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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여왕 등극 알린 '그 목소리'... "요즘 피겨 감동 없는 이유는"

[평창인을 만나다⑨]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18.02.08 16:27최종업데이트18.02.0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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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 이희훈


한국 피겨스케이팅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김연아(28). 김연아의 전후로 피겨스케이팅은 크게 달라졌다. 차갑다 못해 황량했던 은반 위에서 피어난 피겨여왕의 기적으로 이제 피겨스케이팅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종목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김연아의 중계가 나올 때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를 시작으로 어느덧 다섯 번째 올림픽을 중계하는 베테랑이지만, 사진 촬영에서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브라운관에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밝은 미소가 카메라 렌즈에 담겼다.

지난 1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만난 방 위원은 중계 준비와 함께 또 다른 김연아를 발굴해 내는 작업에 분주했다. 그가 가르치고 있던 선수는 이제 막 2회전 점프를 뛰기 시작하는 꿈나무. 그렇게 또 다른 김연아를 찾기 위해 다시 한 번 스케이트 끈을 동여매고 은반 위에 섰다.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이 잠실롯데월드빙상장에서 피겨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다. ⓒ 이희훈


사상 첫 전 종목 출전... '벽'은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피겨는 사상 최초로 '대회 전 종목 출전'이라는 성과를 냈다. 소치를 끝으로 김연아가 현역 은퇴를 한 후 한국 피겨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평창에 출전하는 최다빈(18·수리고)을 비롯해 '맏언니' 박소연(21·단국대) 등이 시니어 그랑프리에 자력으로 출전했고, 최다빈은 동계 아시안게임 최초 금메달을 획득했다.

여기에 '남자피겨 새별' 차준환(17·휘문고)이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평창에는 나서지 못하지만 유영(14·과천중), 임은수(15·한강중), 김예림(15·도장중) 등 주니어 3인방 선수도 등장했다. 여기에 10년 이상 명맥이 끊겼던 페어와 아이스댄스 선수들도 생겨났다. 방 위원은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이뤘다며 충분히 자랑스러워도 된다고 강조했다.

"김연아 선수의 등장 이후로 관심과 대중성은 정말 높아졌지만 인프라가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평창 대회를 유치한 이후 사실 피겨에 대한 준비가 늦었었죠. 그런데도 전 종목에 출전하게 된 것이 현실이 돼서 놀랍죠. 그렇게 되길 희망했지만 그저 꿈이었으니깐요. 많은 후배 선수들, 피겨인들, 코치진들이 굉장히 노력했고 열심이었어요. 서로 수고했다는 그런 말을 주고 받기에 충분하죠.

우리나라에서도 아이스댄스와 페어스케이팅 조가 생겼고 남자 선수들도 계속해서 재능 있는 선수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계점을 넘지 못할 벽이 있었는데, 이제는 벽이 허물어졌어요, 어려운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뛸 수 있게 된 것이 순위나 결과 보다 더 큰 성적이죠."

평창은 김연아 키즈들이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한 후 맞는 첫 동계올림픽이다. 전 종목에 나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당당하게 한 무대에 선다는 것. 그것은 한국 피겨의 '결말'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바이애슬론 해설위원 분을 만났을 때의 일인데, 그 분이 바이애슬론 선수들이 '자신들의 한계점, 메달을 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에 굉장히 안타까워 하시더라고요. 그 얘길 들으니 우리가 예전에 느꼈던 것이 그대로 떠오르더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종목인데, 자신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모든 선수들이 자신 있게 했으면 해요. 못할 것은 결코 없어요.

선수, 코치, 심판 등 각자의 일터에서 그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요. 제가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피겨 선수들이 운동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마련됐으면 해요. 엘리트와 생활체육이 양립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평창 이후에도 은퇴하는 선수 없이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이 생겼으면 해요."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 이희훈


김연아가 고마웠던 이유

방상아 위원은 유독 김연아의 대회 중계에서 '고맙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이 나온 직후에도, 2014 소치 대회에서 눈물의 마지막 시상식을 마친 직후에도 그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빠지지 않고 했다.

수백번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서양이 독식했던 피겨스케이팅의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대표로 출전했다. 혼자라는 외로움, 편파판정 등 외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랑프리,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 출전했던 모든 대회에서 시상대에 선 후배의 모습은 더 이상 신기루가 아닌 현실이었다.

"일본이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현장에서 중계하면서 어둡고 깊은 통로로 빠져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아직도 너무 멀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축하를 해줘야 하는 자리지만 너무나 쓸쓸했고 뒷골목으로 숨어 들어갔어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대회였던 2010 밴쿠버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사실 저희는 '거저 얻은' 거잖아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에 너무나 감격했죠.

(김연아 선수의) 성실하고 의연했던 자세, 끈기, 그리고 극복해낸 자세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모든 것을 해냈어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해낸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감히 얘기하기 어려워요.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김연아는 늘 혼자였어요. 대회를 나가도 우리는 정말 선수, 임원 하나 정도만 나가요. 그런데 강대국 선수들은 '팀'으로 나오거든요, 이건 너무 외롭고 썰렁하게 만들어요. 김연아 선수는 그런 것에 결코 기죽거나 지지 않았어요. 설령 억울한 일이 닥쳐도 억울해하기 보다는 그것을 지혜롭게 넘기고 다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냈다는 것이죠. 나이답지 않고 의연하게 성숙한 태도들이 훌륭했어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났기에 그것이 주는 감동에는 기쁨과 눈물이 교차했다. 김연아의 성공은 개인의 영예만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 그것이 금메달 이상의 성과였고 은퇴 후 김연아 키즈들과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일 것이다.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 이희훈


변질돼 버린 피겨, 과거의 아름다움은 어디로 갔나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의 키워드는 '점수 고공행진'과 '4회전 점프'다. 김연아가 은퇴한 후 여자 피겨는 러시아가 모든 대회를 쓸어갔다. 매 시즌마다 새로운 유망주들을 기계처럼 배출해 냈고 현재 '투톱'인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19), 알리나 자기토바(16)등은 이미 230~240점대를 돌파하며 김연아의 세계 신기록을 깨버린 지 오래다.

물론 이들이 점프 성공률이 높고 실전에서 대부분 기복 없는 클린 연기를 선보이는 것은 대단하다. 하지만 과거 김연아가 선수로 활약했던 시절 점수 상승폭을 보자면 그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다. 김연아는 구성점수에서 10점 만점을 받기 위해 시니어 데뷔 후 8년여 시간이 걸렸지만, 현재 러시아 선수들은 불과 2년여 만에 그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있다. 방상아 위원은 이런 여자 피겨계 흐름을 중계하면서 당황함이나 불쾌감을 몇 차례 드러내기도 했다.

"사실 감동도 없었고, 칭찬할 수도 없었던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말수가 더 메말랐던 것 같아요. 사실 피겨스케이팅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이래야 하는데,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우리 선수들이 실력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를 위해서는 선수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심판진, 연맹 등 서로 다함께 커나가야만 해요."

반면 남자 피겨는 이제는 4회전 점프를 빼놓고는 논의 자체가 안 되는 형국이 됐다. 평창에서는 20위 이내에 드는 선수들 대부분이 4회전 점프를 시도할 것이고, 상위 톱5(하뉴 유즈루, 네이선 첸, 우노 쇼마, 진보양, 하비에르 페르난데스)는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을 모두 합쳐 최소 4~5회 가량 이 점프를 시도할 예정이다. 결국 클린만이 답이고 하나의 실수는 메달과 멀어질 것이다. 시청자들에게는 아찔함을 선사하겠지만 '기술과 예술의 조합'을 추구하던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기술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형국은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4회전 점프 경쟁에 불을 지핀 것은 진보양 선수였죠. 네이선 첸 선수는 주니어 때부터 워낙 탁월했던 선수였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4회전 점프를 해낼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이런 추세가 선수들에게는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먼저 시니어에 있었던 하뉴 유즈루,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선수들은 이런 추세를 쫓아가야 하다보니 무리가 오고 우려가 나왔죠.

4회전 점프 하나를 성공하기 위해 그만큼 예술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어요. 네이선 선수는 예술적인 부분도 탁월한 선수인데 점프에만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이 점에서 과소평가를 받고 있어요. 진보양, 우노 쇼마 선수 모두 최고의 스케이터들이고 메달 자격을 갖췄어요. 당일 컨디션과 실수 여부에 따라 달린 것이죠.

피겨에는 기술점수가 있고 올림픽 메달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죠. 시대의 흐름인 셈입니다. 사실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선수의 경우 음악과 하나가 됐을 때 퍼포먼스가 정말 멋져요. 그런데 메달 의식 때문에 기술이 우선시 되고 그런 부분은 표출이 안되는 것이 참 속상하네요."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 이희훈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남자피겨의 추세 속 차준환은 모든 것을 갖춘 스케이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최연소로 4회전 쿼드러플 살코 점프를 성공했으며, 남자 선수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선이 고우면서도 섬세한 팔동작과 감정 연기를 프로그램에 녹여내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평창에서 선보일 프리프로그램 '일 포스티노'다.

하지만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었다. 올 시즌 시니어로 올라온 차준환은 4회전 점프를 훈련하던 도중 고관절과 발목 부위 등에 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국내 올림픽 1,2차 선발전에서 이준형(22·단국대)에게 뒤진 결과를 냈다. 그러나 마지막 선발전에서 깔끔한 클린연기로 한 방에 뒤집기에 성공하며 평창행을 확정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시니어로 올라온 후 평창까지 시간이 불과 6개월여 밖에 되지 않았던 것. 그 기간 동안 4회전 점프를 늘리기 위해 더 혹독한 훈련을 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차준환은 평창을 발판으로 삼아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꽃피우기에 충분한 나이가 된다. 하지만 기다려주지 않는 흐름은 선수를 압박할 수 밖에 없었다.

"차준환 선수는 현재 세계 남자피겨 최상위권에 있는 선수들 못지않게 해낼 선수에요. 사실 선수의 잠재력과 재능이 서서히 진화돼 가야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리하게 요구하면 분명 무리가 옵니다. 지금은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는 시간이 필요해요. 차 선수뿐만 아니라 지금 국내 주니어 선수들(유영, 임은수, 김예림 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행인 것은 성장기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빨리 극복해 냈고 저희에겐 행운인 거죠.

사실 차준환 선수도 김연아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의 힘으로 커나가고 있는 거예요.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이 제일 잘못된 일입니다. 유영 선수에게도 '왜 평창에 못 나가냐'가 하는 게 아니라 다음 올림픽까지 커나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해요."

짧은 인터뷰 시간 속에서도 피겨에 대한 애정과 진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또 다른 '피겨여왕'과 혼자가 아닌 '팀'으로 함께 일굴 기적을 믿기에 한국 피겨는 더 큰 기다림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방상아 위원은 김연아의 현역 시절을 함께 준비했던 배기완 캐스터와 함께 다섯 번째 올림픽을 맞이할 채비를 끝냈다.

이번에 방 위원은 단체전과 남녀싱글, 갈라 프로그램을 중계할 예정이고, 팀이벤트와 남자싱글 경기에는 차준환에게 밀려 아쉽게 올림픽 기회를 놓친 이준형(22·단국대)도 중계에 힘을 보탠다. 페어와 아이스댄스는 이현경 캐스터-변성진 국제빙상연맹(ISU)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가 중계한다.

"방송 중계 경쟁이 점점 과열되는 것 같은데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해요. 이번에 타 방송국은 신세대 선수들을 해설위원으로 앞세워 밝은 분위기로 꾸몄더라고요. 저 역시 밝은 분위기로 시청자분들을 뵙겠습니다. 준비하면서 그러던데 '피겨 해설의 어머니'라고들 그러더라고요. 어머니 소리는 아직 듣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하하. 가장 편안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해설, 그리고 오래 중계한 경험을 바탕으로 '믿고 들을 수 있는 방송'이라는 수식어를 들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상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 이희훈


* 방상아 해설위원 프로필
생년월일: 1966년
프로필: 현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현 숭실대 겸임교수
현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 피겨스케이팅 강사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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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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