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

억세게 운 좋았던 한 캄보디아 정치인의 말로

왕당파 핵심인물이자 부총리까지 지낸 '닉 분차이', 마약 관련 혐의로 구속돼

등록 2017.08.22 17:55수정 2017.08.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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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신자로 찍혀 훈센총리의 눈 밖에 나 정부고문 등 정부주요직에서 해임된 뒤 마약관련협의로 구속까지 된 닉 분 차이 크메르국민연합당 당수. ⓒ 박정연


"천 가지 일 중 단 한 번의 행운"

왕당파인 푼신펙당 군사령관과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부총리 자리까지 오른 적이 있는 닉 분 차이 크메르국가연합당(KNUP) 당수(58)가 과거 자신이 직접 쓴 책의 제목이다.

책 제목처럼 그는 캄보디아 정치사에선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로도 통한다. 그가 말한 '단 한 번의 행운'이란 1997년 7월 훈센 총리가 주도한 유혈쿠데타 당시 태국국경을 넘어 구사일생 살아남은 뒤 지나온 자신의 정치역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당시 자신을 지키던 경호원들마저 훈센 측 군인들에 의해 눈알이 뽑히는 고문 끝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그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이듬해 집권여당인 인민당(CPP)이 푼신펙당과 연립정부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 억세게 운이 좋은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과거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동료까지 배신한 인물이란 악평도 존재하지만, 그는 집권세력과의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30년 넘게 험난한 캄보디아 정치판에서 용케 살아남아, 권력을 누릴 만큼 누렸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 듯 그에 늘 수식어처럼 붙던 '행운'도 이제는 명(命)을 다한 듯싶다.

지난 6.4 지방기초단체선거가 치러진 날, 훈센 총리가 궁정부에 보낸 서류 한 장에 노로돔 시하모니국왕이 즉각 서명을 했다. 서류에는 부총리겸 정부고문을 맡고 있는 닉 분 차이의 해임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국왕의 칙령이 즉시 발효되면서 그는 부총리급에 상응하는 정부고문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주요직책에서 해임됐다. 같은 날 경찰당국은 그의 집을 급습해 등록된 총기류 8점 외에 허가받지 않은 총기류까지 모조리 압수해갔다. 그 뿐만 아니다. 불과 하루 이틀 사이 그의 핵심측근으로 꼽히는 10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 역시 줄줄이 정부 요직에서 옷을 벗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해임 소식에 여야정계는 물론이고, 일반국민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지 언론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때 푼신펙-인민당 연립정부의 중요한 한 축이었으며, 오랫동안 여당의 거수기 역할을 자처해, 소위 말하는 '여당의 2중대'라는 비난속에도 꿋꿋이 버텨온 그였기 때문에 해임배경이 무엇보다 의심스럽고 궁금했다. 현지 언론들도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나섰지만, 억측과 소문만 무성할 뿐 그가 해임된 진짜 이유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집권당 2중대'를 자처하던 그가 갑작스레 해임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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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인 푼신펙당에서 나와 지난해 창당한 크메르국민연합당(KUNP) 홍보 간판의 모습. 가운데가 닉 분 차이 총재의 모습이 보인다. ⓒ 박정연


그가 해임된 이유에 대한 실마리가 풀린 건 떼어 반 국방부 장관의 입을 통해서였다. 지난 6월 8일 현지언론 <프놈펜 포스트> 전화 인터뷰에서 해임사유에 대해 장관은 이같이 간단히 설명했다.

"그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관은 덧붙여 "그가 정부의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그가 보유한 무기와 경호원은 소속부대에 반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해임이유를 설명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했다. 반 장관은 훈센총리와 정부여당에 대해 그가 무슨 불충스러운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해, 그의 해임을 둘러싼 의문은 더욱 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찰당국이 나서 닉 분차이의 해임 배경에 대해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당국대변인은 닉 분차이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측 인사와 몰래 비밀 통화를 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슬쩍 흘렸다. 전화 내용이 도청되어 훈센 총리를 비롯해 정부수뇌부가 이미 진상을 파악한 상태라고 전했다. 다만, 도청된 전화 내용을 확보했다고 할 뿐 통화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어떤 경로로 도청파일이 입수되었는지도 밝히지 않은 상태다.

닉 분 차이와 야당 지도부의 비밀통화 내용은?

문제의 발단이 된 닉 분 차이와 야당 부총재 엥 차이 에앙과의 비밀통화내용은 대략 이렇다. 대화 내용에는 지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닉 분 차이가 야당지도부와 모종의 협력을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화에는 자당(KNUP)이 후보를 내지 않은 지역구는 제1야당인 구국당(CNRP)을 적극 지지하고 밀어주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닉 분차이의 당 지도부와 측근들은 그가 단 한번과 제1야당(CNRP)과의 공조를 약속한 적도, 야당에 대해 입도 벙끗한 적이 없다며 적극진화에 나섰다. 제1야당인 구국당(CNRP) 역시 뒤늦게나마 해명작업에 착수했다. 임 소완 야당(CNRP) 대변인은 "당내 인사와 닉 분차이 총재 간 통화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으며, 이러한 논의조차 이뤄진 적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정작 논란의 중심에 선 닉 분 차이만은 한 달 넘게 침묵을 지켰다. 급기야, 이후 그의 행적이 현지 언론의 레이더망에서 사라졌다. 해임 전 훈센 총리와 잠시 뭔가 매우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현지 언론에 포착되었을 뿐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총 1646개 의석중 국민연합당(KNUP)후보로 나서 유일하게 당선된 반테이 민체이주(州) 면장 역시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그가 태국으로 잠시 도피했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지난 1997년 훈센총리가 주도된 유혈쿠데타 당시 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태국으로 도망을 간 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들도 그가 태국으로 잠시 도피했을 것이란 추정했다.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지난 2일 돌연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라디오 자유 아시아(RFA)와 가진 인터뷰에서 닉 분차이는 야당과의 합병 소문에 대해 일종의 '혼동(Confusion)'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훈센 총리와 협력해왔다. 그 같은 일(야당과 비밀공모)은 없었다. 약간의 혼동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호하면서도 적극적인 해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경찰의 압박수위와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인터뷰를 가진 바로 다음날인 지난 3일 오전 그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수도 프놈펜 쯔로이 짱와 지역에 있는 그의 자택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는 현재 프놈펜외곽 PJ 교도소로 이송돼 수감 중이다.

해임도 모자라 그를 구속까지 시킨 이유가 궁금했다. 현지 언론과의 가진 인터뷰에서 경찰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2007년 발생한 마약사건에 그가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지난 2007년 4월 1일 경찰의 대대적인 전국단위 마약단속수사가 전개된 적이 있다. 당시 캄보디아 남동부에 위치한 캄퐁스푸 한 지역 농장에서 마약의 일종인 메탐페타민(methamphetamines)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6톤 가량의 화학물질이 대량 발견됐다. 수사결과 당시 이 농장의 실제 소유주가 놀랍게도 닉 분 차이 부총리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 마약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경찰당국은 당시 관련자 21명을 마약제조 및 유통 협의로 무더기 구속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켜버렸다.

10년 전 마약사건에 연루된 닉 분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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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4일 실시된 캄보디아 지방자치단체선거를 앞두고 유세에 나선 야당지지자들의 행렬. 이번 선거에서 선전한 야당은 자신감에 차있는 반면, 훈센총리가 이끄는 집권여당은 초조해진 상태다. ⓒ 박정연


무려 10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한 협의를 끄집어내 그를 체포한 사실을 두고 저의에 의심을 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야당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이에 영장을 발부한 프놈펜법원측이 해명에 나섰다. 갑자기 영장을 발부한 이유에 대해 "당시 사건으로 투옥된 한 죄수가 마약제조사건의 중심에 닉 분차이가 있다는 제보성 편지를 최근(6.31) 판사에게 보내왔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참고로,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해 25년형과 벌금 2만 5000불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이 죄수는 과거 닉 분차이의 고문으로 일했던 중국계 여성이다. 이 여성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혔지만, 제보를 한 시점과 배경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경찰은 이 사건 외에도 2012년 발생한 또 다른 마약 사건에도 닉 분차이가 연루된 정황을 포착했다고 추가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 정치평론가는 정부가 배신자로 낙인찍힌 닉 분차이를 옭아매기 위해 오래전 범죄 협의를 뒤집어 씌우려는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 역시 자신들의 오랜 정적이나 배신한 인물을 제거하는 오래된 수법중 하나일 뿐이다. 내년 7월 총선을 앞두고 배신자를 가려내고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더 큰 충성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내부단속이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방식이 과연 이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충성을 강요하면 할수록 앞에서는 아부를 하고 뒤에 가선 배신의 칼날을 가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어느 정치평론가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지난 6.4지방기초단체선거에서 나온 결과에 대한 훈센총리와 집권여당의 불안감과 초조함이 결국 이 같은 사건의 발단이 된 것으로 보는 정치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5년 전 치러진 지방선거와 비교해 지난 6월 선거에서 여당의 득표율은 62%에서 51%로 떨어진 반면 CNRP 득표율은 30%에서 44%로 뛰어올랐다. 농촌지역에서 여당의 지지세가 여전하지만, 특히 도시중산층을 중심으로 야당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이에 편승해 야당은 내년 총선 승리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된다. 자칫하면 32년을 이어온 훈센 정권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집권여당 입장에선 당연히 초조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감을 반영하듯 지난주 훈센 총리가 난데없이 국토순례(?)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총리는 이달 20일부터 전국 24개주를 매주 일요일마다 돌며 근로자들의 대화를 시작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 10일 정치평론가 켐 레이의 백주대낮 살해사건 (관련 기사 : '10만 애도객 운집' 한 정치평론가의 마지막 길) 이후 전국의 주요시장과 시골 마을을 돌며 민심을 얻기 위한 행보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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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째 장기집권중인 캄보디아 훈센총리가 시민들과 만나 사진촬영에 응하는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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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7월 총선을 앞두고 훈센총리는 이달 20일부터 전국 24개 시도를 매주 일요일마다 돌며 근로자들과 만나 대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내년총선에 대한 훈센총리의 불안감이 이같은 행보를 걷게 만든 것 같다고 지적한다. ⓒ 박정연


올해 2차례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야당지도자들의 정치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배신가능성이 높은 주변인물을 색출하는 작업을 통해 집안단속부터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도 뒤따른다. 어찌 보면 그가 본보기가 1호 대상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운이 다한 배신자에게 다가올 운명은?

과거 훈센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닉 분차이가 앞으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아직 판결 전이지만, 사실상 유죄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랫동안 권력의 시녀역할을 해왔던 사법부가 훈센 총리의 뜻을 거스르는 판결을 내린 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캄보디아에서 마약 관련 범죄는 가장 큰 죄로 인식된다. 마약제조 및 유통판매 범죄는 최대 종신형까지도 처할 수 있다. 그가 국가발전에 공헌 전직 고위직 인사라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최소 5년 이상 징역형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앞으로 그의 운명은 오직 훈센총리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

지난 16일 교도소에 수감중인 그가 훈센 총리에게 "자신의 크나큰 실수였다"며 용서를 비는 편지를 현지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하지만, 훈센 총리 측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동고동락한 동료들과 부하까지 배신한 채 20년 넘게 호의호식하며, 운좋게 잘 살아 온 정치인이지만, 그에게 남은 행운도 이게 전부인 듯 싶다. 억세게 운이 좋았던 캄보디아의 한 정치인의 말로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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