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코미디를 끼얹은 스페이스 오페라, 이런 '토르'는 없었다

[집중탐구] 또다시 진화한 MCU... <토르: 라그나로크>만의 특별함

17.11.03 16:47최종업데이트17.11.03 16:47
원고료로 응원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 라그나로크>의 예고편은 어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마블 코믹스의 만화 작품에 기반을 두고,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슈퍼히어로 세계관이자 미디어 프랜차이즈, 아래 MCU-기자 주)의 것보다 충격을 안겨주었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해머 묠니르를 한 손으로 파괴한 헬라(케이트 블란쳇 분)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기를 잃은 토르는 그녀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 위기에 처한 토르 앞에 나타난 헐크가 갑자기 덤비는 난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까? 예고편이 일으킨 파장은 엄청났다.

슈퍼히어로의 르네상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지금 할리우드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르네상스 시대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다. 마블 스튜디오가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MCU를 구축한 이래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너도나도 슈퍼히어로 영화를 쏟아내며 '유니버스' 만들기에 앞장섰다. 세계관을 의미하는 '유니버스'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넘어 킹콩과 고질라가 만나는 '몬스터유니버스', 미이라, 프랑켄슈타인 등이 등장하는 '다크유니버스'로 진화하기도 했다.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프랜차이즈에 목말라하던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슈퍼히어로 장르와 유니버스는 단비와 다름없었다.

유니버스 안에서 한 편의 영화는 개별적이기보단 종속 개념에 가깝다. 기획과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는 유니버스 전체의 '톤 앤드 매너'를 우선시한다. 스튜디오는 심한 변화를 주다가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프랜차이즈가 망가지는 걸 절대로 원치 않는다. 그러나 지나친 반복은 관객의 피로감을 높일 수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하는 스튜디오는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셈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과거에 제작자의 입김이 세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벤져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연출한 조스 웨던은 여러 이유로 MCU에서 손을 뗀 상태이며 수년간 <앤트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에드가 라이트는 창작에 대한 견해 차이를 이유로 들면서 떠났다. <토르: 다크 월드>의 연출을 맡았던 패티 젠킨스는 마블 스튜디오의 요구 조건이 까다로워 하차를 선언했다.

최근 마블 스튜디오는 감독의 개성을 살려주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추세다. 마블 스튜디오가 근래 내놓은 흥미진진한 작품은 모두 감독의 개성이 만든 결과물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제임스 건의 B급 무비 감성으로 충만하며 <닥터 스트레인지>는 스콧 데릭슨의 시각적인 야심이 물결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존 왓츠도 별난 감성을 영화에 넣었다. 분명히 MCU의 개별 영화에서 작가의 인장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메가폰은 뉴질랜드에서 온 타이카 와이티티에게 쥐어졌다. 그를 기용한 이유를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 케빈 파이기에게 들어보자.

"새로운 캐릭터들과 빌런, 장소를 이용해 전작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우리는 시리즈의 분위기에 변화를 주어 관객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연출을 수락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마블 제작진은 1,2편과는 다른 방식의 영화를 원했고, 그것이 내가 이 작품에 끌린 이유 중 하나다. 우주가 확장되듯이 MCU도 변화를 맞이하고, 나 자신도 창작자와 감독으로서의 경험과 스토리텔링을 더 넓힐 필요가 있었기에 이 작품을 선택했다."

'셰익스피어'와 <왕좌의 게임>을 벗어난 새로운 토르의 탄생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는 <아이언맨> <인크레더블 헐크> <퍼스트 어벤져>과 함께 페이즈1(어벤져스)에 속하는 슈퍼히어로다. 그러나 토르는 아이언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와 차이가 제법 크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슈트를 만들었고 헐크는 과학을 연구하다 방사선에 노출되었으며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 정부의 '슈퍼 솔져'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인간병기다. 이들은 현실에 발을 딛는다.

반면에 토르는 우주(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신)이다. 태생부터 이질적인 토르는 가공할 힘과 터무니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특별한 존재다. 마블 스튜디오는 자본과 과학(아이언맨), 영웅과 괴물(헐크), 도덕성과 신념(캡틴 아메리카)에 '토르'라는 신화를 입혀주면서 페이즈1의 <어벤져스>를 완성한 것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판타지에 가까운 <토르>를 우스꽝스럽지 않게 보여주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인용했다. <헛소동> <햄릿> <오델로>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수 영화로 옮긴 바 있는 케네스 브래너에게 연출을 맡긴 건 우연이 아니다. 그의 조율로 태어난 <토르>는 대부분은 무겁게 진행하다가 가벼운 유머를 약간 친 정도였다. 이런 흐름은 <왕좌의 게임>을 만든 바 있는 앨런 테일러가 참여한 <토르: 다크 월드>까지 이어졌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는 페이즈1에 가까스로 안착했지만, 입지는 애매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는 확고부동한 리더로 자리를 잡았으나(헐크의 경우는 판권 문제로 솔로 무비를 만들기 어렵다) 토르는 망치를 휘두르는 근육맨의 이미지만 남았다. 토르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모험을 해야 하나? 앞날은 캄캄했다.

<토르>의 진정한 재미를 찾고자 의기투합한 케빈 파이기와 타이카 와이티티는 과감한 방향 전환을 결정한다. 그들은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배우의 재능을 살리고 토르가 활력을 얻을 최선책을 찾아냈다.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코미디를 결합하는 시도를 한다.

셰익스피어적 가족극인 <토르>와 <왕좌의 게임>스러운 판타지 분위기로 가득한 <토르: 다크 월드>는 '타이카 와이티티'란 유머 필터를 통과하며 웃음이 넘치는 <토르: 라그나로크>로 새로이 태어났다. 이런 변화에 대해 타이키 와이티티 감독은 "북유럽 신화에서 '라그나로크'란 말은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며 "나는 기존 것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토르: 라그나로크>는 '셰익스피어'와 '왕좌의 게임'을 벗어난 새로운 토르의 탄생이다.

희극과 비극이 적절히 섞인 토르와 헐크의 모험담

▲ <토르: 라그나로크> 영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 라그나로크>의 서사는 북유럽의 신화적 요소와 마블 코믹스의 것으로 이뤄졌다. '라그나로크'는 북유럽의 신들이 벌인 최후의 전쟁,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 또는 문명의 멸망을 의미한다. 극 중에 나오는 거대한 늑대 펜리스, 불의 거인 수르트도 북유럽 신화에서 따왔다. 발키리(테사 톰슨 분)도 북유럽의 신화에서 오딘의 궁에서 그를 모시던 전사들에서 가져온 인물이다.

헐크가 검투사가 되는 내용은 마블 코믹스의 <헐크: 플래닛 헐크>(시공사 출간)를 참고했다. 원작은 헐크(브루스 배너)가 위험하다고 느낀 지구의 슈퍼 히어로 연합이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극비리에 그를 우주로 추방하고, 우주를 떠돌다가 행성 사카아르에 착륙하여 노예로 팔려간 뒤 '그린 스카'라는 이름의 사카아르 최강 검투사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사카아르 행성과 검투사의 설정은 고스란히 영화에 옮겨졌다. 토르를 돕는 코르그와 미에크도 <헐크: 플래닛 헐크>에서 가져왔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각본을 쓴 에릭 피어슨, 크레이그 카일, 크리스토퍼 요스트는 북유럽의 신화와 <헐크: 플래닛 헐크>를 합한 이야기에 코믹한 설정을 한가득 넣었다. 특이한 점은 대사의 상당 분량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통 블록버스터 영화나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마블 코믹스의 만화 작품에 기반을 두고,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중심으로 드라마, 만화, 기타 단편 작품을 공유하는 가상 세계관이자 미디어 프랜차이즈, 아래 MCU)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만큼 <토르: 라그나로크>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영화는 첫 장면,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수르트가 만나는 대목부터 익숙함 따위는 내동댕이친다. 지금껏 토르가 활약한 영화를 벗어나며 심각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SNL풍의 개그는 배를 잡게 한다. 흡사 <데드풀>인가 싶을 정도다. 크리스 헴스워스는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보여준 바 있는 코미디 연기를 아낌없이 발휘한다.

헐크(마크 러팔로 분)도 개그에 욕심을 낸다. 머리라곤 안 쓰는 토르보다 더 황당한 짓거리를 일삼고 어처구니없는 몸개그로 웃음을 자아낸다. 이제까지 두 세 마디 정도만 가능하던 헐크는 대화를 주고받는 수준에 접어들었다. 토르와 헐크/브루스 배너가 나누는 대화는 만담에 가깝다. 토르, 헐크 개그 콤비에 로키(톰 히들스턴 분)와 발키리가 가세하며 '리벤저스'(라고 주장하나 하는 짓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유사하다)가 태어난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코미디의 농도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앤트맨>과 필적한다. 하지만, <토르: 라그나로크>는 마냥 웃기자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MCU 최초의 여성 빌런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내는 헬라(케이트 블란쳇 분)가 아스가르드를 침공하는 전개는 사뭇 진지하다.

▲ <토르: 라그나로크> 영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 라그나로크>는 헬라가 아스가르드를 침략하는 이야기와 헬라에게 공격당한 토르가 사카아르 행성에 가서 헐크를 만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가 비극의 문체로 써졌다면 후자는 희극으로 펼쳐진다. 두 이야기는 각기 전개되다가 나중엔 하나로 합쳐진다. 전개 과정에서 토르, 헐크, 로키, 발키리는 서로 흥미진진한 화학반응을 이룬다.

헬라는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빌런이 아니다. 그녀는 아스가르드의 보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오딘(안소니 홉킨스 분)이 숨기고 싶었던 어두운 그늘(과거)이면서 이성과 문명을 앞세운 제국의 감춰진 야만이자 광기가 헬라인 셈이다. 헬라는 내면(역사)을 들추며 힘이란 욕망을 부추긴다. 그랜드마스터(제프 골드브럼 분)가 지배하는 사카아르가 로마 제국을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 헐크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 토르는 헐크와 함께 욕망을 극복한다.

영화에 담아낸 현실

▲ <토르: 라그나로크> 영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헬라와 그랜드마스터가 보여주는 힘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면모는 현실의 뉴스와 겹쳐진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명백히 트럼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땅이 아닌, 백성이 있는 곳이 아스가르드"란 외침, '모두의 왕국을 건설하자'는 바람, 레드 제플린의 노래 'Immigrant Song'이 더해지며 '외부, 이민자, 이주'를 말하는 영화의 목소리는 더욱 뚜렷해진다.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가 뉴질랜드 출신의 타이키 와이티티에게 메가폰을 맡긴 점도 미국 외부의 정서를 담으려 한 포석이다.

이 외에도 <토르: 라그나로크>는 흥미로운 면이 많다.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디스코 음악과 사카아르 행성은 1970~1980년대 스페이스 오페라를 떠올리게 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댄 헨나는 사카아르 행성에 금속성 재료로 이뤄진 건물들, 우주에서 날아온 잔해와 알루미늄, 전선들을 활용한 소품, 녹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등 총천연색 배합으로 꾸며진 아트워크(artwork)으로 가득 채웠다. 사카아르 행성은 MCU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복고와 SF적 상상력이 결합한 새로운 공간이다.

카메오도 풍성하다.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의 등장은 이미 알려졌다. 초반에 나오는 연극을 눈여겨보길 강력히 추천한다(토르, 로키, 오딘으로 분한 배우는 모두 유명배우다!). 또한, MCU의 작품답게 다양한 연결 고리를 만날 수 있다. 쿠키 영상은 당연하거니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MCU 캐릭터의 소품이나 영상을 만날 수 있다. 이것 역시 MCU를 보는 즐거움이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는 세 번째 솔로 무비에서 자신을 대표하는 물건과 마주했다. <아이언맨 3>에서 아이언맨은 슈트를 파괴했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방패를 버렸다. 토르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묠니르를 잃는다. 무기를 잃고 좌절하던 그에게 오딘은 질문한다. "너는 망치의 신이냐? 천둥의 신이냐?" 토르가 자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는 과정이 <토르: 라그나로크>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토르: 라그나로크>는 슈퍼히어로들의 대립을 묘사하며 진정한 영웅, 리더의 자격, 지도자의 길을 화두로 던졌다. 두 영화는 각각 현실의 색채와 판타지의 화법으로 분열의 시대상을 포착한다. 이제 슈퍼히어로들은 최강의 적 타노스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맞붙을 예정이다. 그 징검다리 역할은 한 <토르: 라그나로크>는 여러모로 마블 스튜디오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MCU는 또다시 진화했다.

토르 라그로크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톰 히들스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