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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출현, 언론 불신... 이 모든 건 예견된 일이었다

[기획] 코로나19로 본 영화... <컨테이젼> <사바하> <신문기자>

20.03.01 17:24최종업데이트20.03.0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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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컨테이젼>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코로나19의 기세가 대단하다. 하루 하루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일상을 덮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상황이다. 전국은 꽁꽁 얼어붙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임과 단체활동에 나서지 않는다.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생지옥이 이어지고 있다.

두 달 전 발생한 코로나19는 대한민국을 멈추게 했다. 이렇게까지 번질지 누가 상상했을까. 모든 일은 안심하고 방심한 때를 귀신같이 알고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 진압, 그리고 가짜 뉴스를 만드는 미디어와 복병처럼 등장한 종교 집단까지. 바이러스가 퍼진 지금 사회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영화를 통해 들여다봤다.

<컨테이젼>

영화 <컨테이젼>은 2011년 스티븐 소더버그가 만든 미스터리 스릴러다. 가상의 바이러스 창궐에 인류가 고군분투하는 135일을 담았다. 현재 사태를 9년 전 정확히 예측한 것 같은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캐릭터의 앙상블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가족, 집단,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전 세계는 이어져있다.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반드시 퍼질 수밖에 없으며 정확한 원인과 경로를 파악해 진압하기까지 지난한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신종 바이러스는 정보 없는 불가항력이다.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는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건만 알 수 없어 손을 쓸 수 없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너도나도 감염되고 혼란스러움이 이어진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한 쪽에서는 백신 개발에 착수하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은 늘어난다. 한편, 이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또 다른 위기를 자초한다. 늘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마스크 파동처럼 재앙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 말이다. 

백신이 발명되었다 치자. 국민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빈부격차와 권력에 따라 그 시간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다. 돈과 시간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백신을 기다리다 죽어갈 수 있다. 똑같이 닥친 전염병 앞에 기여코 인간은 경계선을 만들어 낸다.
 

영화 <컨테이젼>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속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람 간의 접촉이 원칙이기 때문에 타인을 믿을 수 없게 되며 혐오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인 감염자로 인지하고 접촉을 꺼리게 된다. 누구와도 손을 잡거나 함께 있을 수 없어 바다에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격리되어야만 한다. 가족도 적이 되는 살벌한 생존방식만 남는다. 마치 좀비나 괴생명체에 물려 피와 살을 부르는 좀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도시는 황폐해지고 사재기나 폭동은 예견된 수순처럼 진행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도 가까이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가 커진다. 바이러스에 걸려 몸이 아픈 것보다 몇 배는 더 아프다. 격리된 병실에서 유리창 너머로만 지켜보다 가슴에 구멍이 나고 살이 찢기는 고통이 찾아온다. 사회적인 동물 인간에게 접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지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에 서로 악수를 하는 장면은 악수의 본질을 넘어 인류 평화를 찾은 상징으로 대변된다. 악수란 적과 만났을 때 손에 무기가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에서 유래되었다. 접촉의 자유,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 9년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바하>
 

영화 <사바하>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사바하>는 신흥 종교 집단을 쫓는 목사를 통해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단을 파헤치는 작품이다. 오컬트 장르의 성공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하나며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특정 종교 활동의 연관성이 밝혀지면서 주목받고 있다.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끝도 없는 욕심, 순수한 믿음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 과정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종교는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이 생각난다. 상처 입고 비어 있는 마음에 약과 풍족함을 채워주는 것, 바로 종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 민간 신앙까지 합세한 어둡고 신비로운 색채는 상상력과 어우러져 꼼꼼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불신을 용서하지 않는 타락한 종교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과연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을 구해 줄 수 있을까. 예수의 탄생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아기들의 희생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심도 있는 물음을 던진다.

세상은 생각보다도 훨씬 순수하지 않다. 이유 없는 후원은 없다. 세상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것이 태어나면 저것이 죽는 자연 이치에 인간도 포함된다. 음양오행의 조화, 먹이사슬의 법칙은 거스를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에게 반드시 대가를 묻는다.

<신문기자>
 

영화 <신문기자>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신문기자>는 언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시국에 분명 빠른 정보도 중요하나, 늦더라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언론의 의무다. 확인이 되지 않은 정보를 '속보'라는 타이틀로 내보내는 식은 안 된다. '아니면 말고 사과하면 괜찮아'라는 안일한 행동이 큰 파국을 만든다.

영화 속 언론은 권력의 감시견에서 경호견이 되고 있다. 진실에 눈 감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언론의 역할이 희석된 상황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시감이 느껴진다. 가짜 뉴스, 여론 조작, 댓글 부대, 민간 사찰, 신상털기 등 국가라는 큰 골리앗과 진실을 밝히려는 작은 다윗의 싸움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아베 정부가 세계를 겨냥해 작업해 온 역사왜곡의 물밑작업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서서히 슬며시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되 들켰을 경우 돈, 두려움을 건드려서라도 기필코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권 유지가 곧 이 나라 평화의 유지라고 말한다. 가족의 안위와 미래를 거들먹거리며, 나라의 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고 돌려 말한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와 가족,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

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일부 언론들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최대 클릭수를 높이려고 속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실의 바이러스는 온라인에서도 급속도로 퍼진다.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혐오와 분열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일각에선 조심스럽게 세계적 대유행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좀 더 냉정하고 정확한 언론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다룬 세 영화는 현재 대한민국을 덮친 전염병의 양상을 예측한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침투해 숙주를 좀 먹고 퍼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너진 틈을 타 잠식하며 타인에게 소리 소문 없이 옮겨 간다. 그래서 항상 건강한 사고와 면역력이 필요한 법이다.

알베르트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폐쇄된 도시의 극한의 절망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뤘다.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희망 의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막을 수 없음을 말한 바 있다. 연일 빠른 속도로 양산되고 있는 모양새이기는 하나, 소멸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기에 앞서 말한 불가항력이란 말을 고쳐 쓰고 싶다. 감염병은 인간의 손에서 퍼지지만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도 있다. 꺼질 것 같은 희망의 불씨라도 있다면 반드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힘을 믿는다.
컨테이젼 사바하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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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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