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추사에 가려졌던 조선의 명필

김정희·조광진과 함께 3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을 찾아서

등록 2018.03.13 13:39수정 2018.03.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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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장군이삼만(逐巳將軍李三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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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선생 묘역입구 ⓒ 손안나


추워도 너무 추웠던 날, 경복사지 답사를 가면서 우연히 길가에서 '창암 이삼만 선생 묘역'이라는 푯말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가던 길 멈추고 차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표지판에 '막다른길, 길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이게 뭐지?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자문하며 길로 들어섰습니다. 다행히 선생의 묘역은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창암 선생의 만남에 대해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있어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번 기회에 창암선생에 대해 공부해 봐야겠다는 의욕이 불끈 샘솟더군요. 선생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었어요. 오늘은 그 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해요.

창암은 전주 이씨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가세가 기울어 선생의 아버지는 약초를 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의 아버지는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가 독사에게 물려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뱀을 아버지의 원수로 여기고 뱀만 보면 잡아 죽였습니다. 특히 독사를 만나면 산채로 씹어 먹었습니다. 선생의 살기에 눌린 뱀들은 선생만 보면 무서워 움직이지 못했다는군요.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나 상사일(上巳日)인 첫 뱀날에 뱀이 나올 만한 집안 곳곳에 이삼만이라고 써서 기둥 아랫부분에 거꾸로 부적처럼 붙였습니다. 이를 뱀입춘이라고 하는데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사람들은 선생의 이름을 3번 외치면 뱀이 무서워 도망간다고 믿었다고 해요. 선생의 효심이 뱀입춘이 되고 뱀을 쫒는 축사장군(逐巳將軍)이 되게 한 것이지요.

필명(筆名)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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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선생 묘역의 비석 ⓒ 손안나


선생은 하루에 천자씩 글씨를 썼습니다. 심지어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매일 천자씩 썼다고 해요.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은 창암이 먹을 갈아서 벼루 3개를 구멍 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니 선생이 얼마나 많은 글씨를 썼는지, 노력은 또 얼마나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붓도 꾀꼬리 꽁지털이나 칡뿌리, 대나무 개꼬리 털 등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선생은 혹독한 훈련과 창의적인 실험정신으로 조선의 특색을 살린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한 명필이 되었습니다. 그의 글씨는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분다는 의미로 유수체라고 불렸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눌진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알려져 있지만 선생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이는 열여섯 살이나 어리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의 업적이 너무도 커서 넘어설 수 없는 외부적 한계와 관직이나 유명세를 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글씨에만 몰두한 선생의 고집 때문입니다. 이런 선생이 필명을 얻게 되는 계기들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는 약재상이 대구 약령시에 약재를 팔러 가면서 선생에게 약재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선생은 약재상이 불러주는 대로 약재를 싼 천에 약재 이름을 적어 주었습니다. 대구 약령시에서 약재를 사러 온 중국 상인들이 선생의 글씨를 보고 감탄을 하였고, 선생을 찾아와 글씨를 구해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창암 선생이 한벽루를 찾았을 때의 이야기인데요, 한벽루에 부채 장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선생이 모든 부채에 글씨를 써 놓았답니다. 잠에서 깬 부채 장사가 부채에 낙서를 해 놓았다고 화를 내자 선생은 남문에 있는 장에 가서 팔아보라고 시켰습니다. 선생을 알지 못하는 부채 장수는 반신반의하며 부채를 들고 장터에 나갔는데 부채가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모두 팔렸습니다. 깜짝 놀란 부채 장수는 한벽루로 돌아와 사례하려 했지만 선생은 한벽당에 머문 바람을 모두 가졌으니 부질없다며 거절하였답니다.

초야에 묻힌 가난한 명필

선생은 정읍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전주에서 살았고 말년에는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상관 공기마을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추사 김정희가 유배 가는 길에 전주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초야에 묻힌 가난한 명필이 제주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만나 자신의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하였습니다.

추사는 명문거족의 일원으로 어릴 때부터 이미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이 높았고 청나라의 문인들과 교유하는 유학파였습니다. 시쳇말로 잘나가던 금수저 사대부였습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추사를 시골 노인네가 만나려고 찾아온 것이지요. 이 때 선생의 나이는 71세로 연로한 스승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같이 찾아왔습니다. 이때의 모습을 유홍준 교수는 <완당평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완당은 김정희의 또 다른 호입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광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사람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를 당한 스승을 대신하여 완당을 두들겨 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고 하니 창암이 앞을 막으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단다.

"저 사림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도장은 돌 도장은 고사하고 나무도장도 아닌 고구마 도장을 마른 인주에 찍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창암의 글씨는 아주 촌스러웠고, 좋게 말해서 향색이 짙었다.

위창 오세창 역시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라고 평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생의 글씨가 그만큼 독특하다는 뜻이겠지요.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는 9년을 제주에 머물며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합니다. 당당하던 기개도 한 풀 꺾이고 겸손하여져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전주를 찾습니다. 창암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창암선생은 고인이 된 후였습니다. 이에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 蒼巖 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표를 쓰고는 다음과 같은 묘문을 썼다고 합니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추사와 창암의 글씨가 함께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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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 있는 김양선의 묘비 전면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쓰고 뒷면의 글씨는 창암 이삼만 선생이 글씨를 썼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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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 있는 김양선의 묘비 비석의 앞면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이고 뒷면은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이다. ⓒ 손안나


이런 이야기는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구이 평촌리에 있는 선생의 묘비는 추사의 글씨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완주에는 추사 선생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전면에는 추사의 글씨가 후면에는 창암 선생의 글씨가 있는 비석이 2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용진면 녹동 마을에 있는 비석으로 비석의 주인공은 전주 최씨 가문의 최창익의 부인인 광산 김씨입니다. 묘비에는 "정부인 광산 김씨는 이조판서 김응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휘석 어머니는 곡산 노씨이다. 최창익이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정부인에 봉해졌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최성철과 차남 최성전의 효행이 뛰어나 나라로부터 정포의 은전을 입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순조33년(1833년) 최한중이 짓고 이삼만이 썼으며 비신의 앞면은 추사의 글씨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처럼 앞면에는 추사의 글씨가, 뒷면에는 창암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봉동읍 은하리 삼암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인 김양성의 묘비입니다. 2004년 8월 3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비석 전면에 '동지중추부사김공양성지묘 정부인수원백씨부좌(同知中樞府事金公養誠之墓 貞夫人水原白氏坿左)'라고 씌어 있고, 양 측면과 후면에는 김양성의 가족관계와 관직생활 등에 대해 적어놓았습니다. 비문 말미에는 당시 규장각 대교(待敎)이던 김정희와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비석의 주인인 김양성은 무인 가문 출신으로 경희궁 위장, 전주 남고산성 대장인 남고진 별장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전주 문화원에 계시는 김진돈 선생님에 의하면 한 시대를 살았던 두 명필의 글씨가 동시에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서 문화재로도 가치가 크다고 해요. 문중에서 서둘러서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상관 공기골에는 창암 선생의 고택지가 있으니 복원사업도 이루어져서 편백나무 숲의 힐링 코스와 연결되면 더 풍성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주에 이렇게 멋진 분이 계셨던 걸 알게 되어 행복한 하루입니다.
덧붙이는 글 석한남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시루), 중앙일보 기사 <'조선 명필' 추사 - 창암 함께 글씨 쓴 묘비 발견>(2004.8.3) 등을 참고했습니다.
#창암 이삼만 #추사 김정희 #완주 가볼만한 곳 #용진읍 녹동마을 #봉동읍 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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