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빠마'를 한 섬 할머니와 할아버지

[화제] 발길 잡아끄는 전남 신안군 암태도 마을벽화 탄생 비화

등록 2019.04.17 14:29수정 2019.05.17 16:12
0
원고료로 응원

'천사(1004)대교' 개통 이후 시쳇말로 뜨고 있는 전남 신안군 암태도 기동삼거리에 있는 마을벽화. 벽화의 주인공은 집주인인 손석심(78) 할머니와 문병일(78) 할아버지다. ⓒ 이주빈

  
지난 4일 전남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천사(1004)대교'가 정식 개통했다. 15일 자정 현재를 기준으로 약 14만 대의 차량이 다리를 건너 암태도·안좌도·팔금도·자은도를 방문했다. 천사대교를 타고 그동안 외지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던 섬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도 뭍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사대교 구간이 끝나 10여 분 남짓 암태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기동삼거리가 나온다. 자은도와 암태도, 천사대교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이다. 천사대교 개통 이후 이 삼거리가 암태도의 새로운 명소로 뜨고 있다. '동백꽃 빠마'를(외래어 표기법상 파마가 맞으나, 기사 안에서는 주민들의 입말 '빠마'로 쓴다)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그린 벽화 때문이다.

벽화의 주인공은 손석심(78) 할머니와 문병일(78) 할아버지. 물론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은 이들이 사는 집의 담벼락이다. 멀리서 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백꽃 빠마를 한 모습이다. 하지만 다가가서 보면 동백나무는 담벼락 안 집 마당에 살고 있다. 수줍게 웃는 할머니 얼굴과 장난기 있는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한없이 정겹기만 하다. 고향집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천사대교를 건너온 도회지사람들이 벽화 앞에서 사진 찍는 모습이 해맑기만 하다.

벽화 작업은 김지안 작가와 동료들이 맡았다. 신안군 지도가 고향인 김 작가는 3년 전 귀향했다. 긴 도시생활에 몸도 축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편하게 작업에만 몰두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올해 3월, 김 작가에게 벽화 작업 제안이 왔다. 작업을 제안한 곳은 뜻밖에도 신안군이었다.

"그럼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자"... 그 뒤 뜻밖의 민원(?)
 

애기동백꽃을 배경으로 한 이 마을벽화는 전남 신안군이 고향인 김지안 작가가 신안군의 제안을 받아 작업했다. ⓒ 이주빈

  
지난 겨울, 신안군 공무원 A(45)씨는 육지 사람들이 섬 집 담벼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봤다. 마당에 핀 애기동백꽃이 배경이 돼주고 있었다. 애기동백꽃을 이어서 벽화를 그리면 마을 분위기가 화사해지고 좋을 것 같았다. A씨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애기동백꽃을 쓴 모습의 벽화를 구상했다. 그리고 박우량 신안군수에게 마을벽화 사업 계획을 보고했다.

박 군수는 마을벽화 작업에는 찬성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그리는 것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 집에는 누가 사나요?"라고 물었다. 손석심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하자 박 군수는 "그럼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자"라고 말했다.

벽화 작업이 시작되자 수줍음 많은 손 할머니는 "얼굴이 너무 크게 그려지니까 창피하다"라며 지우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이웃 할머니들도 "무슨 사람 얼굴을 그렇게 크게 그리냐"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고. 


김 작가는 작업 기간 동안 날마다 마을 노인정을 찾았다. 그리고 "고향집 부모님 같은 마을 어르신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벽화 작업이지 가족으로 하나가 돼 가는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벽화가 그려지자 뜻하지 않은 민원(?)이 발생했다. 벽화 작업을 지켜보던 문병일 할아버지가 박우량 신안군수에게 전화를 걸어 "내 얼굴도 그려달라"고 요구한 것.
 

애초 이 벽화는 할머니만 그렸지만 작업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군수에게 민원(?)을 넣어 두 분을 함께 그리게 됐다. ⓒ 신안군 제공

 

할머니 그림 옆에 할아버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배경이 되어줄 애기동백나무 한 그루가 더 필요했다. 신안군은 어렵게 제주도에서 애기동백나무 한 그루를 구해 와 마당에 먼저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애기동백나무 옆에 심었다. ⓒ 신안군 제공

   
그림 배경이 되어줄 애기동백나무가 마당엔 한 그루밖에 없었다. 애기동백나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신안군은 제주도에서 어렵게 애기동맥나무 한 그루를 구했다. 운송비용까지 포함해서 약 150만 원이 들었다.

마당에 먼저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애기동백나무 옆에 제주도에서 온 애기동백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동백꽃 빠마를 한 할머니 옆에 똑같이 동백꽃 빠마를 한 할아버지 얼굴이 그려졌다.

김 작가에게도 마을 어르신들의 민원 아닌 민원이 들어왔다. 한 어르신은 소금밭 일구던 이야기를 전해주며 소금꽃 같았던 당신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한 어르신은 당신 얼굴은 됐고, 운동선수인 아들의 얼굴을 대신 그려달라고 했다. 아직까지 어르신들의 민원을 해결해 드리진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작가는 "작가 생활 30년 만에 소통이 이렇게 중요하고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고 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16일 오후, 전남 신안군 암태도 기동삼거리. 동백꽃 빠마를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수줍고 다정한 미소 앞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온 아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16일 오후, 암태도 마을벽화 앞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이주빈

#천사대교 #암태도 #마을벽화 #박우량 #신안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대통령 온다고 축구장 면적 절반 시멘트 포장, 1시간 쓰고 철거
  2. 2 플라스틱 24만개가 '둥둥'... 생수병의 위험성, 왜 이제 밝혀졌나
  3. 3 '교통혁명'이라던 GTX의 처참한 성적표, 그 이유는
  4. 4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5. 5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