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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나이 서른이면 1억 정도는 모았겠지?"

[한국이 싫어서, 뉴욕] '나이란 무엇인가' 물어라

등록 2020.01.25 11:56수정 2020.01.2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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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서른살> 저자. 한국이 싫어 퇴사 후 뉴욕에 살고 있는 제 이야기를 30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내고자 합니다.[기자말]
불과 1분 사이에 나이가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었다. 기다려온 재앙이 비로소 왔구나 싶었다. 스무 살 이후 다가올 서른 살이 젊음을 덮쳐 버릴 거라고 믿게 된 건 순전히 사회 탓이었다.

88년생 여자인 나를 지배하던 이론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이론'이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이크가 가장 잘 팔리고, 25일에는 그보다 조금 덜 팔리며, 대망의 26일에는 아예 팔리지 않는다는 그런 내용인데, 날짜에 여자 나이를 적용해도 똑같다는 논리였다. 

즉, 스물여섯 살에 남자를 만나기는 글렀다는 의미다. 남자의 사랑을 받기에는 늙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한 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더 어이없는 건 그 말에 놀아나 '이제 끝났다'고 친구들과 만나서 우울해 했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서른 미신에 시달리다가 서른이 되었다. 겪어본 사람은 알 테지만 실상 달라지는 건 전혀 없다. 

일상은 똑같이 굴러간다. 갑자기 확 늙어버려서 사랑하는 이가 떠나는 일도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어른이 되어서 소녀같던 감성을 잃는 일도 없다.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서른 넘은 여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서른 넘은 여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여자 나이 서른. '여자', '나이', '서른' 이 세 단어가 합쳐지면 불행해지는 기분이다. ⓒ Pixabay

 
서른이 된 새해에 회사에 갔더니 부장이 말했다.

"이제 자기가 이 팀의 유일한 30대네? 훅 갔네. 언니 서른됐다. 얘들아." 

그때까진 서른 미신에 농락 당했던 때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래요. 나 아직 만으로 아직 20댄데..." 

여자 나이 서른. '여자', '나이', '서른' 이 세 단어가 합쳐지면 불행해지는 기분이다. 남자 나이 서른이라는 말은 심지어 입에 착 달라붙지도 않고 어색하게 들리거늘.

"여자 나이 서른인데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아니 남자친구도 없다고? 어쩔려고 그래. 선도 안들어온다 얘."
"여자 나이 서른이면 옛날같으면 벌써 애가 초등학생이야. 언제 애 낳으려고 그래?"
"여자 나이 서른이면 모아둔 돈 1억 정도 있어야지? 직장 생활도 4~5년 했으면 여자가 알뜰하게 저축하면서 혼수자금은 마련했겠지. 안 그래?"

응, 안 그래요. 생일 선물은커녕 생일 축하도 안 해주면서 '서른이 됐다'는 소문은 다들 어디서 귀신같이 듣고 와서는 간섭이다. 

'나이란 무엇인가' 물어라

다시 또 설날은 와 버렸고, 뉴스 기사나 텔레비전에서도 설날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성화지만 변함없이 꼰대인 친척들은 작년 설날처럼 젊은이들을 갈군다. 

서른이 넘었어도 사는 게 만만치 않아 고생하는 청년들을 향해 애정이라는 말로 비수를 꽂는다. 회사는 어디냐고, 연봉은 얼마냐고, 자기가 아는 어느 집 자식들은 서울에 집이 어쩌네 저쩌네, 하고 차가운 말을 잘도 떠든다. 

20대에 서른 미신에 시달렸다면, 서른을 넘은 지금은 더 세분화된 미신에 환장할 노릇이다. 30대에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을 향한 걱정어린 시선에는 마치 진심인줄 착각할 법한 연민이 서려 있다. 

'이제 끝났네. 서른 중반의 노처녀를 누가 데려가겠어..어쩌면 좋아'라는 가증스러운 눈빛(누가 걱정해달랬냐고). 결혼을 했다고 해도 간섭은 끝이 나질 않는데, 아이가 없는 기혼녀들을 향해서는 식당에서 메뉴라도 고르듯 쉬운 일인 양 "낳아라", "낳아야 한다" 소리친다. 

부부 사이의 일은 모르는 것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슬픈 상황일 수도 있고, 아이를 낳기엔 둘만의 다른 꿈이 있을 수도 있고, 건강상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그 어떤 일보다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나라, 무례하지만 그것이 무례한 줄 모르기에 무례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이상해지는 이 사회에서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나는 서둘러 한국을 빠져나왔다. 2019년 5월이었다. 서른이 되고 20대 때 사진을 보니까 앳된 티가 난다. 한껏 꾸민 서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예쁨을 지니고 있다. 20대 때는 굶으면 바로 살이 빠지고 밤새 놀아도 체력이 남아 돌았다. 
 

무례하지만 그것이 무례한 줄 모르기에 무례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이상해지는 이 사회에서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나는 서둘러 한국을 빠져나왔다. 2019년 5월이었다. ⓒ 박도


서른이 된 후에는 저질 체력에, 굶어도 살이 안 빠지고 나잇살인지 뭔지가 더 들러붙는 것 같다. 피부에도 아주 돈을 억수로 퍼부어야 탱탱해진다. 노력없이 갖고 있던 젊음을, 이제는 기를 쓰고 쟁취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서른 살 이후의 내가 작아질 이유도 없다. 사회가 마음대로 서른 살 넘은 여자를 비아냥거린다고 해서 그걸 감내해야 할 명분은 없는 것이다. 20대를 거쳤다면 다음은 30대다.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갖고 왜 난리를 떠냔 말이다.

이 글은 30대에 접어든 사람이 나이듦을 미화하기 위해 쓴 글처럼 느껴질 수 있다. 정확하다. 서른 살 만세! 30대 만세! 

솔직한 서른 살 - 찌질해도 나는 나야, 안 그래?

박도 (지은이),
필름(Feel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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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에 수원에서 태어나 철학과를 졸업했다. 방송작가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SNS 홍보 담당자 및 기획자를 거쳐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로 일했다. 팩트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고 싶어 가끔은 이상한 글로 복잡한 내면을 표현한다. 책 <솔직한 서른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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