 근심거리로 근거리에 있는 부락에 통지만 하면 동포들이 지극한 성의로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식량이 오지만, 이제는 우리가 조직하였던 행정기관은 자연히 없어졌으므로(일제 군경에게 파괴됐으므로: 인용자)…먼 지방 부락에서는 차츰 명령 불복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무장대 5명을 쾌대무자에 급파하여…오백 명의 1개월 식량대를 모처로 가져오라고 명령을 하달하고 왔는데 10일 내 600원을 보내왔으며 1933년 음력 2월경이었다. 어떠한 최악의 경우라도 동포들의 지성으로 최후까지 식량은 공급하였음."
 

근거지로의 식량 공급은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군사적 문제였다. 양세봉 사령의 순국 이후 김활석 사령 시기에 식량 보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조선혁명군은 여러 차례 일본군의 '토벌'을 무산시키면서 산악지대를 오가며 공방전을 전개했다. 환인현, 흥경현, 통화현 등 경계지대에 몇 군데 근거지를 구축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군했다. 유력한 근거지는 환인현 대황구 추피구 신개령, 흥경현 강산령 등(주3)이었다. 주둔군이 아니라 산악지대 이동군이었다. 조선혁명군이 1936년 들어 국경 근처 신개령을 근거지로 소부대 단위의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한 것도, 적 기관 공격과 더불어 군수품 보급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혁명군은 남만주 동포 사회를 기반으로 했다. 장백현, 안도현 등으로 가는 장정은 전술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산악지대에 몇 군데 근거지를 구축하고 근거지를 오가며 공격전과 방어전을 적절히 구사하며 장기전을 치렀다. 신속한 행군은 조선혁명군의 기본 전술이었는데 대규모 포위망 속에서 때로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하루하전투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일만군의 초토(焦土)전술로 동포 사회의 행정 조직과 산림지대의 민간인 마을이 파괴돼, 점차 군수 지원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동포 사회의 기반은 조선혁명군이 장기전을 치를 수 있었던 유력한 기반이었다.

(주)
1)<김승빈이 황운정에게 보낸 편지>(박환, 재소한인민족운동사, 국학자료원 1998, 348쪽에서 재인용).
2)계기화, <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1987, 22쪽.
3)<歸順者朝鮮革命軍總司令文武卿の供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36>, 2012, 518쪽.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 다음 이야기는 '독립전쟁 전략'입니다. 8월 26일에 이어집니다.
#독립군의 행군과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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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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