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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범죄에 뛰어든 청년 넷, 공감할 수가 없네

[리뷰] 흔들리던 청춘이 잡은 썩은 동아줄, 영화 <사냥의 시간>

20.04.27 14:46최종업데이트20.04.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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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냥의 시간> 포스터 ⓒ 리틀빅픽처스

 
영화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 윤성현 감독의 신작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에 공식 초청되었다. 당초 극장 개봉이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 19' 여파로 인해 지난 24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경제·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근미래, 총기와 마약 소지가 가능한 한반도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였다. 불투명한 미래를 사는 청춘은 정처 없이 도망 다닐 뿐이다. 뭘 해도 나아지지 않는 허무한 세상 속 제대로 된 어른도 기댈 곳도 없었다. 그들이 잡은 희망의 끈은 사실 썩은 동아줄이었다.

이야기는 준석(이제훈)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3년을 보낸 후 출소하며 시작된다. 준석은 출소 후 절친한 친구 사이인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을 다시 만난다. 3년 전 돈의 행방을 물어보지만 이미 휴지조각이 된 상황이다. 오직 다시 살 날을 희망하며 버틴 꿈이 산산이 부서지게 될 위기다. 하지만 감옥 밖의 세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

원화는 사라지고 달러가 유통되며 가게 월세조차 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렇게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과 생존권 보장을 위해 늘 시위해야 하는 노동자는 희망이 사라진 미래를 대변한다. 성실하게 살면 뭐하나 나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했다. 낙인찍힌 전과자는 취직도 어려웠다. 한 번 밑바닥 인생은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만 한다. 디스토피아에서 청년들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꿀 수밖에 없다.

이에 준석은 다 털어버리고 대만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조폭이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을 털자고 모의한다. 이에 장호, 기훈, 상수(박정민)까지 합세한다. 이후부터 영화의 장르는 케이퍼 무비에서 심리 스릴러로 변화한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컷 ⓒ 리틀빅픽처스

 
범죄에 성공한 후 희망에 부풀어 오는 것도 잠시, 네 친구들은 의문의 사냥꾼 한(박해수)에게 쫓김을 당한다. 벗어날 수 없는 헌팅 게임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야 만 것이다. 피도 눈물도 개연성도 찾아볼 수 없는 한은 이들을 궁지로 몰며 집요하게 쫓아온다. 꿈속까지 파고드는 사냥의 시공간 제약은 없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부모님도 도와줄 수 없고, 최대한 멀리 가도 사냥꾼은 금세 턱밑까지 따라붙는다.

영화 중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출구를 찾지 못해 허둥거린다. 이들은 출구조차 찾기 힘든 미로(헬조선)에 갇힌 연약한 사냥감이다. 이에 압박하고 쫓는 한은 공권력도 넘어서는 무소불위 상위 포식자다. 벗어날 수 없는 청춘은 약육강식만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예견된 희생양이었다.

그놈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리 도망 쳐보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까운 곳에서 지배당하고 있다. 악몽 같은 꿈에서 깨어나면 더 비참한 현실을 살고 있다. 예지몽에 시달리는 준석은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을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난 줄 알았지만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청춘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에서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시대는 청춘을 범죄로 내몰고 있다. 미로에 갇혀 쳇바퀴 돌듯, 겨우 벗어났는데 다시 질퍽거리는 진흙탕에 빠지는 꼴이랄까.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청년들은 출구를 찾지만 좌절하고야 만다.

영화에서 한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한의 행동은 흡사 터미네이터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를 연상할 법하다. 왜라는 질문이 쏟아지는 정체불명의 안타고니스트다. 전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불쑥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개연성이 부족하더라도 목표를 향해 치닫는 이유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영화에 관객이 몰입하고 캐릭터에게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하지만 한은 그동안 비슷했던 영화들의 클리셰를 답습할 뿐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한 번 사냥감으로 찍으면 이유를 떠나 반드시 죽이는 자'란 대사 한 줄로 요약될 뿐이다. 다른 네 캐릭터의 설명도 부족하다. 뿌려 놓은 복선은 대부분 회수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서사를 연결하는 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은 특정 캐릭터가 아니다. 청년들을 궁지에 몰고 압박하며 따라다니는 불안한 사회로 확대 해석할 수 있겠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컷 ⓒ 리틀빅픽처스

 
암울한 배경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막지 못해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미래 한국의 모습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사건이 현재와 다른 전개로 흘렀다면 세계의 모습은 어떨지를 그리는 대체 역사(Alternate history) 디스토피아다. 1980~1990년대 홍콩 누아르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를 연상시킨다. 탄탄한 서사보다는 희망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분위기에 도취된다. 긴장감 있는 사운드, 빨강, 파랑, 노랑의 강렬한 조명, 독특한 스타일은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연기로 살려 냈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한국 영화를 이끌어갈 라이징 스타의 조합,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의 차기작이란 기대감을 고려하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가상의 미래지만 보는 내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무너진 사회경제 시스템이 흔들리는 청춘을 잡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지로 내몰았기 때문일 거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이 비루한 청춘을 바라보는 134분 러닝타임은 다소 길고 무겁다.
사냥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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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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