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우리는 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부끄럽고 불안할까

[리뷰]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사랑... 부끄러움과 불안의 다른 이름

18.02.18 15:34최종업데이트18.02.18 15:34
원고료로 응원

ⓒ 판씨네마(주)


"나는 여자고, 이건 내 이야기다. 내게 관심을 보인 남자애 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저절로 눈이 그에게로 끌렸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행복인 줄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애들하곤 놀았어도 그 애 하곤 못 그랬다. 그저 쳐다보는 데 빠져서 마음에 들 생각도 안 했다. 첫사랑은 이처럼 순진하게 시작되나 보다. 너무 달콤하기에 잘 보일 욕망마저 잊는다. 그 애도 남다른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수줍고 사려 깊은 눈길이었다. 우리 사이엔 뭔가 더 엄숙한 게 있었다. (중략)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몰랐다고 했지만 알았는지도 모른다. 떠나면서 그를 보느라 뒤돌아봤으니까. 그래서 뒤돌아보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피에르 드 마리보 <마리안의 일생> 중에서.

ⓒ 판씨네마(주)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이 듣는 문학 수업에 나온 소설책의 구절이다. 아델은 문학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피에르 드 마리보의 <마리안의 일생>이다. "첫사랑은 이처럼 순진하게 시작되나 보다." 2분에 걸쳐 짧게 등장한 저 구절은 앞으로 아델이 어떤 사랑을 할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저 성장 영화라고만 한다면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마리안의 일생>은 저러했지만, 아델의 일생은 어떤 모습일지, 아델이라는 인물의 일생으로 들어가 느껴본다.

아델은 저벅저벅 걷는다. 뒷모습은 불안정하다. 살짝 들린 윗입술, 삐져나온 머리카락, 흔들리는 눈동자만으론 아델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어렵다. 학교에서 만난 남자친구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려 했다.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나눴고 몸을 나눴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묘한 허탈감만 남긴 채 그저 그런 만남으로 끝나버렸다. 그녀는 슬펐다. 생각처럼 안 되는 게 마음이었다. 침대에 누워 어떻게든 눈물을 견뎌보려 초콜릿 하나를 깨문다. 허공을 바라보며 누운 아델은 적막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만진다. 부끄럽다.

ⓒ 판씨네마(주)


한 여자가 있다. 아델에게 살짝 마음을 내비친다. 아델의 윗입술, 머리카락, 눈동자에 매혹을 느낀 여자는 아델에게 입을 맞춘다. 아델은 눈뜬다. 동성 간의 묘한 긴장감이 그녀를 휘젓는다. 그녀는 더 이상 슬프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지만 자신을 조금 알게 된 것만 같아 설렌다. 하지만 여자는 하루 만에 아델을 떠난다. 여자는 이런 것을 부끄러워한다. 아델도 부끄러워진다. 또다시 그녀는 슬펐다. 아델이 떠난 사람과 아델을 떠난 사람, 모두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점점 더 알 수 없는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것만 같다. 아델이 생각하는 몸은 부끄러운 몸. 외면당하는 몸. 자신의 몸을 감싼 모든 것이 불안하고 적막하다. 아델은 저벅저벅 걸어 나간다. 학교 밖으로.

영화는 아델의 걷는 모습을 많이 비춰준다. 첫 장면에도, 학교를 나가는 장면에서도, 모두 다 아델의 걷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잡는다. 학교 밖을 나갈 때는 카메라의 흔들림으로 아델의 불안함을 대신한다. 한층 더 자신감이 사라진 모습으로 아델은 위태롭게 걷는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이렇게 불편한 것일까. 아델은 자신에게 익숙해지지 못한다. 다른 몸을 입고 있는 것 같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아델뿐 아니라 아델에게 다가왔던 그 여자도 아델과 비슷한 생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델은 걷고, 또 걷다가 퀴어클럽에서 엠마(레아 세이두)를 만난다.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엠마를 만난 적은 있지만 클럽에서 다시 엠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둘은 모르는 사이였지만 눈빛을 나눈다. 엠마는 블루 빛이 도는 머리색을 가졌다. 머리색만으론 엠마를 설명할 수 없다. 엠마는 아델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아델은 엠마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아델은 엠마가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럽다.

아델이 느낀 세 번째 부끄러움이다. 아델은 사랑 앞에서 순수하고 마음 뛸 준비가 돼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남들보다 더 잘 느낀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아델과 엠마의 눈빛을 교차편집으로 느리게 보여준다.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전류 위에 타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아델이 진정으로 사랑할 사람을 만났구나 싶었다. 아델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아델에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엠마는, 아델보다 부끄러움이 덜했다. 영화 초반부 나왔던 <마리안의 일생>의 구절이, 이렇게 아델과 엠마의 사랑으로 아델에게 다가올 것을 기대했다.

아델은 문학을 좋아한다. 철학을 알고 싶어 한다. 엠마는 미술을 전공한다. 엠마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다. 아델은 엠마의 정신과 눈빛과 자신감에 끌린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던 아델에게 엠마는 온전하게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사랑은 몰려와서 그들을 휘감는다. 힘껏 진심으로 서로를 안는다. 엠마의 짙은 '블루'빛 머리처럼 둘의 사랑은 점점 더 짙어져 마치 둘이 삼켜질 듯하다. 엠마는 아델을 먹고 아델은 엠마를 먹는다. 아델은 기꺼이 엠마에게 먹힌다. 기꺼이.

엠마는 아델을 먹고 조금씩 더 커져만 간다. 비대해지고 거대해져 점점 더 아델을 잠식시킨다. 아델은 엠마가 무섭다. 기꺼이 아델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하지만 역시나 무섭다. 아델은 아직 자신을 찾지 못했다. 엠마를 만나서 자신의 사랑은 찾았지만 자신은 찾지 못한 채로 방황한다.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사랑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엠마의 주변을 맴돌며 엠마의 지인들과 엠마의 가족 곁에 발을 담그고 싶지만 자신을 찾고 싶은 욕구가 눈치 없이 고개를 든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찾는 일보단 엠마와의 사랑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아델은 한낱 외로움과 열등감 따위로 엠마를 놓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남자의 손길을 의미 없이 받는다. 아델은 부끄럽다. 엠마를 쫓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엠마와는 달리 단단하지 못한 자신의 정신이. 엠마는 뿌릴 수 있지만 자신은 덧입어야 하는 용기가.

엠마의 머리색이 바뀌었다. 그들의 사랑은 끝이 났다. 표면적으론 아델의 배반이었지만, 그들 관계에선 배반이 이별의 이유라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의 흐름이 있었다. 아델의 시선에서 본 엠마는, 다가가기에 한없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발을 내딛는 건 아델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엠마는 아델의 도약을 도와주지 못했다. 아델을 보며 난 느꼈다. 결국 무언가를 하는 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고, 상대가 도와주지 않는다 해서 상대를 탓할 순 없다는 것. 하나의 관계가 끝나는 건 타인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행동하지 않아서였음을. 혹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부끄러움에 내가 지쳤기 때문임을. 표면적인 원인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관계를 시작하고 만들고 망치는 건, 내가 한다.

ⓒ 판씨네마(주)


엠마와 헤어진 아델은 엠마의 '블루'빛 머리를 잊지 못한다. 아델이 교사로 일하는 유치원에서 간 바닷가로 소풍을 갔다. 아델은 바닷물에 자신의 온몸을 담근다. 마치 엠마의 '블루'빛에 먹히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처럼, 파란빛의 바닷물에 자유롭게 담겨 이리저리 떠다닌다. 난 이 장면이 엠마를 향한 아델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델은 바닷물에 편안하게 누워있다. 아델을 그리워하며, 아델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어떤 '빛'으로 몸을 채색한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들어간 '블루'빛. 그들의 관계는 끝났지만 엠마를 향한 아델의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잘 느꼈다.

그들은 몇 년 뒤, 재회한다. 카페에서 머리색이 바뀐 엠마와 머리 스타일을 바꾼 아델이 마주 보고 앉아있다. 엠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린 상태였고 아델은 여전히 유치원 교사 일을 하며 하루하루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뀐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 둘은 마음을 확인하기에 앞서 떨어졌던 시간만큼 또다시 머뭇거린다. 아델은 부끄러움을 이기고 엠마에게 구애를 한다.

과거, 뜨겁게 사랑했던 둘 사이의 사랑에 다시 불을 지피고 싶다. 자신을 만지라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아델의 목소리엔 격정과 떨림이 있다. 엠마 또한 그녀를 잊지 못했다. 아델의 구애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하지만 엠마는 멈춘다. 부끄러움과 머뭇거림이 엠마의 속도에 제동을 가한다. 그리고 엠마는 말한다. "너에겐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앞으로도 그럴 거야. 평생 동안." 아델은 눈물을 흘린다. 아델은 부끄럽다.

마지막으로 아델은 힘을 내본다. 엠마의 그림이 걸린 전시회에 아델은 '블루'빛 드레스를 입고 찾아간다. 여러 사람들이 있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전시회다. 엠마의 작품을 본 아델은 또다시 엠마의 위엄에 대해 느낀다. 자신을 잠식시킬 것 같은 웅장함과 곧게 선 작품세계에 압도당한다. 엠마는 자신과 다른 길 위에 있다. 아델은 느낀다.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감 있게 작품을 소개하는 엠마에게 더 이상 다가갈 자신이 없다. 아델은 전시장을 나간다. '블루'빛 드레스를 입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에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끝난다.

아델의 뒷모습은 불안하다. <마리안의 일생>의 마리안처럼 가슴 한쪽에 뚫린 구멍을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그녀의 모습엔, 초반 등장에서 보였던 그녀의 걸음걸이와는 다른 결연함이 있다. 불안함을 떠안고 살아보겠다는 다짐. 누구든, 어떻게 살든 불안은 버릴 수 없다는 깨달음. 그러니 이젠, 그저 살아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조금은 경쾌한 배경음이 아델의 걸어가는 뒷모습에 겹쳐 나왔다. 그것은 아델의 앞으로의 삶을 비관이 아닌, 두근거림으로 느끼게 했다. 아델은 엠마를, 마찬가지로 '무한한 애틋함을 느끼'는 존재로 기억할 것이다.

한 편의 영화로, 아델의 삶을 조금 엿봤지만 아직도 난 아델이 누군지 모른다. 그저 나와 같은 한 사람의 모습을 세시간 동안 지켜본 것뿐이었다. 여러 감정이 들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부끄러움과 사랑이다. 아델의 사랑을 이끈 건 무엇보다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움 없이 아델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사랑에 앞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선행했고 그만큼 아델은 머뭇거렸다.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엔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공존하게 되는 걸까. 모두의 모습이라고 볼 순 없지만, '사랑'이라는 마음엔, 부족함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부족함, 그런 자신이 만드는 사랑의 부족함, 그것이 타인에게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런 타인이 다시 내게 돌려줄 막연한 마음. 사랑을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마음들이지만 가장 외면하기 힘든 마음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럼에도 우린 모두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는 점이다. 정체돼있는 모습이 잘못된 것도, 발전하는 모습이 잘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국 우린 선택하게 돼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내든 그 결과에 우린 또 적응해 살아갈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모든 일은 살기위해, 치러진다는 것을.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기 위해 우린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선택을 한다는 것도. 아델을 응원한다. 그녀를 응원하는 나도 이 삶을 또 다시 살아내겠지만.

레아세이두 가장따뜻한색블루 아델에그자르코풀로스 블루 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