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취업 특혜,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로 본 오늘 이슈] 장애인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조선시대 사람들

등록 2017.09.28 16:47수정 2017.09.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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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재상' 하면, 흔히 황희가 먼저 떠오른다. 세종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간 임금 생활을 했다. 그 긴 기간 동안 황희 홀로 보좌할 수는 없었다. 명재상이 더 있었다. 맹사성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허조(1369~1439년)도 있었다. 

하양 허씨인 허조는 가야 초대 왕비 허황옥의 후손이다. 하양은 대구와 경주 사이의 경산시에 있다. 허황옥과 김수로의 열두 아들 중에 2명은 아버지 가문이 아닌 어머니 가문에 입적됐다. 한국의 허씨는 이렇게 시작했다.

선조 임금 때 관료인 허봉이 쓴 역사서 <해동야언>에서는 "우리나라 조정에서 훌륭한 재상을 들자면,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친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조선 전기에 대한 언급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황희와 허조가 가장 유명한 재상이었다는 것이다. "둘 다 세종을 섬기며 정사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룬 업적이 국사에 실려 있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허봉은 말했다.

15세에 진사시험에, 17세에 생원시험에 급제한 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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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야언>.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사람에 따라서는 황희에 더해 맹사성을 거명할 수도 있겠지만, 허봉은 허조를 언급했다. 같은 허씨라는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허봉은 하양 허씨는 아니고 양천 허씨다. 양천 허씨 역시 허황옥의 후손이다. 양천 허씨는 서울시 양천구 및 강서구 일부를 근거지로 했다.

요즘 강서구 장애인 특수학교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동의보감>의 허준도 양천 허씨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허준이 이 지역과 인연이 있으므로 해당 부지에 특수학교가 아닌 한방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출생한 허조는 천재 소리를 들을 만했다. 15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하고 17세에 생원시험에 급제했다. 22세에는 대과까지 급제했다. 서른 이전에 대과에 급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허조는 10대 때 진사·생원 자격을 획득한 데 이어 20대 초반에 대과까지 마무리했다.


고려 멸망 2년 전인 1390년에 관직을 받은 허조는 조선왕조 들어서는 태종과 세종 때 두각을 보였다. 이 시대의 각종 의례 제정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성격이 강직하고 공정해서 태종 이방원과 일시적인 불화를 겪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신망을 얻어 명재상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허조는 신체적으로 불편했다. 불편함의 정도가 보통 수준을 뛰어넘었다. <해동야언>에서는 그의 외모를 이렇게 기술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깎은 듯이 여의고 파리했으며, 어깨와 등이 굽어 있었다."

<해동야언>을 지은 허봉은 선비 출신 관료다. 선비 출신들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신체적 약점을 가급적 거론하지 않았다. 일례로, <광해군일기>를 기록한 사관(역사 기록관)은 광해군 정권의 실세 상궁인 김개시의 예쁘지 않은 얼굴을 두고 "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기술했다. <광해군일기>를 편찬한 사람들은 광해군 정권에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김개시의 외모를 조심스레 거론한 것이다.

이런 선비들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허조의 신체적 불편함이 미미했다면 허봉이 "어깨와 등이 굽어 있었다"는 문장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함이 상당한 수준이고 세상의 눈에 쉽게 띌 정도였기에, 언급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어깨와 등이 심하게 굽었던 듯하다.

다리 절었던 한명회, 한쪽 눈이 안 보인 채제공

우리 시대는 장애인 인권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만, 허조 같은 신체적 조건을 가진 이들을 위정자 반열에 쉽게 올려놓지 못한다.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 시대는 외형에 점점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포함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허조처럼 불편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모두 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그랬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고위직 진출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허조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수양대군 세조시대의 실세 정치인인 한명회도 그랬고, 정조시대의 번영을 주도한 재상 채제공도 그랬다. 1905년 4월 27일자 <황성신문>에 이런 말이 있다.

"한명회와 채제공은 한쪽은 절름발이였고 한쪽은 애꾸눈이었다."

한명회는 다리를 절었고, 채제공은 한쪽 눈이 안 보였다. 채제공은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양쪽 눈의 방향이 서로 다른 사시이기도 했다. 초상화를 유심히 보면 눈의 방향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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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화. ⓒ 위키백과


허조·한명회·채제공 같은 사례를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다. 신체적 불편을 가진 상태에서 나라를 이끈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 본인이 열성과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애인을 배려하는 국가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력으로 세조 3년 9월 16일자(양력 1457년 10월 4일자) <세조실록>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에는 신체장애인을 잔질(殘疾) 혹은 독질(篤疾)로 불렀다. '질'자가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장애를 질병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로 봤던 것이다.

위 실록에 따르면, 한성부(서울시)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이 후견인 내지 도우미의 지원을 받도록 배려했다. 의료기관인 활인원에서는 이들에 대한 복지 제공까지 책임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주기적으로 정부에 보고했다.

또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일자리도 적극 알선했다. 점치는 직원이나 기우제 할 직원 또는 악기 연주할 직원이 필요할 때는 이들에게 취업 특혜를 주었다. 세종 13년 12월 25일자(1432년 1월 28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음악가 출신 관료 박연은 시각장애인 직원들에 대한 대우를 높여달라면서 세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제왕들은 시각장애인을 악사로 임명해 연주를 맡겼으니, 이는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천성 관절만곡증 앓는 기자 모욕한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1년 전인 2015년 11월 24일 사우스캐롤라이나 공화당 경선 유세 당시, 자신에게 비판적인 뉴욕타임스 세르지 코발레스키 기자를 반박하면서, 그를 면전에 두고 모욕적인 언행을 했다.

코발레스키는 선천성 관절만곡증을 갖고 있다. 팔이 불편하다. 트럼프는 그를 가리키며 "오, 이 불쌍한 사람을 보세요. 자기가 뭔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하네요"라며 자신의 오른팔이 굽어져 불편한 것처럼 흔들어댔다. 코발레스키의 팔 장애를 흉내 낸 것이다.

트럼프 같은 사람은 옛날 우리나라 조정에는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장애인에 대한 대우를 논의하는 곳에, 트럼프 같은 사람은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허조를 포함해 한명회·채제공 같은 이들이 신체적 불편을 불편해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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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의 허준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 강서구에서는 일부 주민들이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대신, 허준의 지역적 연고를 고려해 해당 부지에 한방병원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조선시대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허준의 이름을 빌려 특수학교 터를 빼앗는 것은 허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허준은 장애인을 배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또 우리 땅, 우리 사람들에게 맞는 의학을 확립하겠다며 <동의보감>을 열심히 저술했다. 동족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허준의 이름을 앞세워 특수학교 설립을 가로막는 것은 허준 본인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와 관련된 병원이 세워지기보다는, 몸이 불편한 학생들이 남들과 똑같이 성장하는 세상이 실현되는 쪽을 더욱 더 바랄 것이다.
#강서구 특수학교 #장애인 #허조 #한명회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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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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