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어른들의 사적인 질문, 조금 이해가 됩니다

등록 2023.09.27 15:02수정 2023.09.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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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명절 때였다. 친척 집에서 다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던 중 작은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너도 결혼해야지. 여자 친구는 있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꾸물거리던 그때 함께 있던 다른 친척 어른이 말했다.

"결혼, 취직 뭐 이런 거 물어보고 하면 벌금 내야 되는 거 모르나?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왔는데. 뭐는 3만 원이고 뭐는 5만 원이고 그렇더만. 결혼 얘기했으니까 빨리 벌금내이소~."

뭐 이런 식의 얘기를 했던 거였다. 이 말을 들은 작은아버지가 한숨을 짧게 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라믄 도대체 무슨 얘길 해야 되노? 으잉? 이런 말도 못하면 앞으로 무슨 얘길 하면 좋겠노."


명절날 가족이나 친척이 한 자리에 모이면 취직, 승진, 결혼, 출산과 같은 얘기가 자주 오간다. 아직 취직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 및 출산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일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는 요즘 무슨 일 하냐는 질문이 불편했다. 30대가 되고나서부터는 여자 친구가 있냐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명절날에는 개인적인 질문을 삼가자는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올해 설날 때였다. 친척들과 모여 있는데 오랜만에 작은 고모네가 왔다. 거의 한 10년 만이었다. 작은 고모의 아들은 나랑 어릴 적 같이 게임을 하며 놀던 사촌이었는데 그렇게 어린 애가 벌써 20살이 되어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었다. 어색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잘 지냈냐는 가벼운 안부 다음으로 내가 한 질문은 이랬다. 

"학교는 어디 다니냐?"
"공부는 잘 돼가니?
"여자 친구는 있니?"


스스로가 낯설었다. 어른들이 나에게 좀 하지 않았으면 하는 질문을 내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에게 이런 사적인 질문이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은 많이 했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물을 수 있을 말이 없었다. 사촌동생에게 뻔한 질문을 하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다른 친척 어른들도 나에게 말은 걸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없으니 그런 뻔한 질문을 했겠구나.'

그럼 도대체 무슨 얘길 해야 하는 거냐며 답답해하던 작은아버지가 생각났다. 작은아버지 역시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조카이니 대화는 해야겠는데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래서 취직은 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와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그렇게 어른들의 입장을 헤아려보게 됐다. 

길거리에서 오랜만에 학교 동창을 만났다. 잘 지냈냐는 기본적인 안부인사 다음 우리가 한 질문은 무슨 일하냐, 결혼은 했냐 등이었다. 그 친구가 일을 못 구해 힘든 상황인지, 결혼을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안 됐다. 그건 그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년배 친구를 만나도 이런 말밖에 안 나오는데 하물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과의 대화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친척 어른들 중 그나마 나이가 어린 작은어머니는 요즘 청년들의 마음을 알아서 그런지 나에게 취직이나 결혼 같은 질문을 안 한다. 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말을 안 하니 어색하다. 하루종일 서로 한마디도 안 한다.

일이든 연애든 무슨 말이든 붙여줬으면 싶을 정도다. 내가 먼저 말을 붙여볼까 해도 그게 더 어렵다. 요즘 일은 어떠시냐? 애 키우는 데 힘든 건 없으시냐? 이게 더 웃기다. 친척 어르신이 다 듣는 자리에서 너무 공개적으로만 묻지 않으면 되는데, 둘이서 조용히 물어보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대답할 수 있는데, 참 쉽지가 않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 그 사촌동생 얼굴이 떠오른다. 공부 잘 돼가냐는 둥, 여자 친구는 있냐는 둥 하는 나의 질문에 속으로 나를 꼰대라고 욕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 꼰대 아니야. 단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훌륭한 리더는 질문 방법이 다르다고 하는데 명절날 센스있는 어른의 질문법은 무엇일까.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지금, 조카들 만날 생각에 괜히 긴장된다.
#에세이 #명절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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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씁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만의 생각과 시선을 글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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