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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받은 독립군의 탄생

[새로 쓰는 독립군사④] 독립군의 군사 훈련 1

등록 2020.07.30 15:34수정 2020.07.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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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지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김산의 회고(<아리랑>)이다. '자유'를 위한 '희망'이 넘쳐 힘든 군사 훈련을 즐겁게 받았다는 것이다. 훈련은 항일전쟁을 치를 독립군 되기의 첫 과정이었다.

3.1혁명 후 독립전쟁론이 확산되고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 경술국치 전후로 망명한 의병진영이 있었지만 후일을 도모하며 해산한 상태였기에 새로 항일부대를 편제해야 했다. 첫걸음은 항일 선봉에 나설 군인의 육성이었다.

홍범도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의병들이 총을 내던지고 도망하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전투가 끝나면 때로 홍범도 부자만 남아있기 했다 한다(<홍범도의 일지>). 그 뒤 홍범도부대는 거듭된 전투에서 군사적으로 성장하며 큰 전과를 올리지만, 초기 전투 때 모습은 훈련받지 않은 부대는 오합지졸일 수도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1혁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결사 정신으로 독립군에 지원했으므로 전투 때 도망가지는 않지만, 역으로 결사 정신이 무모한 희생을 가져올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단위 전투에서 이기고 살아남아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항일전쟁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훈련은 그 기초였다.

따라서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의 탄생은 독립전쟁의 최우선 과제였다. 만주 독립진영도 여기에 온힘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이후 무장투쟁 준비론을 기반으로 설립된 신흥중학교에서 많은 군사 인재가 양성되어 있었다. 1-4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백두산 서쪽의 고원지대에 백서농장이라는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부대도 편제하고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3.1혁명 전에 조직된 거의 유일한 항일부대였다.(주1)
양실조와 질병이 군영을 덮친 가운데도 왜적과의 혈전을 준비하는 굳센 정신으로 4년간 유지했다. 하지만 병사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백서농장 군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독립군 편제를 위한 훈련의 정신은 이어졌고, 3.1혁명 후 신흥무관학교의 급속한 성장과 무장부대 편제에 밑거름이 되었다.
 

백서농장 장주(사령관) 김동삼. 일경에게 피체되어 1937년 옥중 순국. ⓒ 나무위키

   
3.1혁명 후 만주와 국내의 수많은 항일전투는 정규군처럼 훈련받은 항일전사가 치렀다. 홍범도부대는 의병전쟁의 오랜 실전을 통해 훈련이 몸에 밴 경우였다. 홍범도부대와 같은 군인 양성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3.1혁명 후 고조된 독립전쟁의 열기를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전의 명장 홍범도도 오히려 3.1혁명 뒤에는 사관학교 건립을 주장했다. 의병을 해산한 1913년에 이갑(李甲)을 만나서는 사관학교 설립보다 '의병대 조직'을 주장했는데, 3.1혁명 후 국민회의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이용(李鏞)이 홍범도를 만났을 때 홍범도는 설립에 찬동했다.

군사 훈련의 조건은 군인이 될 인적 자원, 훈련 기관, 훈련 내용이다. 첫째 조건은, 3.1혁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이 항일 근거지에 집결함으로써 충족되었다. 만주에는 민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많았고 이들은 3.1혁명 후 맨손으로라도 결사대를 조직하려 했다. 또 국내에서 3.1혁명을 주도했던 많은 청년이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망명했다. 군사교육 시설에 모두 입교할 수 없어서 대기할 정도로 군인이 될 인적 자원은 많았다.

둘째 조건은 신흥무관학교 등 무관학교의 존재로 충족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남의 나라 중국에서 군관 교육을 공언할 수 없어서 설립 초기에 대외적으로 신흥강습소(·중학교)라고 했다. 국내 신민회원들이 만주로 망명해서 설립한 학교로, 독립전쟁의 군사 인재를 1911년부터 계속 양성했다. 3.1혁명 후에 많은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 곳으로 확장했다. 6개월, 3개월의 기간을 정하고 한 기에 수백 명이 교육을 받았다. 북만주에서도 군사교육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북로군정서가 서로군정서에 교관 파견을 요청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우수한 졸업생들이 북로군성서에 가서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국민회도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는데 일본군의 만주 침략 때문에 실현되지는 않았다.

신흥무관학교는 각 독립군단에 배속될 독립군 장교·부사관 양성을 목표로 했다. 당시 각 독립군이 급속히 편제되면서 부대가 통일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관 졸업생이 빨리 배속될 수 없으므로 각 독립군단은 자체 훈련 시설을 통해 군인을 양성하기도 했다.


셋째 조건은 기존의 군사학에 최신 군사학이 추가되면서 더 충실해졌다. 3.1혁명 전의 군사 교육은 주로 경술국치 전후로 망명한 대한제국 군인이 담당했다. 대한제국 군사제도에 충실한 교육이었다. 3.1혁명 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현역 장교 김경천, 지청천이 최신 병서(兵書)를 가지고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에 부임하면서 신식 군사교육이 포함되었다. 일본 육사의 교육은 사단 전술을 바탕으로 중대 단위 지휘가 주된 내용이었다. 졸업 전에는 행군, 야영, 추격, 퇴각 등의 실전 연습이 진행되었다.(주3) 만주에 최신 일본군의 군사훈련 내용이 전해짐으로써 적의 전법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독립전쟁의 가능성이 커졌다. 당시 독립 진영은 이에 많이 고무되었고 실제 일본 군사학 서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번역해 활용했다.

'최신 병서'는 북로군정서에도 운반되어 사관연성소 훈련에 활용되었다. 일본 병서를 포함해 군사교재 30종의 운반 담당이던 이우석은 빨리 전달하기 위해 강행군을 했다.(주4) 1920년 5월에 국민회도 '일본 보병조전(步兵操典)'에 따라 집총 훈련을 받았다.(주5) 또 중국 운남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범석, 배천택 등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여 중국군의 신식 군사훈련 내용도 교육에 활용되었다.(주6) 초기 신흥중학교에서 실시된 대한제국의 군사 훈련 방식에 일본과 중국의 최신 군사학이 추가되어 독립군 훈련이 이루어졌다.

(주)
1)교도대와 3개 중대, 규율대를 설치하고 교관이 훈련을 담당했다.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143쪽. 장주(庄主)가 김동삼이었는데, 대외적으로 군대라고 내세울 수 없어서 백서농장이라 했으므로, 장주는 사실상 부대 사령관이다.
2)이인섭, <조선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를 추억하면서>; 이용, <무관학교 설치에 관한 보고서>,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303쪽.
3)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 항일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 문학과지성사, 1995, 32쪽.
4)병서 운반 과정에 대해서는 박영석,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참조.
5)「고경제15246호 1920년 5월 29일」.
6)김승빈, <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군사 훈련 2 -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신흥무관학교 #무명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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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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