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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염치로..." 설경구, 꾹꾹 눌렀던 감정 고백하다

[인터뷰] 참사 후 아찔했던 기억... "영화 <생일>, 위로로 이해해달라"

19.04.02 15:44최종업데이트19.04.0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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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가 영화 <생일>로 관객과 만난다.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 ⓒ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생일>에서 정일(설경구)은 시종일관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겉돈다. 해외에서 일하는 동안 아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 아내 순남(전도연)에게 모진 짐을 지게 했다. 뒤늦게 한국을 찾은 정일을 채우고 있는 건 큰 자책감과 황망함. 초점을 잃은 채 슬픔을 분노처럼 토해내는 순남을 그는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한다.

세월호 참사를 최초로 극화한 <생일>에서 어쩌면 가장 일반 관객과 정서적으로 맞닿아 있는 인물이 정일 아닐까. 벌써 5주기다. "관객분들을 정일이 등에 태우고, 남겨진 딸인 예솔이부터, 유가족분들을 서서히 보게 하다가 마음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순남과 만나게 하고 싶었다고 감독님이 말했었다"며 "그 말이 확 와 닿았다"고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렇게 순남과 정일을 떠난 아들 수호, 그의 생일 파티를 열게 되는 이야기가 극장에 걸릴 수 있게 됐다.

확고했던 선택... "부채감은 아니었다"

설경구가 안고 간 정일의 감정은 자책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지금의 관객들과 이어짐을 설경구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들 죽음을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염치로 슬퍼하나. 무슨 염치로 이제 와서 아들을 추모하고 찾나. 정일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감독님이 그랬다. 참사 이후 다들 마음에 뭔가 미안함 등 여러 감정이 있는데 그걸 타인에게, 유가족분에게 표현해도 되나? 그런 생각도 할 것이고…. 영화에서 정일은 사건 당사자면서 우리 자신들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설경구는 <생일>에 출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018년 3월경 한창 <우상>을 촬영하던 중 평소 친분이 있던 <생일> 제작사 대표에게 급한 전화를 받고 나간 그 자리에서 출연을 제안받았다. "3개월 정도만 기다려 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당장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더라"며 그는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느새 제가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감독님이 참사 이후 안산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이야기, 실제 생일 모임을 하면서 녹아 있던 사연들을 그때 들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겉핥기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 남겨진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크게 보면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상>을 함께 촬영하던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있더라. '(한)석규 형 죄송합니다' 이러고 있고…."
 

영화 <생일>의 한 장면 ⓒ NEW 제공

 
혹시 (남겨진 어른으로서 무엇을 하지 못했다는) 부채감 때문이었을까. <생일> 언론 시사회 때 설경구는 "참사 이후 시인은 시를 썼고, 가수는 추모 노래를 불렀는데, 난 (배우로서)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봤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참사 당일) 전 자고 있었다. 뉴스 소리에 놀라서 거실로 튀어나왔는데 전원구조 자막이 나오더라. '오, 다행이다' 이러고 있는데 그 뒤로 뉴스가 시시각각 변하더라. 소름이 돋았다. (참사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신다면 일반분들과 같았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다.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사고) 년도는 알겠는데 날짜를 잊은 적이 있었다.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기억하기 위해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노란리본을 달았다. 제가 활동가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꾸준히 기억하고 볼 수 있게 하는 정도지. 

<생일>에 출연한 것도 참사를 겪은 가족이야기라서가 아니다. 보편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 정일이는 2, 3년 후에 돌아왔을까. 사고 당사자면서도 관찰자 같은 입장이었다. 죄의식 때문에 슬퍼하는 것조차 염치없어 보였다. 이제 와서 슬퍼한다고? 그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는 인물이었지."


할 수 있는 방식의 작은 위로

인터뷰 중 유독 설경구는 내뱉는 단어와 말씨에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답하다가도 몇 번을 곱씹고 방금 말한 단어를 정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영화와 소재에 섬세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영화로 '치유'한다는 물음에 대해 그는 "감히 치유는 불가능한 것이고, 할 수 있는대로 작게나마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답했다.

전도연과 같이 설경구 역시 감독이 준비했던 여러 자료와 실제 유가족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분들도 평범한 이웃이잖나"라고 되물으며 그는 "저 역시 일반적인 사람이면서 배우이다 보니 너무 그 감정이 강렬하게 들어올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연출자가 철저하게 부딪히고 겪어가며 쓴 것이라는 신뢰감, 나아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보통의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오롯이 끌어안고 싶었다는 배우의 자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가족 시사회 때 고맙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아이러니다. 왜 우리가 그 말을 들어야 할까. 도연이도 많이 힘들어 했다. 괜히 또 우리가 아프게 하는 건 아닌지 촬영 때는 그런 부담 같은 거 안 가지려 했다. 보통의 아빠 역을 하는 배우로서 잘하고 싶었을 뿐이다. 언론 시사 이후 감독님이 만들고자 했던 의도가 통한 것 같더라. 관객분들께도 그렇게 보인다면 모든 건 감독님 노력 때문일 것이다."
 

"왜 정일이는 2, 3년 후에 돌아왔을까. 사고 당사자면서도 관찰자 같은 입장이었다. 죄의식 때문에 슬퍼하는 것조차 염치없어 보였다. 이제 와서 슬퍼한다고? 그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는 인물이었지." ⓒ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영화 후반부, 즉 수호의 생일 파티 장면은 설경구와 전도연, <생일> 제작진이 꼽은 클라이막스면서 가장 촬영이 어려웠던 순간이다. 성별,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한 자리에 모여 아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 장면은 컷 없이 30분이 넘게 롱테이크로 찍어야 했다. 순남과 정일뿐만 아니라 화면 구석구석에 사람들이 울고 웃는 표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역시 연기 경력에서 처음 찍어보는 롱테이크였다"며 설경구가 당시를 소회했다.

"한번 촬영 시작하면 25분, 30분씩 하니까 힘들지. 묘한 경험이었다. 배우로서 보일 수 있는 힘이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 분량, 카메라에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이 다들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린 아이들도 있었는데 아이들은 보통 집중이 어렵잖나. 제 조카로 나온 친구는 촬영 끝나고 대자로 뻗어서 울더라. 그만큼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애기들을 달래면서 우리 역시 웃다가 울다가 그랬다. 그 순간이 참 따뜻했다. 슬픈 마음이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뚜벅뚜벅 살아가기

영화 속 수호의 생일은 5월 14일이다. 설경구의 실제 생일과 같다. "감독님이 제 생일을 알고 한 게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그가 귀띔했다. 이러한 작은 우연조차 그에겐 일종의 감사함으로 다가왔다고. 

공식석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힘들었던 작품으로 <박하사탕>을 꼽던 설경구. <생일> 역시 그렇게 다가올 것 같았다. "아마 시간이 지나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설경구는 "좋은 영화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말했다.

"일반 관객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선입견이 있을까봐 걱정도 된다. 그냥 보는 영화라기보단 객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로도 참여고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단어를 가려가며 말하던 설경구가 스스럼 없이 시원하게 한 표현은 바로 "감사하다"였다. <생일>에 출연한 걸 배우의 사회적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는 "그리 봐주시면 감사하겠지만, 그 역시 감독님의 몫인 것 같다"며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것이 다행이고, 절 선택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답했다. 

"(<생일> 이전과 달라진 게 있냐는 물음에) 아니다. 예전과 똑같다. 제가 느낀 대로 했다. 무슨 사명감으로 작품에 참여한 건 아니다. 이전에도 그랬듯 전 또 삶을 살아가겠지. (세월호 참사) 5주기가 오면서 누군가는 이 영화가 너무 이른 거 아니냐고 하는데 벌써 잊히는 부분도 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꾸준히 안 잊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통해 거창하게 장담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전 잊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유가족분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살면서) 손 한 번 잡아주면 그걸로 충분히 족하지 않을까 싶다."

 
설경구 생일 전도연 세월호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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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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